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Be gracious to us
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67:1 May God be gracious to us and bless us and make his face shine upon us, Selah
67:2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67:2 that your ways may be known on earth, your salvation among all nations.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도 결국 인간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어떤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완전하게 사랑하시는지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요한일서 4:9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심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에게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가장 본질적이고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각 사람에게 나타나고 역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실체가 되었습니다. 그 분의 사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를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요일 3:1은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를 찾아오셔서 만나시고 자녀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랑과 완전히 구별됩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사랑을 거부합니다. 반대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를 이기십니다. 하나님께 그것을 요구하는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셔야 할 어떤 의무가 있으신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그 분의 자유로운 선택, 주권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신명기 33:16절에서 모세는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이 요셉의 머리에 임할 것이라 노래합니다.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뵈었던 가시떨기 나무, 그 보잘것없고 연약한, 금방 불타버릴 것같은 나무가 저와 여러분입니다. 인생이 자기 눈으로 볼 때에는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 나의 존재를 가볍게 여기면 화가 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그 메마른 가시떨기, 하나님은 그 위에 불길로 계셨습니다. 그러나 태워버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보호하셨습니다. 그 분의 은혜가 요셉에게, 또 우리에게 임합니다. 모세가 요셉을 위해 구하는 복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67:1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여러 시편은 주님의 은혜로 나를 구원하소서, 기억하소서, 살게 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더 많이 나오는 것은, 직접적으로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라는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은혜를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GIve me grace 라는 기도는 성경에 없습니다. 그것은 be gracious to me (us) 나에게 은혜로우신 분으로 대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기억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시 25:16, 119:58). 그래서 오늘 본문은 또한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선물, 물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분 자신이 은사이고 친교이고 계시입니다. 시 67:1도 그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실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셔야 합니다.
시 25:16 주여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님이 우리에게 돌이키셔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시면, 멀리하시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분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살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돌이키십니다. 그 분의 천사나, 어떤 능력이나 분신이 아니라, 그 분 자신, 그의 본질이 우리에게 돌이켜 향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높이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고개만 돌리시면 우리를 보실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절대적으로 낮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돌이키심은 그의 낮아지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절대적으로 높으십니다. 무한히 높으시고 거룩하십니다. 그와 동등한 존재는 없습니다. 어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위해 낮아진다고 해 봅시다. 왕이 거지처럼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슷한 존재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초웡하신 분이기에, 그 분만이 참으로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마치 높은 탑 위에서 선물을 아래로 던져주듯 하시지 않습니다. 그 분이 초월하시기에, 절대적으로 높으신 분임을 알아야 그의 낮아지심도 알 수 있습니다. 전제입니다. 그 누구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우리는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부분적으로나마 동등했을 것입니다. 그의 은혜는 아무 의무도 없고 오직 그 분의 자유로운 뜻으로만 됩니다. 마태복음 10:8 너희가 거저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2:8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은혜를 받는 우리는 전혀 가치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 가운데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고 믿었고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지 않고 도리어 저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압도합니다. 이깁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은 이 저항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저항에 제한받지 않고 극복하고 승리하십니다.
로마서 5장
15절: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 넘쳤느니라
17절: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
20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로마서 5장 15-20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를 보여주시기 위해 “더욱”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How much more!” 15절에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말씀하십니다. 17절에서는 아담으로 인해 사망이 왕노릇 하였지만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 20절에서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5:15 For if the many died by the trespass of the one man, how much more did God's grace and the gift that came by the grace of the one man, Jesus Christ, overflow to the many!
5:17 For if, by the trespass of the one man, death reigned through that one man, how much more will those who receive God's abundant provision of grace and of the gift of righteousness reign in life through the one man, Jesus Christ.
5:20 But where sin increased, grace increased all the more,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그가 죄인의 죄를 용서하심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심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출애굽 때 백성들이 범죄하자 모세는 죄된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출 34:9)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죄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내가 아는 사람이 피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 친지, 교인들이 나의 죄로 인해 고통당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전혀 모르는 남이, 나의 죄로 인해 애매하게 고통받기도 합니다. 또한 모든 죄는 나 자신의 영혼에 해를 끼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나의 죄로 인해서 고난받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받으십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의 일로 여러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뒤에 쓴 시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주님께 범죄하였다고 말합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시 51:4)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하나님 그 분에게, 예수님에 대해 죄를 짓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 자신이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를 즉시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셔도 하나님은 지극히 의로우신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시편에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간구는 나의 죄용서의 간구와 연결됩니다.
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하나님이 우리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신다면, 우리 죄악 그대로 갚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게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분이 행동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인해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그 분의 결단입니다. 그의 행동입니다. 그의 은혜입니다. 다시금, 그것은 그 분 자신의 본질로 인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용서입니다. 죄인의 악의보다 무한히 더 중요한 것이 그의 선하심입니다. 죄인을 죄로써 대하심이 마땅한데, 그 분은 죄에 대해 그 분의 선하심으로 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행동이기에, 우리의 죄는 실제로 용서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 죄를 용서받겠습니까? 이것이 기쁜 소식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죄는 단지 인간적으로 잘못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진실로 죄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저항하고 대적함입니다. 그것이 죄가 엄중한 댓가와 징벌을 치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죄의 용서는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 죄의 형벌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죄값이 얼마나 큰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의 설교에서 잘 표현했습니다. 여기에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엄중하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그 진노를 우리에게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그 아들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마음을 참으로 움직일 때, 우리는 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맞이하지 못하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이 세상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 버나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아!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오는 심판과 진노를 알지 못한 채!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가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깨닫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광경이 너무도 끔찍하여 심지어 지옥의 저주받은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을 보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일 것입니다. 또 그들은 그 죽으심의 효력이 자신들에게는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광경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가장 고통스러운 인식이 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의 다정한 경고를 듣는 것도, 그가 그를 위해 하시는 일도 생각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것을 깨닫고 너무나 두려워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마 27:4)라며 자신의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루터, 눅 5:4-11 설교)
그리스도가 살인자들 사이에서 큰 고통 속에 매달려 죽으시는 성 금요일, 그 분이 피흘리시는 슬프고, 비참하고, 감동적인 광경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 광경을 보는 우리는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죄로 인해 일어났습니다. 의로우시고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신 분이, 그 자신을 내 죄를 위해 기꺼이 주셨고, 자신의 죽으심으로 댓가를 치르셨습니다. 모든 죄인은 그의 죄로 인해 그리스도를 상처나게 했고 끔찍한 죽음을 당하시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여러분과 저의 죄를 지심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그 피흘리시는 슬픈 광경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그 죄가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를 불러일으킨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함께 그 진노에 떨어집니다. 우리의 죄는 너무나 커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과 죽으심이 아니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고 속죄받을 수 없습니다. (루터, 마 28:1-10 설교)
Yea, what more serious and terrible indication of God's anger over sin could there be than the suffering and death of Christ His Son? The consequence of it is that when the passion of Christ really moves a man's heart, he must spontaneously see and feel therein the unendurable anger of God over sin, and be terrified that the world is too narrow for him, as St. Bernard also witnesses was his experience; when he rightly considers the passion of Christ he exclaims: “Ah! I thought I was safe, and I did not know about the judgment and wrath which had gone forth upon me, until I realised that the only Son of God had to die for my sake. etc” For this spectacle is so terrible that even the damned in hell will have no greater pain and consciousness of God's reprobation than what springs from the sight of the death of the Son of God, the effect of which they have allowed to be lost upon them; just as Judas the traitor, since he refused to heed the friendly warning of the Master or to consider what he was doing to Him, was finally driven to such terror by this realisation that He pronounced his own condemnation when he said: `I have betrayed the innocent blood,' Therefore St. Peter also preaches to him here the law of his sin and of God's wrath from this great benefit of Christ. (Luther, Pred. über Lukas 5, 4-11).
The sad, piteous, tragic, moving, blood-stained spectacle which is put before us on Good Friday, that Christ hangs there between murderers and dies in great agony. We ought to consider such a spectacle, as we have already said, in such wise that we conclude therefrom that all this has happened because of our sin, that He, the righteous and eternal high priest, has been willing to give Himself as a sacrifice for our sin, and to pay for it with His death. For every man should realise that his sins have wounded Christ and done Him to death in this terrible way, and that the sufferings of Christ are nothing but the bearing of your sins and mine. Therefore as often as we think of such a sad blood-stained spectacle we must think only that we see there our sins and their provocation of God's terrible wrath, into which we fall with our sins, which is so great that no creature can carry it nor effect atonement except the Son of God alone through His own sacrifice and death" (Luther, Pred. über Matth. 28, 1-10).
은혜는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음은, 그 분 자신을 받음입니다.. 이것이 죄사함의 비밀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안에 계시기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은혜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 죄는 뿌리뽑힙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더이상 두려움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해야 하는 불안도 없습니다. 은혜가 드러나고 일하는 곳에 하나님 자신이 드러나시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를 심판하시고 징벌하실 때에도 있습니다.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는 본질상 은혜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적함을 알 때에만 죄를 옳게 알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갈 때에만 죄로부터 돌이킬 수 있습니다. 거짓 신, 우상과 참 하나님을 판별하는 길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본질상 은혜로우심을 말하지 않는 모든 신관은 우상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찾았는가가 참신과 우상 숭배의 판별기준입니다.
다시 본문을 읽습니다.
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67:2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