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게시판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듣는 교회,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그저 듣고 자신만 알고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 듣고 전하기 위함입니다.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가르치라’는 이 명령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당부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명에 충실하고자 우리는 스스로를 ‘가르치는 모임’이라는 의미의 ‘교회(敎會)’라 칭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Church’라는 단어는 주님을 뜻하는 헬라어 ‘퀴리오스(Kyrios)’에서 유래했다고들 하지만, 우리말 ‘교회’는 가르치는 모임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었는데, 이는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교회의 본분에서 가르치는 것은 본래 중요한 사명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가르칠까요? 교회는 학교와는 다릅니다. 학교는 학문과 기술을 가르쳐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곳이지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많이 연구하고 탐구해도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개미가 아무리 연구해도 사람이 사용하는 컴퓨터를 이해할 수 없듯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결코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셔야 우리가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전했고, 우리는 그 전승을 이어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전해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배우며, 또 전하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분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가 교단과 민족이 다를지라도 본래적으로 한 몸인 이유는, 모든 교회가 한 분 하나님, 그분의 계시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기에 본질적으로 모두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기 혼자 연구해서 교회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결국 모두 연결된 한 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이 오늘 본문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구절은 성경의 수많은 귀한 말씀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잘 표현하는 대목입니다. 특별히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점, 곧 성육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말씀은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말씀으로 온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어린 아기로 태어나 성장하시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사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 줍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귀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귀한 선물이며, 사람이 하는 말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람이 하는 말은 틀릴 수도, 잘못될 수도,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람은 말을 하고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잊어버리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말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그 안에는 틀리거나 헛되거나 거짓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진리의 말씀이기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헛되이 말씀하시거나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55장에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말씀은 그저 한 번 들리고 사라지는 소리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는 말씀이 곧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인격이심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성경은 단순히 종이 위의 글자나 단어, 문장의 집합이 아닙니다. 성경책을 덮어두고 펼치지 않는다면 그저 종이와 잉크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펼쳐 읽어야 합니다. 속으로 읽든 소리 내어 읽든,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인격이 우리와 교통하십니다.
말씀은 인격이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말씀 가운데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말씀을 읽는 것 같지만, 어느새 말씀이 나를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주어가 되어 말씀을 대하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말씀이 주어가 되고 나는 그 대상이 됩니다. 말씀이 나를 보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은 다른 어떤 책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책이기에, 읽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과 계속해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2,000년, 3,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나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말씀’에는 두 가지 다른 헬라어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로고스(Logos)’로, 요한복음 1장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 쓰인 단어입니다. ‘로고스’는 논리(logic)의 어원이기도 하며, 말의 의미, 뜻, 생각, 대화, 심지어 토론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합니다. 이는 사람의 생각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밝혀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많은 학문의 이름에 ‘로고스’가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생물학(Biology)은 문자 그대로 ‘생명의 말씀’이며, 심리학(Psychology)은 ‘영혼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또 다른 단어는 ‘레마(Rhema)’입니다. ‘레마’는 문자 그대로 ‘말해진 것’, 곧 육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로고스’로서의 말씀을 우리가 읽을 때, 그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육성, 곧 ‘레마’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람이 살 것이라 하실 때의 그 말씀이 바로 이 ‘레마’입니다. 사람의 말은 공기의 떨림으로 귀에 들어왔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레마’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영혼의 양식이 되어 우리를 살찌우며, 건강과 새 생명을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 곧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정점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최고의 ‘말씀(Logos)’이신 성자 예수께서 친히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성육신을 통해 비로소 모든 하늘의 비밀이 우리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 이것을 교회는 가르칩니다.
교회가 성경과 오늘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비롯한 수많은 것을 가르치지만, 그 가르침의 핵심이자 다른 모든 것이 파생되는 근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정의와 같은 모든 진리는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심’, 곧 성육신에서 비롯됩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때로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보이셨습니다. 비록 ‘예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지는 않으셨지만, 메시아에 대한 말씀이 주어졌고 사람들은 때때로 그분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때가 차매, 성탄의 날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본래 온전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그 신성을 포기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성을 버리고 완전한 인간만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이 되셨을 때에도 신으로서의 영광과 능력을 동일하게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지니신 신성을 계속해서 보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로 구유에 누워 계실 때나, 이 땅에서 성장하시는 모든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신성의 모든 영광과 능력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지금 원하면 하늘의 천사를 부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성을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갖고 계시면서도 사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는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사람들을 온전히 섬기기 위함이었고, 끝까지 종의 모습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위함이었으며, 십자가 고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신성을 조금도 잃지 않으신 참 하나님으로서, 거기에 더하여 완전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 안에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모두 지니신,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신 것,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비밀입니다.
성육신은 다른 어떤 종교나 사상,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성경에만 있는 비밀이며 우리에게 알려진 진리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귀한 피조물이요, 창조의 정점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귀함과 천함, 강함과 약함이 나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인간이 이토록 귀한 이유는 다른 능력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친히 되기를 원하셨던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만큼 더 놀라운 일이 우주와 역사 가운데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인간의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어찌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연약하고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행하셨기에 참으로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만 머무는 능력이 아니라, 그 테두리를 넘어 친히 인간이 되시는 능력입니다. 약해지실 수도 있는 하나님, 인간만큼 연약해지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수 있는 하나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놀라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참된 의미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연약해지고 겸손해져서 십자가까지 질 수 있을 만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실 수 있을 만큼 전능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함이 우리 인간의 능력보다 강하며, 그분의 능력은 은혜 가운데서 온전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연약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내가 부족하게 느껴지거나 주위 상황이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육신의 가시로 고통받는 약함 속에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연약한 인간이 되셔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형벌과 저주를 대신 십자가에서 지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비밀이며, 이제 우리에게는 환히 드러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에게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희고 환한 모습으로 변모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찬란히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참된 영광은 그런 놀라운 능력의 발현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성을 고스란히 지니신 채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유에 누우신 모습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스터리(mystery)입니다. 성경에서 미스터리, 즉 신비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행하는 성례, 특히 성찬이 바로 미스터리입니다. 믿음 없이 보면 떡과 포도주는 그저 평범한 음식에 불과하지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안에 얼마나 큰 은혜가 있는지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저 보아서는 모르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계시의 비밀을 알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우신 그 연약한 아기의 모습이 얼마나 위대한 영광인지 깨닫고 감탄하며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탄의 밤,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와 그분의 은혜가 그의 삶 가운데 충만했습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의 태양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데, 수많은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 곧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주시옵소서”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신성과 능력을 육체를 통해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진리요, 비밀이요, 계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전해 받아서 배웠으며, 또한 이것을 전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교회’라고 할 때, 성경과 선교를 포함한 많은 것을 가르치지만 그 가운데 핵심은 바로 이것,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독생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 이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로마 등 주요 도시로 퍼져나갔습니다. 교회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처음부터 분명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신약성경의 초기 서신인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기록하고,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의 말씀처럼 “그는 세세에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 고백했듯이,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은 초대 교회부터 명확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사실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확증한 회의가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입니다. 당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교회 내에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로 믿는 신앙과, 그분을 하나님이 아닌, 천사장 미가엘과 같은 가장 높은 피조물로 보는 견해가 공존하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전 로마 제국 각 지역의 주교들이 오늘날 터키의 니케아에 모여 ‘예수는 누구신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논의했습니다. 핍박 속에서 순교까지 하며 믿고 고백하는 그분이 과연 누구신가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혹자는 이 회의를 두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술적으로는 주교들이 모여 표결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차원의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는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사도 시대부터 교회가 믿어온 신앙이 무엇인지를 함께 확인하고 확증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는 새로운 것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전해 내려온 신앙에 공식적인 도장을 찍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300여 명의 주교가 모였을 때, 대다수는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했으며, 처음에는 약 17명 정도가 다른 의견을 가졌으나 논의를 거쳐 대부분 동의했고, 최종적으로 니케아 신조가 선포되었을 때 끝까지 반대한 사람은 두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결정이 아니라,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초대 교회부터 이어져 온 신앙의 발자취를 확증한 것이며, 이것이 교회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훌륭한 인간이나 삶의 본보기로만 믿고 따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 교회의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교리적인 OX 문제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은, 그분이 나의 모든 삶과 생명과 계획을 다 드릴 만큼 절대적인 분이라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나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으며, 나의 주님, 창조주, 구원자, 하나님이시기에 내 삶을 온전히 그분께 헌신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지식적인 동의를 넘어, 나의 삶 전체를 드리는 헌신의 표현이 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다’라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그분을 본받아 닮아가려 헌신하고,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교회’란 무엇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믿고 가르치며, 그분을 본받아 살기를 원하는 헌신된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올 한 해, 우리는 ‘듣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그것을 힘써 ‘가르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바탕으로 삼고, 그 말씀을 믿으며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특별히 기억하고 힘쓸 표어는 ‘듣는 교회,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듣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가 맡은 여러 사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주제인 ‘듣는 교회’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시고 수많은 사람을 도우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셨으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이 땅에 첫 번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맨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그리스도인들은 늘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과연 이분이 누구시기에 우리에게 이토록 엄청난 영향을 끼치시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은 분명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시며, 메시아이시다.’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분으로 우리의 주님이요 왕이 되셔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특별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님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셔서 하나님의 일을 행한 인물은 구약 성경에도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러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분의 능력을 보여준 귀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 중 한 분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그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말씀의 권위가 모세를 능가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는 안식일을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아파 오랜 세월 고통받는 사람을 보시고는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며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라는 율법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며, 율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시며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에는, 그분이 모세나 엘리야를 뛰어넘는 특별한 분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모세나 엘리야에게도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고 특별한 분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를 무덤에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옳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과 행동이 참으로 하나님의 일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고 그의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여야 할 성전이 돈을 바꾸고 제물을 파는 장사하는 곳처럼 변질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시며 상을 모두 뒤엎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달려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성전이 잘못되었으니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는 그분의 말씀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 곧 죽음에서 살아나시는 것을 보며 첫 그리스도인들은 “그는 참으로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으로 충분했을까요? 첫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며 부활하신 분이라는 고백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더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그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한 사건을 넘어, ‘나를 살려주시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놀라운 지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이 그분 자신의 영광일 뿐 아니라, 바로 ‘나’를 살리시는 사건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께서 살아나셨으므로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선포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설명으로 이해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우리의 죄 사함으로 이어지는지 설명하지 않고, 다만 선포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외쳤고, 살아나신 예수님 안에서 죄가 용서받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고백은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억제할 수 없는 신앙의 고백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이 놀라운 고백에서 기독교는 출발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자체를 넘어 나를 구원하고 내 죄를 용서하는 사건이며, 그로 인해 나의 지난 모든 죄는 씻음 받고 하나님과 나는 화해하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이 신앙 고백이 첫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고백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나의 주님, 나의 그리스도, 살아나신 분이시며, 그의 부활이 나를 살리고 나의 죄를 용서하며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 고백의 바탕입니다.
이 고백 위에서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진정 누구신가?’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가운데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고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이 점차 성숙해 가는 과정이 신약성경에 담겨 있으며, 그 결정적인 고백이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에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마침내 이 결정적인 선언으로 무르익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순히 한 예언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마침내 보내신 그 거대한 역사의 성취임을 밝혀줍니다. 창세기 1장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문법적인 세부 사항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천지 창조 기사의 핵심 동사는 ‘창조하시니라’가 아니라 ‘말씀하시니라’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으며, 이는 그분의 주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은 단순히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을 뜻합니다. 구약의 관점에서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다름 아닌 ‘하늘 군대’였습니다.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시면, 그 하늘 군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장엄한 이미지를 통해 그분의 왕권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말씀의 주권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그분의 뜻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비밀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위격(person)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태초부터 계셨으며,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2절과 3절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증언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 또한 창조주가 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아들을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분은 만물을 유업으로 받으시기 위해 이 땅에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4절과 5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은 빛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빛이 필요 없으시지만,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기 위해, 즉 계시하시기 위해 먼저 빛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 또한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고백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창조주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알려주는 비밀은 그 빛이 단순한 계시의 빛일 뿐 아니라 생명이요 인격이라는 점입니다. 그분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우리는 그분이 누구시며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분이 주시는 참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끝이 있고 허무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참 생명은 우리에게 주어져 영원히 살게 하는 영광스러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생명의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고,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때 6절과 7절은 세례 요한을 소개하며 교회의 사명을 밝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교회의 사명은 바로 이 빛, 이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들어야 합니다. ‘듣는 교회, 가르치는 교회’가 교회의 본분입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목사는 전하고 성도는 듣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교인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하며, 또한 배운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찬양, 설교와 간증, 전도와 선행 등 모든 것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내 생각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반드시 먼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은 인간의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말이기에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엄연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늘 조심하고 겸손해야 하며, 지금 우리가 교회로서 전하는 모든 말이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건강하게 비판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오류를 겪었습니다. 좋은 뜻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결국 인간의 생각이 앞서면서 나도 모르게 잘못된 길로 빠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서방 가톨릭교회는 하나님 말씀에서 심각하게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말씀보다 전통과 권위를 앞세우고, 설교보다 성례를 강조하면서 말씀이 밀려났기에 개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지난 지금, 개신교 역시 가톨릭을 향해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개신교는 히틀러가 등장했을 때 그를 지지하는 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루터의 나라 독일에서, 과학과 철학에 대한 인간적인 자부심이 지나쳐 자유주의 신학으로 빠지면서 하나님 말씀을 뒷전으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히틀러를 하나님이 보낸 지도자라는 주장에 동조하거나 침묵으로 동의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면 교회는 언제든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전통과 배경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말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점검하고 비평하며 바로잡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하는 말들이 성경 말씀에 합당한지 늘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좁은 길이기에, 조금만 방심하면 넓은 길로 빠져버리기 쉽습니다. 늘 말씀에 비추어 치우치지 않도록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이 바로잡는 일은 누가 해야 합니까? 목사나 신학 교수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도들이, 평신도들이 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목회자와 신학자들도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에 그저 ‘아멘’으로만 화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신뢰와 순종은 기본이지만, 동시에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개교회뿐 아니라, 세상 속 모든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성경 말씀에 합당한지를 늘 점검하고 시험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교회의 잘못을 제어할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책임이 이토록 막중합니다.
이 일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하며, 성령님과 동행하십시오. 설교를 들을 때 목회자를 신뢰하고 함께 교회를 세워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말씀에 불순물이 섞이지 않았는지 늘 깨어서 점검해 주십시오. 그리고 교회가 바른길로 가도록 여러분의 힘을 모아주십시오. 어느 교회에 가시든지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모임이기에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사명을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듣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이 사명에 충성하여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 공동체로 함께 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55장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부터 55장까지는 하나님이 특별히 위로와 평화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대목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일차적인 대상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도성은 불탔으며,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먼 나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황폐해지고 낙담해 있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이제는 힘을 내고 위로를 받아 다시 믿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격려하시는 부분이 바로 이사야 40장에서 55장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그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너무나 귀한 초청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오라’고 부르시는 말씀인데,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 없이, 필요한 것 없이 그냥 오라고 하십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그런 초청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보시면 ‘오라’는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아뢰기 전에, 어떤 날은 감탄사가 먼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오, 주여!”,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부르는 행위를 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오라.” 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가 나올 때는 분위기가 좋기보다는 안 좋을 때가 많습니다. 이 말의 뜻은 ‘아이고’에 가깝습니다. ‘어쩌나, 세상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자녀들을 보시고 무언가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아이고야’ 하는 느낌이 드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백성들의 현실이 어떠한지 이사야 1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멍투성이인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두들겨 맞아서 멍들고 터지고 상처 입은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영적으로 그러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사실 잘 살고 있었고, 물질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서 괜찮아 보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는 죄악이 너무 많아서 세상으로부터, 원수 마귀로부터, 또 자기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어쩌나’ 하는 마음을 가지신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요, 자녀요, 기르시는 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보시는데 그렇게 상처투성이로 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세상에,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이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르십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우리 모두 목말라 본 경험이 있습니다. 목이 타는 듯할 때 얼마나 간절히 물을 원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실제로 물이 없어 목마른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간절하고 애타게 불러본 적이 있으십니까? 무언가 힘들 때 더욱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 “주여!” 하며 정말 간절하게 매달리듯이 기도하는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애타게, 목마른 자처럼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 사실 평소에도, 별일 없이 잘 지낼 때에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하지만, 우리는 대개 힘들 때 그러기가 쉽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어쩔 줄 모를 때 주님만 붙들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목마른 자가 되어 간절히 주님께 매달립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때로는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힘들고 어렵다고만 생각하기보다, ‘아, 이것이 하나님께 내가 목마른 자처럼 간절히 매달리라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고 주시는 기회이구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종이 되었습니다. 먼 나라에 가서 이방 민족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 50년이 지나 마침내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본향으로 돌아와도 독립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종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같은 책을 보면,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우고 성전을 짓지만 여전히 페르시아 사람들의 종노릇을 합니다. 그들은 “주여,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섬기던 이 땅, 이 복 받은 귀한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그 심정을 상상해 보면 너무나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종이 되어 나뿐만 아니라 내 자녀들도 종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메이겠습니까? 그 괴로운 마음 가운데 하나님만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약속하신 대로 이제는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 우리와 우리 조상들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지만, 이제는 이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치유하여 주시고, 다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해 주소서.” 그 간절한 기도가 이 백성들의 ‘목마른 자’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하나님이 모든 이들을 초청하십니다. 그 모든 사정을 아시고 “너희가 목마르구나, 너희가 이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구나. 나오너라, 물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이 대목에 자꾸 나오는 동사가 ‘오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돈 없는 자도 오라.” 이 세상은 돈이 없으면 환영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도, 자격이 없어도, 내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 부족하고 형편없는 한심한 사람일지라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누구나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와서 사 먹되.” 히브리 원어로 읽어보면 동사 하나하나가 굉장히 강조되는 느낌을 받는데, 이 대목이 그렇습니다. 원래 느낌은 ‘너희는 와라! 사라! 먹어라!’처럼 하나님께서 한 단어 한 단어마다 힘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와라.” 하나님께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갈 때 막지 않으십니다. ‘오지 마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와라, 누구나 와라.” 혹시라도 마음이 힘들어 오지 못할까 봐 자꾸 반복하십니다. “괜찮아, 와라. 나는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다. 비록 과거에 그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괜찮으니 와라.”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잘 가지 않으니, 하나님은 심지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오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오십니다. 그날이 바로 성탄입니다. 우리가 그날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지내고 있는데, 우리가 부족하고 무지해서 하나님께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또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간절히 찾으시는 것도 몰라서 나아가지 않으니 하나님이 그냥 짐을 싸서 우리 곁에 오시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우리 곁에 친히 오셔서 함께 계시는 것이지요.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가까이하기 원하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오라’는 그 말씀을 믿고 주님 앞에 가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환영하시고 안아주십니다. 돌아온 탕자를 안아주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안아주시고 환영해 주십니다.

“너희는 와서 사되… 먹어라.” 하나님은 “사라”고 명령하십니다. 앞서 돈 없이, 값없이 괜찮다고 하셨는데 왜 다시 사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모든 은혜와 구원은 사실 너무나 값진 것이기에 당연히 대가가 치러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며 와서 사라고 하시는 것은, 이것이 공짜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목숨 값으로 이미 그 대가가 온전히 치러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우리가 내야 할 돈까지 대신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 값은 바로 예수님의 목숨과 피와 모든 사랑입니다. 온 천하를 다 주어도 사지 못할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대신 값을 치러주셨기에, 우리는 그 값으로, 즉 예수님의 목숨 값과 그 사랑으로 지불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먹어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지으시고 첫 명령으로 주신 것이 ‘먹어라’였습니다. 모든 풀과 과일을 먹고 우리 자신이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의 생명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먹어야 하고 육신으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 매일 먹을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건강을 위해, 살기 위해 먹는 생존의 차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히 여기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 한 식사 장면이 나옵니다. 아주 나쁜 귀족 돈 조반니가 좋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을 때, 옆에서 시중드는 하인 레포렐로는 침을 흘리며 배고파합니다.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하인은 주인에게 바쳐야 할 닭고기 같은 것을 몰래 먹습니다. 주인이 그것을 눈치채고는 짓궂게 놀립니다. 입안에 음식이 가득한 하인에게 자꾸 말을 시키니, 하인은 우물쭈물하며 당황합니다.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그렇게 먹는 것은 단지 육신을 위한 것일 뿐, 자존감에 큰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먹어라’고 초청하시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살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귀한 생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 귀한 생명을 돌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또 서로 먹여주어야 합니다. 그만큼 먹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셔서 “와서 값을 치르고 사서 먹되, 너희 자신이 이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새기면서 자기 자신과 이웃을 돌보고 함께 먹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포도주는 기쁨입니다. 단지 음료일 뿐 아니라 기쁨을 상징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은 감정이기에 보통 명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은 명령할 수 있고, 속마음으로는 싫어도 억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터치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포도주와 젖을 사라”, 즉 기뻐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미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기쁩니까? 비록 몸은 종살이하고, 고단한 세상에서 삶의 짐을 지고 가느라 힘들지 몰라도, 우리 가장 깊은 곳에서는 기뻐합니다. 물론 힘든 일이 있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시편 기도가 “구원의 기쁨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처럼, 비록 이 세상에 기뻐할 일이 없어 보일지라도 다시금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지. 하나님은 누구신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지.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고, 내가 장차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갈 사람이라는 것, 나에게는 영원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 하나님과 함께 누릴 영생의 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영광에 비하면 지금 이 땅에서 조금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정말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만히 상상해보려 해도, 내가 나중에 정말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 어떤 삶일지, 어떤 존재가 될지 상상이 잘 안 됩니다. 그저 말도 못 할 만큼 기막히게 좋을 것이고, 너무 좋아서 감격한 나머지 말로 표현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밖에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을 우리는 받아서 누리는 사람입니다. 본질적으로 크리스천은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슬픈 사람들을 돌보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크게 요란하지 않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잔잔하지만 충만하게, 하나님 주시는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시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즉 빵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여기서 ‘은을 달아 준다’는 것은 저울에 은을 달아 대가를 치른다는 뜻입니다. 은은 예나 지금이나 돈입니다. 기껏 돈을 지불하고 무언가를 샀는데, 양식이 아닌 것입니다. 속은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대단해 보이고 화려하며, 사람들도 다 원하기에 귀한 은을 주고 샀는데, 막상 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유익도, 기쁨도 되지 못하는 것에 허비한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은이 너무 많아 땅의 돌과 같았다고 하지만, 그 많은 은을 다 허비하고 이제는 종으로 사는 것이 이 백성들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그럴 때가 많이 있지만, 다시금 ‘하나님, 나를 도와주셔서 분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나에게 꼭 필요한 것, 나의 생명, 나의 영과 육, 나의 모든 것을 위해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위해 나의 은을 달아주어야지, 그렇지 않고 필요 없는 것에 허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여러분, 우리는 수고를 많이 합니다. 애써서 날마다 일하고 신경을 많이 쓰는데, 그렇게 기껏 수고했는데도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니까 나도 따라서 했는데, 수고만 많이 했지 남는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 나를 도와주셔서 이 귀한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나의 생명과 이웃의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한 데에 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 바랍니다.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예전 성경에는 ‘청종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반복하시는 동사는 ‘들으라’입니다. 아까는 ‘오라’를 반복하셨고, 이제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그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받고, 무엇이 하나님 앞에 참된 길인지, 정말로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는 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예전 번역에는 ‘너희 마음’이라고 했는데, ‘나 자신’을 뜻합니다. 다음 절의 ‘영혼’과 같은 단어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님께서 주시는 귀한 양식, 그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나아와 들으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그리하면 나의 마음과 영혼이 살아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이 자기는 좋은 궁전에 살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는 텐트에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주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너는 아니고 네 아들 때에 지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다윗의 집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됩니다. 비록 다윗 왕국은 망했지만,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 영원한 왕이 되심으로 비로소 완전히 성취된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은혜’에서 ‘확실하다’는 말은 ‘아멘’입니다. 우리가 ‘아멘’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그대로 되소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멘’ 하시면 얼마나 확실하겠습니까? 그 확실한 은혜는 다윗에게 허락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님, 다윗의 자손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원문의 뜻에 가깝게 번역하면, “주님께서 찾아지실 때에 찾아라”입니다. 우리가 찾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지신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늘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부르거나 가까이 가려면, 짐승 희생 제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가야 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이 쳐들어와 성전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부르고 싶어도 그것이 늘 허락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언약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는 말씀처럼, 지금은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지십니다. 숨으려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어디 계세요?” 하고 찾으면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영원히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주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늘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고, 성령님이 아예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응답하여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나의 죄나 죄책감을 주님 앞에 회개하고 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부르면 주님은 응답하시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은 벌써 거기에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하신 귀한 초청의 말씀과 그 은혜,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가능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생각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말씀에도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다 어렵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게 하는 일들이 바깥에 있을지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입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나의 힘이 되시면, 주위에서 나를 괴롭히던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될 것입니다. 겉으로만 큰소리쳤지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면 다 도망갈 것들이 괜히 우리에게 겁만 주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나의 생각이 주님 앞에 똑바로 서 있으면,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서지 못하리라”는 이사야의 말씀처럼, 믿지 않으면 우리는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이 나를 뜨겁게 사랑하시고 늘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이 세상에 환난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더 강하시고 능력이 많으시며, 전능하신 분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셔서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니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자비롭게 여기십니다.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그분과 멀리 느껴졌더라도,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있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낙담하지 말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누구나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아시기에 주님은 더욱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청종하면, 귀를 기울여 듣고 또 들으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시는 이 귀한 초청의 말씀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에는 올라프라는 특별한 눈사람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엘사는 눈과 얼음을 다루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는데, 어릴 적 여동생 안나와 놀며 눈사람을 만들어 줍니다. 동생 안나는 그 눈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사랑을 표현합니다. 훗날 성인이 된 엘사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기로 결심하며 가장 먼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그 눈사람, 올라프를 다시 만들어냅니다. 올라프는 사람처럼 말하고 춤추는 신기한 존재이지만,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의 본질과 모순되는 것을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차가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여름과 햇볕을 무엇보다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 동생 안나가 자신을 안아주었던 그 따뜻한 사랑의 기억 때문입니다. 그는 "안아주는 게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며 따뜻함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눈과 얼음이기에,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따뜻함은 곧 그의 존재를 녹여 없애버릴 것입니다. 이처럼 올라프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거대한 모순 가운데 놓여 혼란과 어려움을 겪는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올라프처럼, 자신의 존재가 깊은 모순에 빠져 고통을 외치는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49장 14절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 시온의 절망적인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셨다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이 고백은 그 자체로 깊은 모순을 담고 있습니다. '시온'은 단순히 예루살렘이라는 지리적 도시를 넘어,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당신의 백성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며 그의 왕위와 도성이 영원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딸 시온아'라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신실한 약속이 이미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히 선하시기에 당신의 언약을 결코 잊거나 버리실 수 없습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시온의 현실은 달랐습니다. 적들에게 도시가 파괴되고, 성전은 불탔으며,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50년 이상이 지났습니다. 바벨론에서 2세, 3세가 태어나는 절망적인 세월 속에서,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의 '머리'와 '가슴' 사이의 갈등과 같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알지만, 가슴으로는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은 의인이었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나를 잊으셨는가"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지만,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의 외침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깊은 절망감 속에서 버림받았다고 외치는 당신의 자녀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절망적인 외침에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며 직접 답하십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가장 본능적이고 강력한 사랑의 비유를 드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마치 어머니처럼, 당신의 태에서 낳고 젖 먹여 기른 자식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에서 '긍휼'이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태(모태)'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이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배 아파하고 온몸을 쏟아붓는 것과 같은 깊고 본능적인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설령 세상의 어머니가 혹시라도 자식을 잊는 일이 있을지라도, 당신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어떤 약속보다 더 강력하고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손바닥'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복수형으로, 당신의 양손 모두에 우리를 새기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펜으로 이름을 쓰는 행위가 아닙니다. '새기다'는 것은 정과 망치로 돌에 글자를 파내듯, 고통을 동반하여 영원히 그 상처와 자국이 남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손에 우리의 이름을 새기심으로써, 당신께서 손을 사용하여 어떤 일을 하시든지, 세상을 향해 어떤 역사를 펼치시든지 간에 항상 우리를 보고 기억하실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육체적인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우리가 영원히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선언입니다.
성경, 특히 구약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신체 부위를 통해 묘사하는 표현(신인동형론)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눈'과 '귀'는 모든 것을 보고 들으심을, '팔'은 그분의 능력을, '코'는 그분의 진노를, 그리고 '손가락'은 창조의 섬세한 솜씨를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의 '손바닥' 역시 그러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살면서, 그곳의 수많은 우상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번역가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타르굼)로 번역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눈, 코, 입이 있는 물질적인 우상처럼 오해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꾸는 등 신인동형론적 표현을 수정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진실을 동시에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며 우리는 그분을 인간적인 한계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무한히 높으시며,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예를 들어, 이미 결과가 나온 면접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는 우리의 기도가 이미 그분의 영원한 계획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시간 속에서 할 바를 다할 뿐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손바닥'과 같은 인간적인 표현을 사용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문맥 안에서는 그 단어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가장 정확하고 강력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람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경계하면서도, 성경이 선택한 이 표현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바닥에 우리를 새기셨다는 이사야의 예언은 궁극적으로 한 분을 통해 성취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그 영원한 상처와 자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박힌 못 자국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 못 자국 난 손을 보여주시며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영원하신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그 못 자국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흔적입니다. 우리가 훗날 주님을 뵈올 때, 그 손과 발의 못 자국을 통해 우리를 향한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을 알아볼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그분의 몸에 직접 새겨진 영원한 증거입니다.
이사야 49장 6절은 이 사랑이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훗날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며, 이방인을 향한 자신의 사역이 이 예언의 성취임을 밝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언약 백성을 넘어 온 세상, 땅 끝에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구원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손바닥에 새겨진 사랑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삶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거나 잊으셨다고 느껴질 때, 우리를 당신의 양손에 새기신 그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사, 그 몸에 영원한 사랑의 증거인 못 자국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확고한 사랑 안에서 참된 위로와 평안을 얻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과 감사로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께 속함 (이사야 43:1-7)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크리스마스로부터 4주 전 주일부터 대림절이 되며, 교회력으로는 새해입니다. 원래 달력보다 한 달 앞서서 12월에 교회력은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실상 주님 안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날이며, 주님을 기다리는 귀한 절기입니다. 대림절, 또는 대강절이라고도 하는 이 시기는 주님의 오심, 즉 ‘어드벤트(Advent)’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의 친구가 되기 위해 아기 예수로 오시는 그날을 기다리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성탄절 하면 들뜨고 선물과 트리, 캐럴과 즐거운 분위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신앙의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대림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날에 우리는 진정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구약의 성도들, 특히 이사야서에서 이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그야말로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주님만이 이 세상에 공의와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세상을 치유하시며, 세상의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구약의 성도들만큼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지금 새벽 예배에 줌으로 참석하시는 분들은 계속 한 장씩 읽고 있는데, 40장부터 분위기가 바뀝니다. 39장까지는 주전 8세기에 유다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백성들에게 주는 경고와 고난, 심판과 같은 무거운 말씀들이 많이 있다면, 40장부터는 분위기가 바뀌어 위로하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살면서 ‘나에게 좀 위로가 필요하다, 힘들다’고 느껴질 때 이사야 40장부터 읽으시면 참 좋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오늘 말씀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멸망합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와 도시는 멸망하고 성전은 불탔으며 많은 사람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갑니다. 남의 나라 땅, 천 마일 이상 떨어진 먼 곳으로 강제 이주되어 낯설고 물선 이방 땅에서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세월이 50년 넘게 지났습니다. 만약 어린 나이에 포로로 끌려갔다면 종살이로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 인생의 한과 마음의 괴로움이 어떠할지 우리가 상상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일평생을 그렇게 포로로 살다가 이제는 하나님께서 돌려보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는 자유를 얻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 조상들이 주님을 섬겼던 그 정다운 나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약속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제는 때가 되었다, 너희에게 자비와 용서와 회복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런 자비와 사랑으로 오시는 그날을 백성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을까요? 대강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그와 같은 치유와 용서와 회복, 그리고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 주시기 위해, 말씀하실 뿐 아니라 그 증거로 심지어 어린 아기 예수님이라는 그 놀라운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 주시기로 약속하신 날입니다. 우리들은 그날을 기다리며 고대하고 감사하며 마음에 준비를 하는 복된 대림절을 지금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1절의 말씀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원래 “지금”이 첫 단어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왜 ‘이제는’ 말씀하신다고 할까요? 그때가 어떤 때인지는 바로 앞 42장 끝 부분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포로로 사로잡히고 외적인 바벨론이 쳐들어와 도시가 파괴되고 멸망하는 그런 때를 바로 앞에서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42장 끝에 나오는 ‘약탈되었다’는 대목이 강조됩니다. 적들이 쳐들어와서 도시를 다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전쟁을 하면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군사들이 성을 포위하다가 함락하면 그 안으로 다 쳐들어가, 드러내 놓고 공식적으로 적군의 병사들이 집집마다 쳐들어가서 다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약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마음이 무너지겠습니까. 평생을 모으고 열심히 일해서 쌓아온 삶의 터전과 가정을, 가정의 기반과 이 모든 것들을 적들이 쳐들어와서 다 쓸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인간이 참 악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문명 사회에서 이렇게 잘 살고 있지만, 원래 인간에게 그런 보호 장치가 없다면 우리들 본성에는 그런 무자비함이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와 같이 파괴되고 죽임당하고 특별히 약탈을 당하는 그런 일을 우리가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 고백이 바로 앞장에 있습니다. 이때 ‘지금’이라는 말은 바로 그때에 ‘이제는 말씀하시느니라’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고난과 서러움을 당하는 백성들을 주님께서는 일단 놓아두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의 죄가 속함을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잠시 자기 백성이 눈물 흘리는 것을 아픈 마음으로 참고 보시다가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이는 창세기를 생각하게 하는 단어들입니다. ‘창조하신 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의 첫 대목입니다. 또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 이 단어는 하나님이 아담을 땅의 흙으로 지으셨다는 그 단어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 정성스러운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흙으로 사람을 친히 지으셨다는 그 단어입니다. 창세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1장을 주로 언제 읽습니까? 새해에 성경 한번 처음부터 읽어 보자 할 때 처음에 읽는 것이 창세기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성도님들은 특별히 창세기로 돌아갈 때가 이와 같이 고난의 때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서러울 때,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하거나 버림받을 때, 신앙의 위기가 닥쳐 ‘내가 왜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가 어떻기에 나의 삶에 이런 위기가 닥치는가, 주님께서 나를 과연 돌보시는가’ 하는 힘들고 괴로울 때에 창세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과 생물들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그분을 믿는 사람이지.’ 그렇게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서 나를 힘들게 하던 주위 환경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주님은 누구십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주님은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창세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이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백성들에게 위로의 말씀으로 주십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구속’이라는 단어는 구원하시는데 값을 주고 구원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말씀으로 “너를 구원하라”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는 그냥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값을 치르십니다. 실제로 우리들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친히 값을 치르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아무것이나 가져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값비싼,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값을 치르십니다. 그 아들을 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그 귀한 아들을 먼 나라로 보내시는 겁니다. 하늘나라와 이 땅의 거리는 무한합니다. 자녀가 먼 나라로 간다고 할 때, 유학생 부모가 자녀를 먼 나라로 유학을 보낼 때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 준비를 다 해서 잘 보내도 마음이 힘들 텐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아주 어린 아기, 그저 세게 쥐면 부서질 것 같은 아주 약한 육체로 이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큰 희생을 하시면서 자기 아들을 보내십니다. 그 값을 치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그 값을, 우리의 몸값을 주고 우리를 구속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우리의 이름을 부르심인데, 이 본문에서는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렇게 이름을 부르십니다. 유대인, 유다 나라이지만, 사실 ‘유대인’이라는 말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자신을, 특별히 정치적인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백성으로서 말씀에 근거해서 부르는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떼를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은 백성을 말합니다. 그 옛 조상의 원래 이름은 야곱입니다. 야곱이었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어머니 리브가의 쌍둥이 형 에서가 먼저 나가니 동생 야곱이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뭔가 부족하고 간절하며 원하는 것이 많지만 뜻대로 안 되는 인생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분이 참 험하고 기구한 인생을 살지 않습니까? 우리가 창세기를 읽으면 그 이야기가 다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이름인데, 원래 너는 야곱이었다고 하나님이 다시금 상기시켜 주십니다.

본래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많은 복을 받아 주님 안에서 하루하루 살고 있지만, 신앙의 위기가 닥칠 때, 삶에 고난이 있을 때, 또는 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겠다는 간절한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원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처럼, 태어나기도 전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돌아가셔도 좋고, 아니면 내가 신앙을 처음 가졌을 때가 기억나신다면 영적으로는 그때가 갓난아기입니다. 저는 그 기억이 납니다. 혹 나중에 믿었거나 아주 어려서 믿어서 기억이 안 나시더라도,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가, 이런 갓난아기와 같이 아무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지금까지 있게 하셨다는 사실을,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이와 같이 인도하신 하나님, 그분의 귀한 뜻 가운데 내가 있으니 나의 앞날도 그분께 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내가 눈으로 보지 못하여도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 믿음의 길은 그런 것입니다. 앞날이 레드 카펫 깔린 길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하루하루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주님을 늘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면서 살라고 주님은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우리들이 날마다 느끼고, 나는 야곱과 같이, 이스라엘과 같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나 주님께서 이날까지 인도하셨다는 고백이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는 내 것이라.” 주님의 소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의 소유, 그분의 것이 된 우리 자신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주님 자신의 것으로서 보중하게 여기시고 지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주님의 소유로 되어 있으면 두려울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분은 신실하시고 변치 않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믿음으로 우리들은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우리들은 일어설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그냥 내 힘만, 내 육신만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지식, 내 경험 믿고 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내가 주님의 소유,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날마다 새길 때에 오직 주님의 힘, 주님의 능력 가운데에서 날마다 인도함 받는 자녀의 삶을 살게 되는 줄을 믿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또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주의 백성들이 지금 큰 물 가운데로, 또는 불 가운데로 지나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포로기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먼 길을 떠나가야 하는데,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가기 때문에 실제로 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본문에는 이 물을 하나님이 마르게 하셔서 마른 땅을 내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험한 길, 산 넘고 물 건너가는 이 길을 하나님께서는 평탄하고 어려움이 없도록 해 주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물 가운데에서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출애굽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주의 백성들을 위해 좌우로 물이 벽이 되어 하나님께서 물에 침몰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는 그 대목을 생각나게 합니다. 불 가운데로 지난다는 것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전쟁이 나면 그런 불 가운데 처할 수 있지만, 포로에서 돌아오는 백성들에게는 그보다는 마치 다니엘 3장에서 다니엘의 친구들이 불 가운데에서도 주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불 속에서도 그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순수한 믿음을 지켜냅니다. 그 대목을 보면 물 가운데를 지나고 불 속을 믿음으로 지날 때에 조금도 해를 입지 않고 하나님이 지켜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가야 합니다. 만약 이 포로로 잡힌 백성들이 가만히 있으면 잠시는 편하겠지요. 물과 불을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저앉아 있으면 아무런 미래나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가야 합니다. 순례길, 우리들의 천성 본향을 향해서 가는 순례길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고, “아, 여기가 너무 좋습니다. 그냥 여기서 영원히 살 거예요”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들은 나그네로서 계속 길을 갑니다. 순례의 길, 믿음의 길, 주님께서 새롭게 인도하시는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고, 또 그렇게 새롭게 보여 주시는 곳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순례의 길을 갑니다. 그것이 겉보기에는 큰 무서운 물도 있고 불도 있고 별것이 다 있어 보이지만,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 두렵고 빠져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인생의 환난과 고난과 서러움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축복이고 주님이 함께하시는 길이며, 그 속에서 주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들은 그것을 기뻐합니다. “이게 무슨 물과 불이야, 이게 웬일이야, 왜 이렇게 힘들어” 하고 반응할 것이 아니라, 이런 힘든 고난 가운데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니 주의 성도들은 더욱더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갑니다. 어떤 순례길이라도 주님 안에서 날마다 행하는 우리가 될 줄을 믿습니다.

3절 말씀에,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주님의 이름을 쭉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 우리에게 주신 귀한 이름은 여호와, 구원자이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 또는 구속자이시며, savior 되시고 redeemer 되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여기에 굉장히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백성들을 이제 값을 치르고 구속하여 내시는데, 아주 특별하게 이 3절에서는 주님께서 속량물로 애굽과 구스와 스바, 아프리카에 있는 다른 나라들을 값으로 주고 주의 백성들을 구해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신기하고, 사실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뭐야, 하나님이 그럼 이스라엘만 편애하시네? 애굽이나 다른 나라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그냥 값으로 내주고 이스라엘만 구원하시니 완전히 편애하시네.’ 그런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또 애굽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게 뭐야, 우리들은 뭐야,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네’ 하면서 하나님을 안 믿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로 어떤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바벨론으로 붙잡혀 갔던 주의 백성들이 해방되어 돌아올 때가 페르시아 시대가 되는데,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주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고 페르시아가 제국이 됩니다. 실제로 페르시아가 아프리카까지 점령하여,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 왕 때 이집트를 정벌해서 엄청나게 큰 제국을 이룹니다. 이란 지역뿐 아니라 이집트까지 장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애굽과 구스와 같은 아프리카의 나라들이 페르시아에게 속하게 된 것을 가리키는 말씀도 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주의 백성들이 이 세상 여러 나라들로부터 당했던 서러움과 괴로움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나라들 사이의 전쟁, 나라들 사이의 정의, 누가 나라들 사이에 판결하겠는가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라의 왕들이 서로 잘났다고, 내가 더 강하다고 전쟁을 하면 그 왕들을 통제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서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시고 어떤 나라는 세우시고 다른 나라는 무너뜨리시는, 세상의 참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여러 악한 나라들이 쳐들어오고 말도 안 되게 괴롭히는데, 그것을 주님은 다 보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뉴스나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결국 그 잘난 강한 나라들이 서로 이웃 나라들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전쟁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눈여겨보신다는 뜻입니다.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나라들이나 왕들, 지배자들은 나의 권력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님께서 지금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보시니,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세상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얻어맞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와 애굽 같은 나라들 사이에서 작은 나라로서 하나님 백성들이 고난받고 있는 것을 보시고, 때가 되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 앞에 다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구약의 메시지입니다.

신약에서는 이것이 완전히 바뀝니다. 신약에 이르러 주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과 나라가 더 이상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이 오직 주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 구원받고 구속받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지요. 결국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값으로, 이 속량물로 내어주게 될 그것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그 속량물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때 구약 시대에는 애굽과 구수와 스바와 같은 나라들이 속량물로 내어졌지만 그것은 구약 시대의 일이고, 지금은 심지어 그 나라들조차도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그 나라들을 위해서 내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과 구스와 스바, 이 나라들을 위해서도 그들 대신해서 속량물이 되어 주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아기 예수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더 이상 세상의 나라들을 섬기지 않습니다. 나라들에 속해 있을지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시고 세상 나라들의 모든 악한 행실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그분을 바라보면서, 속량물 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우리가 주님 앞에 보배롭습니다. 그리고 존귀합니다. 꿀같이 단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은 계속 외시면 좋습니다. 좋은 말씀은 외는 것입니다. 찬양 가사로 외워도 되고, 힘들 때마다 이 말씀을 되뇌시기 바랍니다. ‘보배롭다’는 것은 보석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값이 대단하다는 ‘precious’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들은 귀하고 값비싼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서 존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존귀하다고 여기시면 아무도 우리들을 함부로 여기지 못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우리들은 주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하며 주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우리를 몰라줄지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주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대접해 줘’ 하고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보배로운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자기가 보배롭고 존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무시당해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보배롭고 존귀하며,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기 예수로 가난하게 오셔서 사람들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예수님은 전혀 그것을 슬퍼하지 않으십니다. 존귀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보배로우신 분이시며, 주님은 도리어 그분의 존귀하심을 세상에 드러내시고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해도 전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왜 나한테 이것밖에 안 해줘?” 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높여줍니다. ‘내가 그렇게 귀한 자이고,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형제자매들을 나도 섬기고 높여줄 수 있어.’ 심지어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은 저 사람도 귀하게 여기실 거야’ 하면서 그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한 사람은 이 세상의 법도나 가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귀한 자로서 세상에 주님의 영광을, 그리고 주님의 겸손하지만 존귀하신 그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5절과 6절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대로 아들들과 딸들, 주의 모든 백성들을 동서남북에서 모두 불러 모아 주실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것은 주님의 새로운 약속입니다. 주의 모든 백성들을 주님 오실 때 땅끝에서부터 불러 주십니다.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창세 전부터 택하셨고, 우리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표현처럼, 우리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은 창세로부터 있습니다. 주님의 예정, 주님의 선택, 주님의 확실한 뜻이 있기 때문에 한 사람도 거기서 빠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택한 자녀들을 남김없이 모두 땅끝에서부터 모으실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그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 주님을 믿고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7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창조’라는 말씀이 또 나오고, “내가 그를 지었고 내가 그를 만들었느니라.” 창세기의 말씀이 또 나옵니다. 수미상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것저것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주님의 영광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 업적을 이루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을 믿는 것, 내가 주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 이것이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서, 때로는 그저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감으로써 영광을 드립니다. 특별히 어려움이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은 포기하고 걱정하고 불평하겠지만, 그 상황에서도 감사할 때, 도저히 찬양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도 찬양이 나오고 감사가 나올 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은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 하고 말할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귀합니다. 단 하루도 우리는 낭비할 수 없습니다. 그냥 의미 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루하루를 보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잘 써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 허락하시는 때까지, 오늘 하루라도, 이 한 시간이라도 내가 주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단한 것을 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주님을 믿고 감사하고 주님께 찬양을 올릴 때, 그 찬양을 주님께서 받아 주실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관계 맺었다는 것,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 귀한 선물을 받았고, 이것의 증거가 되기 위해 아기 예수로 오시는 우리 예수님을 기대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복된 대림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과 복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복된 날을 보냅니다. "선물은 감사하기 전까지는 선물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은총은 우리가 감사로 응답할 때 비로소 진정한 우리의 것이 됩니다. '은혜(grace)'와 '감사(gratitude)'라는 두 개념은 언어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 첫머리에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 뒤, 곧이어 "내가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일관된 패턴을 보입니다. 유일한 예외는 그를 몹시 속상하게 했던 갈라디아서이지만, 이 패턴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당연하고 마땅한 응답이 감사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은혜'와 '감사'의 어원적 유사성은 두 개념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스페인어로 "감사합니다"는 '그라시아스(Gracias)'이며, 이는 영어 단어 '그레이스(Grace)', 즉 은혜와 매우 흡사합니다. 헬라어에서도 이 관계는 명확히 나타납니다.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charis)'와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토(eucharisto)'는 거의 같은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처럼 언어 속에 각인된 연결성은, 은혜와 감사가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우리는 마땅히 감사로 화답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영적 소통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관계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과연 무엇인지 그 본질을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는 것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은혜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물건'이나 대상이 아닙니다. 은혜의 본질은 하나님 그분 자신이 친히 선물이 되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정의하는 방식이며, 우리가 받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시편 67편 1절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은혜를 베푸사"라는 표현은 영어로 'give me grace'가 아니라 'be gracious to us'에 가깝습니다. 즉, 어떤 물질적인 은혜를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은혜로운 분이 되셔서 우리를 대해 주십시오"라는 관계적 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운 분으로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의 핵심입니다.

은혜는 그 가치를 매길 수 없기에 값없이 주어집니다. 이 역설은 은혜의 가장 심오한 진리 중 하나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자기 자신을 내어주심에 값을 매길 수 있다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값을 치를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존귀하여 값을 매기는 행위 자체가 무례가 될 정도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아예 값없이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고, 그 값을 치르기 위해 한 일도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우리에게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 그분 자신을 선물로 주시니, 우리는 그저 감격하며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하실 때 우리의 죄나 실수를 기억하며 대하지 않으시고 '은혜롭게' 기억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옮기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과거에 실수했던 것, 실패했던 것에 얽매여 스스로를 비판하고 자책합니다. 나 자신도 자신에게 은혜롭지 않은 그런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대하시듯, 우리 또한 그분을 따라 우리 자신을 은혜롭게 돌아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온전히 선물로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분의 얼굴 빛을 비추시는 구체적인 행위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합당한 응답은 그분을 '송축(blessing)'하고 그분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blessing)'과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blessing)'은 본래 같은 단어에서 비롯된 상호적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의 핵심이 바로 이 아름다운 상호작용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지음 받았으며, 그분과 기쁨을 나누는 존재입니다.

'블레싱(blessing)'의 본래 의미는 '좋은 말(benediction)'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쌍방향으로 일어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수많은 좋은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를 믿는다", "너와 함께한다"와 같은 약속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블레싱입니다. 이에 응답하여, 우리 또한 하나님께 좋은 말을 드리는 것이 바로 그분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선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행하신 일들이 참으로 귀합니다"와 같이 우리의 생각과 입술로 하나님에 대해 좋은 말을 고백하는 습관은 우리 삶에 가장 큰 힘이 됩니다.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인격적인 교제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은 무한합니다. 우리가 땅에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를 보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그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십니다. 소설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추운 겨울밤, 어린 코제트는 무거운 물동이를 들고 힘겹게 걸어가다 자기도 모르게 "오, 하나님..." 하고 신음합니다. 그 순간, 물동이가 가벼워집니다. 거구의 장발장이 말없이 들어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찾아온 아이가 코제트임을 알고는, 그 큰 몸을 한없이 낮추어 어린 소녀와 눈을 맞춥니다. 이처럼 무한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눈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셔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무엇이관대 그분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해처럼 강렬하여 우리가 그대로 마주하면 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친히 그 영광을 가리시고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이는 마치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서 없어지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불꽃이 우리에게 임하지만, 그분의 자비로운 손길이 우리를 감싸 보호하기에 우리는 안전합니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그분의 따뜻한 품 안에서 우리는 온전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은혜를 베푸사"라는 말의 어원은 본래 '어머니의 모태'를 의미합니다. 모태 속의 아기가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의존하여 보호받고 양분을 공급받듯,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처럼 완전한 보호와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 빛은 단지 교제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의 여정을 이끄는 등불이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어두운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비추는 인도자가 됩니다. 인생의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올바른 길을 찾고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은 건강한 '자존감'을 세웁니다. 이때의 자존감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이나 세상적인 교만과는 구별됩니다. 이는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하며 과거에 실패한 경험이 있을지라도, 스스로를 자책하는 대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자신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고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은, 우리가 삶의 모든 선택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책임감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모든 길을 한 번에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한 걸음씩 인도하셨듯이, 우리 또한 그날그날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근시안적이어서 눈앞의 일밖에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방향과 우리의 방향이 일치한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그 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하나님은 때로 초자연적인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이성, 그리고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젖을 먹여야 하는 어린아이로 대하지 않으시고, 책임감 있는 존재로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평소에 영적인 근육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도 연습 없이는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없듯이, 우리도 훈련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내가 원하는 것만 말하는 대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듣는 훈련, 힘들 때 부를 수 있는 나만의 찬송 목록을 쌓아가는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자꾸 맞추어 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순간에 책임감 있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숙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모든 은혜와 구원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지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논의된 하나님의 모든 은혜—우리를 향한 자기 내어주심, 복 주심, 얼굴 빛 비추심, 그리고 인도하심—는 궁극적으로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예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문제인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은, 우리의 어떠한 죄와 허물, 부족함도 압도하고 남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죄가 크다고 느낄수록, 그 죄를 덮고도 남는 더 큰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한 추기경님이 설교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한 유대인 소년이 친구들과 장난삼아 성당의 신부님을 찾아가 거짓 죄를 고백했습니다. 장난임을 알아챈 신부님은 소년에게 십자가상 앞으로 가서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죠? 그래서 어쩌라고요?"라고 세 번 말하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소년은 재미있어하며 십자가를 향해 첫 번째 외쳤습니다. 두 번째도 외쳤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말을 하려던 순간,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며 자기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 설교를 하던 추기경님은 "그 아이가 바로 저였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들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합당한 응답은 오직 감사와 찬양뿐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며 다 함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시다.

제가 미국 영화관에서 제일 처음 봤던 영화가 뭐였냐면, 제 연식이 드러나서 좀 그렇지만, 터미네이터 2였습니다. 아시는지요? CG가 부드럽게 나온 최초의 영화입니다. 그 영화의 인물 구도를 보면, 한 세상을 구할 아이가 있고 그 아이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 전사가 나오지요. 그리고 그들을 해치려는 적이 있습니다. 그 구도가 오늘 요한계시록 12장과 똑같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실 아이, 그리고 그의 어머니, 그들을 위해 싸우는 대천사 미카엘, 그리고 그들을 해치려는 용. 요한계시록은 여러 가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고 사람들의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이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자세히 살펴볼 때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12장에 있는 하늘에서 보인 큰 이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A great and wondrous sign, 크고 놀라운 표적이 보였습니다. 하늘에서 보인 광경이 뭐냐면, 어떤 여자가 있는데 그 옷이 해입니다. 해를 옷으로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빛나는 그런 영광으로 옷 입은 여인이지요.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습니다. 여기에서 ‘관’이라는 단어는 면류관입니다. ‘의의 면류관을 내게 예비하셨다’는 말씀을 할 때처럼, 또는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고 할 때 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인내하는 자,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이 광경으로 생각하게 되는 말씀은 요셉의 꿈입니다. 요셉이 꿈을 꿨는데 해와 달이 있고 열두 별이 있었습니다. 절을 하는데, 그것으로 봤을 때 이 여인이 나타내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과연 누구인가, 정말 이렇게 영광스러운 옷과 또 관을 쓰고 해와 달로 입은 이런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 것인가 하면, 사실 구약 성경을 볼 때 답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신부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랑이 되시고 그의 백성은 그의 신부, 존귀한 신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신부를 부르시는 이름이 이사야 62장에 나옵니다. ‘헵시바’, ‘그녀는 나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My delight is in her. 그녀는 나의 기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부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그 심정을 알 수 있는 이름입니다. 또 다른 이름은 ‘쁄라’, 문자 그대로 ‘임자 있음’입니다. 임자 있는 여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늘 그와 함께하십니다. 절대로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또 세상에서 어려움 당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늘 함께 계시고 보호하시고 늘 곁에 계시는 하나님. 그 주님께서 백성을 그만큼 사랑하시는 그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백성 되는 이 여인이 오늘 하늘에 나타난 이 표적에서 이렇게 놀라운 영광으로 그리고 존귀한 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절 보시겠습니다.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주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을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원래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서 주님과 언약 관계가 되고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주의 율법을 받고 그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약속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고, 적이 쳐들어와서 나라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성은 불타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계속 다른 민족에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난이 늘 있는 것입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하나님 백성 안 하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 백성이 되어서 주님의 율법의 말씀을 받았는데 그걸 지키지 못한 것으로 더 고난당했으니까, 차라리 그러지 말걸, 다른 보통 민족들처럼 그렇게 살 걸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먼저 징계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심판과 그분의 공의를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먼저 행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세상 모든 나라들에게 하시는 것이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아서 고난당한 것은 그들이 특별히 다른 민족보다 더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민족이 하나님께 선택받았을지라도 다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죄성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 수많은 백성들 중에서 대표로 선택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대로는 인간의 죄 본성 때문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징계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애를 쓰며 부르짖는 것은 결국은 메시아를 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을 구원하실 아이, 하나님의 아들, 이 세상에 인자로 오시는 그분, 그리스도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함입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기 위해서 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함께 고난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실은 고마워해야 할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받고 그 가운데서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결코 하나님을 버리지 말자,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주의 구원과 소망의 말씀을 계속 전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신약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 예언에서 앞으로 메시아가 오실 것을 계속 예언하고 약속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그 많은 고난을 당한 것은 결코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하도록,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하기 위한 통로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받은 것입니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표적이 이 하늘에서, 이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 해산하기 위해서 고난당하는 그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짐승.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그 예언의 연장선상이 되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세상의 여러 나라들이 짐승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사자와 곰과 표범과, 네 번째 짐승은 이름도 알 수 없는 괴상한 괴물이 나타나서 온 세상을 다 파괴합니다. 그 예언의 연장선상에서 오늘의 이 짐승은 용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큰 붉은 용. 그런데 괴물이죠. 머리가 일곱입니다. 뿔이 열입니다. 그 일곱 머리 열 뿔, 이것은 왕들을 가리킨다고 다니엘서에 되어 있습니다. 왕들. 그런데 세상 권세를 가지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이웃 나라들을 파괴하는 그런 악한 왕들이 이 용의 머리와 뿔로 표상되어 있습니다.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다. 이것은 이 왕관은 아까 그 여인이 머리에 쓴 면류관과 다른 단어입니다. 이것은 디아뎀, 문자 그대로 왕관, 왕이나 여왕이 쓰는 그런 화려한 왕관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이 용은 왕 노릇 하겠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 왕 노릇은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세로, 하나님의 자비로 다스리는 참된 왕권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마귀적인, 세상을 파괴하고 지배하려는 그런 왕권을 자기가 그냥 빼앗아서 쓴 것입니다. 그런 세상적인 악한 왕권을 나타내는 말씀이 이렇게 있습니다.
4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굉장히 신비로운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석을 확실하게 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이 마귀와 함께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마귀와 그의 천사들은 자기의 처소를 지키지 않았다, 교만하였다는 그런 말씀이 있거든요. 천사들이 어떻게 타락해서 마귀와 또 악마들이 되느냐, 이것은 성경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아요. 우리가 자세히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호기심이 생길 수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성도로서 사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것에 대해서 성경이 다 자세히 알려 주실 필요는 없지요. 힌트만 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천사들, 삼분의 일이라면 상당한 숫자인데, 그 천사들이 땅에 떨어질 만큼의 그런 죄가 무엇이었냐, 교만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처소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직분을 감사하고 그대로 섬기면서 헌신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 천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타락했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땅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바로 예수님이지요. 이 아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로 예수님, 아기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시는 분인데,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지요.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그래서 아버지와 영광과 권세를 함께 가지시는 그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연약한 아기로. 그것은 그분이 더 이상 이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은 여전히 영원히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분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온전한 권세와 영광을 가지십니다. 그 신성을 그대로 가지신 채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신 것이거든요. 그러니 인간의 육신으로, 또 가장 연약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 인간이 되시려고, 저와 여러분을 참으로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곁에 참으로 계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으로 또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그만큼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신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천사들이 보호하고 하나님께서 늘 함께 계시지만, 그 육신으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땅의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약해지신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인데, 전능하시다는 것은 무조건 다 할 수 있다, 뭐든지 다 강하고 이기기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전능하신가 하면, 심지어 자기 자신의 전능하심을 제한하실 수 있을 만큼 전능하십니다. 무조건 강해서 다 때려 부수시는 것, 그것만이 아니고요. 그 하나님의 힘마저, 그 권세와 영광마저 제한하셔서 스스로 연약한 아기가 될 수 있는 그만큼 하나님은 전능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기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분의 가장 놀랍고 큰 영광, 우리가 영원히 찬송해서 마땅한 그분의 참된 영광이 가장 오롯이 드러나는 것이 예수님이 누이신 구유입니다.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말구유에 뉘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그 모습에, 그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그 말 먹이는 구유에 누이셨다 했을 때 너무 불쌍하다, 안 됐다는 그런 느낌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아기를 말구유에 뉘인 것이 목자들에게 표적이 됩니다.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가서 경배하라. 그러는데 그 아기를 어떻게 찾겠습니까? 아기들이 많을 텐데. 그 아기를 찾는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어떤 아이가 말구유에 놓여 있으면 그런 아이는 더 없거든요. 어느 부모가 자기 갓난아이를 말구유에 뉘인단 말입니까?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러니 만약에 그 아이를 본다면 바로 그 아이가 너희의 구주라는 것을 아는 표적이다, 그 말씀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가장 낮고 천한 곳에 연약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 그래서 이 세상의 온갖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시는 그분이 우리의, 저와 여러분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런 용은 그 해산하려는 아기 앞에서 막 노리고 있는 것이죠. 실제로 그런 위협이 있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헤롯 왕이 사람들을 보내서 아기를 다 죽이려고 하죠. 두 살 이하는 다 죽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꿈에서 지시해서 예수님과 그 부모님은 이집트로 피하게 되지요.
5절의 말씀 보시겠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이 아이는 철장으로, 철로 된 막대기, 즉 iron scepter입니다. 왕의 권세를 나타내는 그 막대기 있지 않습니까? 철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권세로, 힘으로 다스릴 그런 아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왕들처럼 권력으로, 무력으로 다스리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권세, 예수님의 능력은 그분의 사랑, 그분의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건드립니다. 세상의 왕들은 그냥 칼과 창으로 우리들의 목숨을 위협하죠. 그러니 우리들이 살고 싶어서 복종합니다. 우리들의 육신은 살려 주지만 우리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해요. 마음으로는 그 왕을 싫어할 수 있어요. 몸만 따르는 척하는 거죠.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왕 되시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우리들의 영혼을 건드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스스로 주님께 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분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 나를 위해서 나 대신 십자가 지시는 그분의 사랑을 내가 보면서 내 스스로 감격해서 그분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여기에 의무감으로 나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마 스스로 원해서 나오셨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걸 생각하면 내가 그분 앞에 내 마음 드리지 않을 수 없어서. 내 마음을 건드리시는 주님의 그 권세, 참된 왕권, 그 사랑에 우리가 움직여서 이렇게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실 아기입니다. 그 아기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여기에서 ‘올려가더라’는 것은 snatch, 즉 낚아챘다는 뜻입니다. 굉장히 강한 단어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 오시면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늘로 들림 받지 않습니까? 그 단어거든요. 낚아채는 것은 굉장히 강한 단어입니다. 용이 그 앞에서 다 노리고 있을지라도, 용이 손도 쓰기 전에 재빨리 낚아챈다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들어 올려서 하나님과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영광스러운 분, 하나님의 아들, 그 권세와 영광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 곁, 하나님의 품이 그분의 자리가 될 것이고, 이제 이 땅에 오셨어도 하나님의 그 사랑과 자비로서 우리 모든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그분의 말씀과 사랑으로, 그분의 행동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그분의 살아나심으로 우리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260일은 1년을 360일로 쳤을 때 3년 반입니다. 이 기간은 다니엘서에도 나오고요, 그 의미는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아, 3년 반, 1년 지났네’ 그렇게 셀 일은 아니고요, 성경에서 주님의 백성들의 환난의 기간입니다. 고난의 기간. 결코 짧지 않지요, 3년 반. 길다면 깁니다. 그러나 제한되어 있습니다. 힘들지요. 고난이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믿고 주님만 의지하면서 견뎌내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한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 전쟁은 3년 남짓이었습니다. 1차 대전은 4년 조금 넘었습니다. 2차 대전은 6년. 그 정도를 생각하면 이 3년 반이라는 기간이 짧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견딜 수 있는, 그리고 살아남을 수 있는,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그래서 구원받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3년 반의 시간 동안 믿음을 버리는 자들도 나올 것입니다. 배교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 그랬습니다. 고난인데 왜 그런 일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만 붙들면, ‘예수님 나 위해서 이런 고난도 당하셨는데, 나는 이 고난 견딜 수 있지’ 하면서 주님만 믿고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고난의 때도 지나갈 수 있는, 피하거나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주의 백성들은 광야로 피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양육하실 것입니다. 먹여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광야에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은 능히 주의 백성들을 먹여 살려 주시고, 그리고 그분 안에서 믿음 잃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 있습니다. 이 여자는 그러므로 구약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일 터이고, 신약으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신구약에서 이스라엘 나라 그리고 주의 교회, 교회 된 우리들입니다. 교회를 해치려고 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요한계시록도 교회가 핍박받는 상황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핍박합니다. 특별히 이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시대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일 것이라 말합니다. 핍박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대체로 로마 제국의 기독교 핍박을 보면, 황제 스스로 주도하는 국가적인 방침으로서의 그런 핍박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어떤 일이 많았냐면, 그 로마 제국이 워낙 넓지 않습니까? 그 수많은 나라 그리고 도시들이 있으면, 그 여러 도시들이 서로 우리가 황제를 더 섬긴다고, 황제에게 더 충성한다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도시는 우리가 황제의 신전을 만들 거야, 황제에게 경배할 거야, 그렇게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시의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안 하거든요. 황제 숭배를 거절하니까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발적으로, 지역적으로, 또 간헐적으로 이렇게 핍박들이 있어 왔습니다. 있다가 또 사라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황제 스스로 국가 정책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일이 기독교가 공인되기 바로 직전에 있었습니다. 새벽 바로 전이 가장 캄캄한 것처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정책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때가 제일 힘들었지요. 그때 배교하는 자들도 있었고, 순교도 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그 다음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이르러서 기독교가 공인이 됩니다. 밀라노 칙령, Edict of Milan입니다. 그 칙령은 기독교라는 말을 따로 할 필요는 없었고, 그냥 모든 신앙을 인정한다고 그렇게 되어 있는데, 사실상 기독교를 공인하는 겁니다. 더 이상 핍박받지 않습니다. 그동안은 숨어 있었는데 이제는 나와서 자유롭게 경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더 교회의 시련이 되고, 도리어 교회에게는 어려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핍박받을 때, 그래서 사람들이 순교할 때는 믿음이 순수합니다. 불 속에서도 정금같이 나오는 신앙.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에 환난의 불이 있으면 불순물은 타 버려요. 정금만 남거든요. 우리 신앙에도 불순물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아, 내가 예수님 믿어서 좀 더 잘 돼 볼까, 좀 잘 살아볼까’ 그런 신앙의 불순물들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은 환난의 불 속에서 다 타 버립니다. 그리고 정말로 예수님만 뜨겁게 사랑하는 정금 같은 신앙만 남는 거거든요. 그러니 환난 때에는 그렇게 정말 순수한 신앙만 있는 것입니다. 숫자는 비록 적고 믿음 지키는 것이 힘들어도. 그러나 이제 황제가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랬고, 그 다음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아예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러니 너무나도 쉽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죠. 기독교 믿는 것이 출세하는 데 도움이 돼요. 예전에 이방 신전은 이제 안에 다 리모델링해서 기독교 예배당으로 쓰는데, 기독교의 지도자들, 주교들이 이제 예배만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방에서 어르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방에서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있으면, 주교가 듣고 판결도 해주고 재판장 역할까지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교회의 주교들이나 사제들이 로마의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좋은 일일까요? 얼른 보면 좋은 일 같습니다.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다 환영받고 칭찬받고, 누구나 크리스천이 되고 싶어 하고, 좋은 예배당도 가지고, 다 누구나 존경하고. 좋은 일 같지만 그것이 도리어 교회에게는 더 큰 시련이고 고난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용이 이 교회를 흔들려고 뭔가 한다면, 차라리 그렇게 더 편안하게,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하는 것이 도리어 마귀 입장에서는 더 좋은 전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니까 애매해진 것은 페르시아 제국입니다. 로마랑 페르시아가 계속 전쟁을 하는데, 그때는 사산조 페르시아라고 합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제국에도 크리스천이 당연히 있거든요. 차라리 동방에 더 많아요. 예수님이 아람어를 사용하시는데, 그 언어를 사용하고 동방에도 기독교가 상당히 융성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다 사라졌지요. 페르시아 사람들도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로마가 크리스천 국가가 되어 버리니까, 로마랑 싸우는 페르시아는 로마의 종교인 기독교의 적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기들이 믿음을 지키면, 자기들의 나라인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친로마파, 반역자, 이렇게 되는 것이죠. 로마가 기독교화가 됨으로써 페르시아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건 안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보편적입니다. Universal Church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고,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도 아무리 죄가 많아도 그 죄를 예수님 앞에 고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은 다 용서해 주신다. 누구나 환영하는 것이 기독교회입니다. 그런데 로마가 자기 권세로 기독교를 사유화함으로 페르시아에 있던 백성들을 다 버려 버렸습니다. 거기에서 페르시아에서 예수님 믿으려면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를 버려야 되고 온갖 수모를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수많은 도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핍박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권세자들에게 매력적입니다. 왜냐면 교회를 사용하면 자기의 왕권을 더 강화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신성 로마 제국이 딱 그랬습니다. 오늘날의 독일이거든요. 독일의 황제 지위를 16세기부터 계속 차지한 나라가 오스트리아입니다. 오스트리아가 지금은 알프스산 골짜기의 작은 나라지만, 전성기 때는 한 20배는 더 컸습니다. 여러분, 그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아시지요? 옛날 한국에서는 도레미송을 ‘도는 토마토, 레는 레몬’ 뭐 그렇게 불렀는데, 그 <사운드 오브 뮤직>이 바로 오스트리아 이야기입니다. 그 아이들의 아버지, 엄격한 분이 해군 장교입니다. 오스트리아에 웬 해군이냐 할 수 있지만, 오스트리아가 한참 제국주의로 발칸 반도를 다 삼킬 때는 아주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했거든요. 오스트리아가 너무 강해서 독일 민족의 큰형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나중에 나온 동생이 더 커져 버렸죠. 그게 프로이센이고, 독일을 통일하거든요. 프로이센은 문자 그대로 오스트리아의 맞수였습니다. 나중에 큰형이 되죠. 오스트리아가 이에 반발하여 전쟁을 했는데 져버리죠. 그래서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잡고 나중에 세계사의 최대 강국이 되어 버립니다. 프로이센은 개신교 국가거든요. 루터의 본거지입니다. 그러니까 독일이, 프로이센이 강성해지니까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지고 밀려나서 발칸 반도로 진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발칸 반도는 터키로 인해서 이슬람화가 되었다가 터키가 쇠퇴하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데, 오스트리아가 밀려오니까 오스트리아에 저항하죠. 그래서 세르비아를 방문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1차 대전이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세르비아는 또 슬라브 민족이니까 러시아가 침공해옵니다. 러시아는 정교회인데, 러시아는 옛날부터 갖고 싶어 했던 도시가 이스탄불, 이슬람화가 되었지만 원래는 콘스탄티노플이라서 정교회의 본산지거든요. 러시아는 자기들이 정교회니까 그 핑계를 대고, 사실 원래 욕망은 흑해를 손에 넣는 것인데, 신앙적인 핑계를 대고 이스탄불을 차지하려고 내려옵니다. 1차 대전 배후에 영적인 세력들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가톨릭, 독일 개신교, 러시아 정교회, 그리고 터키는 이슬람. 이렇게 부딪쳐서 싸운 것입니다. 교회가 뭐라고 이렇게 세상에 이름 있는 제국들마다 이 교회를 탐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자기들이 교회라고, 참된 기독교라고 하면서 전쟁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교회는 세상 왕들이 보기에 매력적인 것입니다. 휘두르기에 딱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순수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 우리 곁에 우리와 친구 되기 위해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우리는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럴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분은 그만큼 약해지셨기 때문에 우리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순수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 권세로 오염되지 않도록 우리는 순수한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의 사명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젊은이들이 특별히 하나님께 나의 삶을 드릴 때, ‘주님, 나를 사용하셔서 이 세상에 참된 그리고 순수한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온 힘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시며 그분의 다스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의 백성은 누구이며, 그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지만, 끝까지 남기를 원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께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따르겠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어떤 이는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헌신이 얼마나 극단적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는 이처럼 매우 엄격한 가르침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눈이나 손이 죄를 짓게 하면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눈을 빼고 손을 잘라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가르침 중에도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 무언가를 빌려달라고 하면 돌려받을 생각 없이 주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적은 금액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무엇이든 바라는 대로 내어주라는 뜻입니다. 과연 누가 이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같은 제자들은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그물을 손질하던 중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그물과 배, 심지어 곁에 계시던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즉시 따랐습니다. 아버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아들들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가족과 재산, 경력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안정된 삶을 살았지만, 언젠가 맞이할 죽음 앞에서 영생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 물었습니다.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먼저 계명을 지키라고 답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의 계명과 함께 “내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청년이 자신은 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답하자,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를 더 명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러나 청년은 재물이 매우 많았기에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포기할 만큼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매우 유명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어떻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씀입니까? 여기서 ‘부자’란 단순히 재산의 많고 적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가난한 사람’이란 그날 먹을 양식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밤에 덮고 잘 겉옷 한 벌이 없어 그것을 저당 잡히고, 해가 지기 전에 돌려받아야만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오늘 먹을 양식이 있고, 아마 내일 먹을 것까지 있을 것이기에 성경적 기준에서는 모두 부자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재물의 액수 때문이 아니라, 부자 청년처럼 예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재물일 수도 있고, 경력이나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놀라 물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 역시 자신들도 그 부자 청년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들 또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구원과 영생,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본래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셨지만 그 계명을 온전히 지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예언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외치셨지만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땅의 질서를 뚫고 ‘침공해 들어오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오시는 나라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은 아직 십자가와 부활의 깊은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 나라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 될 때, ‘인자(人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문자적으로 ‘사람의 아들’이지만, 이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예언된 특별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한자 ‘자(子)’는 어떤 개념의 구체적인 실체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예: 과자, 의자). 따라서 ‘인자’는 인류라는 피조물 가운데 나타난 단 한 분의 구체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 인자의 모습은 다니엘서 7장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상징하는데,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은 그가 신적인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이 인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졌을 때, 그들 가운데 함께 거닐던 네 번째 인물 역시 “인자 같은 분”이었습니다. 이처럼 구약은 장차 오실 왕,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이 있다”고 한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는 것은 인자이신 예수께서 왕으로 오신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의 제자들은 왜 그토록 모든 것을 즉시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만 했을까요? 잠시 지체하다가 예수님을 놓치면 모든 것이 늦어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실 날이 문자 그대로 며칠 앞으로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그 중대한 사건을 목격하고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 땅에 세워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권능이 이 땅에 온전히 나타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결정적인 날이 임박했기에, 부자 청년은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그 길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의 모든 소유를 팔아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중심에 ‘십자가와 부활’을 두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고백하는 삶이 바로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재물, 경력, 가족도 모두 소중하지만, 그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먼저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늘 십자가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삶에 어떤 일이 닥치든,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바라보십시오. 그 고백이 우리의 삶을 결정짓게 하십시오. 그때 우리 마음속에 세워진 십자가는 삶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사흘 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능력이요 생명임을 믿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것처럼, 그분의 새 생명이 날마다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외치며, 십자가 안에서 옛사람은 죽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얼마나 큰 자비와 은혜입니까? 우리는 그 은혜를 힘입어, 비록 부족할지라도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고 부활의 능력을 믿으며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초대받은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용하셨듯이, 그분의 자비와 인도하심 가운데 우리의 삶 또한 그분의 뜻대로 이루시고 사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64장 1절에서 4절, 그리고 8절에서 12절입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 주제는 구약 예언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대한 주제 중 하나인 ‘여호와의 날’입니다.

성경은 이 날을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도 부르고, 때로는 아주 간결하게 ‘그 날’이라고 칭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에서 ‘그 날’이라는 표현을 마주하게 되신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임하시는 ‘여호와의 날’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근본적인 진리를 분명히 선포하고자 합니다. 이는 오늘 말씀의 주춧돌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날이란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강림하시는 날입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목도하게 되는, 역사의 마지막을 고하는 바로 그 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담긴 이사야의 기도는 평온한 때에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아닙니다. 이는 앞으로 닥쳐올 민족의 참혹한 파멸을 영의 눈으로 내다본 선지자가, 그 깊은 고뇌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터뜨리는 처절한 절규입니다. 이 기도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본문 10절의 비극적인 장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 (사 64:10-11)

하나님의 도성 시온, 곧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던 영광의 중심지,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저도 90년대에 뉴욕에 살 때, 크고 아름답던 한인 교회가 가스 폭발로 불타버린 현장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보니, 십자가 탑만 덩그러니 남은 채 건물이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그 광경 앞에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할 말을 잃었던지 모릅니다.

하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의 파괴는 단순히 건물이 무너진 것을 넘어, 그들의 신앙과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재앙이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성전의 불길을 보면서 백성들은 ‘이것이 바로 지옥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 끔찍하고 가시적인 경험을 통해,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하나님의 최종 심판이라는 개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섭고도 실질적인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온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는 크고 두려운 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과거 히스기야 왕 시대(기원전 약 700년), 앗수르의 막강한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시온 신앙’, 즉 ‘하나님께서 시온성만큼은 결코 멸망시키지 않으신다’는 굳건한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믿음은 변질되었습니다. 후대의 백성들은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도 ‘그래도 성전이 있는 시온은 안전하다’는 거짓된 안도감에 빠졌습니다. 바로 그때, 예레미야와 같은 참된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떠난 시온은 망한다”고 외쳤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귀에 달콤한 말, 즉 “시온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며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포장하여 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긴 백성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바벨론의 침공(기원전 586년)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비극을 내다보며 이사야는 12절에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

이 탄원은 단순히 고통에 대한 불평이 아닙니다. 이것은 과거 모세가 금송아지를 섬긴 백성을 위해 중보했던 기도와 같은 차원의 호소입니다. ‘주님, 이대로 주님의 백성과 성전이 버려진다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모독받지 않겠습니까?’라는 안타까운 외침인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무너진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이사야의 기도는 이제 인간의 힘을 넘어선 하나님의 파괴적이면서 동시에 구원적인 개입, 즉 ‘여호와의 날’을 요청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민족의 참상에 대한 이사야의 해결책은 인간적인 회복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온 세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현현, 즉 ‘여호와의 날’의 강림을 간구합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사 64:1-2)

이사야의 기도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찢고)’ 내려오시길 기도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부드럽게 여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으로 ‘찢어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야곱이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극심한 슬픔에 자기 옷을 찢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고 오시는 것은 온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려는 거룩한 비통함과 최종적인 개입을 담은, 세상을 뒤흔드는 행위입니다.

그 권능 앞에서 견고한 산들이 진동하고, 마른 나뭇가지(섶)가 순식간에 불타듯, 심지어 바닷물조차 끓어오를 것입니다. 이는 그 어떤 피조물도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 심판의 날: 주님을 믿지 않던 원수들과 이방 나라들에게 그 날은 주의 이름을 비로소 깨닫고 두려움에 떠는 통곡과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소용없는 돌이킬 수 없는 날입니다.
  • 영광의 날: 반면,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그 날은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이 땅에서 믿음 때문에 받았던 모든 고난과 슬픔의 눈물을 주님께서 친히 닦아주시고, 예비하신 상급과 면류관으로 기뻐하는 최고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영광의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4절은 그 답을 ‘자기를 앙망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앙망’이란 간절히 바라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자세는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뉴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는지에 따라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에 미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앙망하는 자는 다릅니다. 그는 세상 소식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직 다시 오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 예비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이처럼 두렵고도 영광스러운 그 날을 기다리는 성도와 하나님 사이에는 과연 어떤 근본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모든 것이 파괴된 극한의 고통 속에서, 이사야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가장 본질적이고 놀라운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사 64:8a)

구약 시대에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파격적이고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이사야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 불타버린 후에야, 외적인 종교 행위가 아닌 우리의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신앙의 본질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이사야 63장 16절에서도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고 반복되며, 훗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완성됩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놀랍게도 원어에서 ‘우리 아버지’는 분리된 두 단어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단어에 ‘우리의’라는 의미가 결합된 하나의 단어입니다. 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공동체적이고 영원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는 천지가 무너져도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아버지와 자녀의 약속으로 묶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이사야는 두 번째 핵심 비유를 제시합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사 64:8b)

예레미야 선지자가 토기장이의 집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듯이,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우리를 빚어 가시는 창조주이심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진흙이지만, 그냥 버려진 진흙이 아니라 위대한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입니다.

이 강력한 비유는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세 가지 중요한 영적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자신을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으로 인식할 때, 삶의 모든 경험, 특히 고난의 의미는 완전히 새롭게 변화합니다.

  1.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 안에 붙들려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단순히 들고 계신 것이 아니라, 최고의 작품을 만드시기 위해 계속해서 만지시고 다듬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안정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고난을 통해 우리를 빚으십니다. 때로 삶의 고난과 힘든 일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우리를 빚어 가시는 토기장이의 손길입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뜨려서라도 더 좋은 그릇으로 새롭게 만들 듯, 고난은 우리를 부수어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일 수 있습니다. 그 손길을 통해 우리는 더욱 주님의 뜻에 합한 모습으로 다듬어집니다.
  3. 그 결과 주님을 더욱 닮아갑니다. 토기장이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만지고 빚으실수록, 우리의 영혼에는 그분의 ‘손자국’이 남게 됩니다. 이 ‘손자국’은 우리가 점점 더 예수님처럼 성숙하고, 겸손하며,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흔적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가 그분의 형상, 즉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토기장이의 손길 안에서 빚어지는 과정의 끝에, 우리는 마침내 어떤 모습으로 최종 목적지에 이르게 될까요?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현실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권능적인 개입을 부르짖는 기도를 거쳐, 마침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와 ‘토기장이’로 고백하는 이사야의 깊은 신앙 여정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여호와의 날’이라는 주제로 돌아가 봅시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분의 빚으심에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그 날’은 더 이상 두려운 심판의 날이 아닙니다. 그 날은 바로, 위대한 토기장이의 손에서 완성된 가장 귀하고 영광스러운 작품으로 주님 앞에 당당히 서는 날입니다.

우리가 부를 찬양의 가사처럼,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임을 고백하며, 날마다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감사와 순종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호와의 날’에 주님의 가장 귀한 작품으로 주님 앞에 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면서 또 특별히 복음의 말씀을 다시한번 새기는 귀한 날입니다. 우리들도 로마서 1장 16절 17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기기를 원합니다.
먼저 16절의 말씀을 보시면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그랬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없이 낮아지시고 또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하시는 이 복음의 내용은 믿지 않는 자가 보기에는 미련하고 또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뜨거운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과 은혜가 그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신 뜻 그리고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그 모든 목적이 이 복음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순수하게 그대로 믿고 전하면 부끄러워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간혹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복음에다가 사람의 것들을 더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욕심도 더하고 사람이 원하는 것 사람이 하는 여러가지 방식들을 거기에다가 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복음을 보고 아 이것을 믿으면 내 욕심도 채워지고 또 내가 이 세상에서 잘 되고 또 세상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복음이 더 잘 전해지는 것 같아도 결국은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복음이 변질되어서 다른 복음이 되면 그보다 부끄러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순수하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주님의 복음만을 믿고 그대로 전합니다. 그리할 때에 이 능력이 우리 가운데 역사해서 새 생명을 주십니다.
이제 이 복음에 대해서 첫 번째로 우리가 또 생각할 것은 이 복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줍니다. 세상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사람들이 잘 살려고 해도 그 끝은 허무함이요 절망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있고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그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아무리 그 삶을 귀하게 여기고 나름 최선을 다해서 가족들과 이웃에게 잘하려고 해도 결국은 그 끝은 먼지로 돌아가고 맙니다. 다 썩어지고 잊혀집니다. 얼마나 허무한지 모릅니다. 그 가운데서 사람들은 애쓰고 발버둥치면서 살지만 구원이 없습니다. 이런 이 세상의 죄의 근본적인 문제를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죄 가운데에서 사망 권세 아래 있고 멸망으로 가는 세상입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들이 구원받는 길만이 우리들의 살 길이고 우리의 소망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바로 구원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이 구원 가운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하늘 나라가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우리들도 부활하셔서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이 아니면 우리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그저 육신적으로만 살고 또 이렇게 생명을 영위 한들 그 끝은 무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주시는 새 생명 참된 생명을 우리들은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복음만이 우리들의 생명이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들은 이 복음을 믿어서 이 세상에 예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은 마치 파수꾼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하박국 선지자의 예언에 근거를 하고 있는데 하박국 선지자가 2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하박국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움에 대해서 예언을 하기 바로 전에 나는 파수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파수꾼은 성루에, 높은 곳에 서서 깨어 있어서 늘 살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혹시 전쟁이 나지 않는지 혹은 승리의 소식이 오지 않는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먼저 아는 사람이 파수꾼입니다. 그 소식을 받으면 성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 모두가 다 살도록 해주는 사람이 파수꾼입니다. 하박국은 내가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기다리는 파수꾼입니다. 왜냐하면 하박국이 바로 1장에서 이 세상에 불의의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이 더 성공하고 하나님 백성들을 핍박하니 하나님 어찌 합니까 하면서 호소하고 간구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지금 저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파수꾼이 되리라 하나님 말씀의 파수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보리라.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을 때에 하나님은 말씀의 파수꾼 된 하박국에게 이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들은 이 말씀의 실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확실하게 보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또한 이와 같이 파수꾼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세상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이미 2천년 전에 완성되고 전해졌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믿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 세상은 죄와 괴로움 가운데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멸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늘 시험 가운데 노출되어 있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의 구원의 복음을 이미 알고 믿은고로 세상에 담대히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기도하고 파수합니다. 하나님의 부활 복음이 완성되는 그 날이 옵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늘 깨어 있어서 우리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파수꾼이 되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고 세상에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저희들도 이 하나님의 능력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누리면서 하박국과 같이 이 세상에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또한 우리들이 볼 내용은 두 번째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말이 안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험이나 우리들의 이해할 수 있는 걸로는 하나님 주시는 구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하신 일은 눈으로도 보지 못하였고 귀로도 듣지 못하였고 마음으로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 엄청난 일을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베푸신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가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루터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책 가운데에 노예의지론이라는 책 소개를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유로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믿고 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사람의 의지는 결국 노예 상태에 있어서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의 복음을 알 수 없다는 그런 내용인데 여기에서 루터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죽이심으로 살리신다. 정반대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도저히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것이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연명하고 겨우겨우 하루하루 겨우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이 심으로 살리십니다. 예수님을 저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죄짐을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만에 살아 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과 함께 죽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가 세례받을 때에 물에 들어가므로 장사 지낸 바 되고 예수님의 일어서심과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시고 그를 통해서 부활로 살리시는 것은 우리들이 믿음이 아니면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으나 우리들은 이것을 믿기 때문에 새 생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두번째 정죄하심으로 의롭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데 우리에게 분명히 있는 이 죄를 대충 덮어 두시거나 외면하시거나 그냥 넘어 가시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셨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우리의 모든 죄를 샅샅이 뿌리까지 다 드러내십니다. 평소에는 괜찮은 그런 사람들이었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일조했습니다. 우리들의 죄가 다 드러나고 하나님은 분명 유죄판결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 모두는 유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들을 심판과 멸망으로 몰아 넣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로 의롭다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께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공로 통해서 의롭다 하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되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 받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라 인정되지 못하면 어떻게 천국에 가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죄판결 내리심으로 정반대로 의롭다 판정하심인데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겸손히 믿을 뿐입니다.
세번째로 지옥에 던지심으로 천국에 들이십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데 그 전에 지옥의 던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실 실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바로 예수님께서만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은 지옥에 감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대신에 예수님께서 그 모든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예배 때마다. 고백을 하는데 사도신경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지 그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원문에는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 가셨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음부는 그냥 말그대로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으므로 음부에 내려 가셨다는 말이 합당합니다. 그런데 이 사도신경이 영어로 번역이 되면서는 He descended into hell 지옥에 가셨다는 번역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음부라는 단어와 지옥이라는 단어는 호환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면 지옥의 가셨던 말씀인가 이것은 우리가 좀 받아들이기가 좀 어렵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공적 예배에서 고백할 때는 그 대목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고 그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기독교 강요에서 분명히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셔서 그 모든 형벌과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 저와 여러분을 대신했습니다. 마땅히 저와 여러분이 당해야 할 그런 고난과 형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면제된 것입니다. 마땅히 저와 여러분이 가야 할 그 지옥을 예수님께서 대신 그 속에 던져지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천국을 우리에게 열어 주시지요. 우리들은 그것이 면제되었습니다. 예수님 덕분이지요. 그러나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이 지옥의 심판을 예수님께서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감히 누가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사람의 상상으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지옥에 가셔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셨고 천국에 인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구원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셨을 때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알 일입니까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그리하셨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천국 복음 그리고 영생 이 구원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우리들은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구원으로 실체로 일어나는 귀한 성도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에는 또한 세 번째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17 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 앞에 딱 서면 세상에 불의가 다 드러납니다. 이 세상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라도 회칠한 무덤입니다. 그 속에선 다 썩어 있고 악하고 멸망 뿐입니다. 세상의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서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종교나 도덕이나 우상을 세워서 그렇게 눈에 보이기에는 괜찮아 보일 지라도 하나님의 의 앞에 드러나면 모두가 심판받고 멸망받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 이것을 루터가 1517 년에 발견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고 종교개혁을 시작하는 이 귀한 말씀 그래서 로마서 1장 17절이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그런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기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from faith to faith, 믿음에서 믿음으로,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또는 믿음으로 저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의 믿음 사람이 내가 가진 믿음이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내 믿음으로 그렇게 구원받는다면 그건 어쩌면 내 공로일지 모릅니다. 내가 믿었으니까 내가 잘 한 거잖아요. 그럼 내 공로로 구원받았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의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을 우리들이 깊이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에 파수꾼 된 하박국이 받은 이 말씀이 저렇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데 원래 말씀이 나오는 하박국에는 우리 성경에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의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데 70 인경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데 그 헬라어 번역인 70인경에는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 수 있다. 믿음직하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께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로 그분을 믿을 만큼 신실하신 그 하나님 그분께서 하나님의 믿음을 주십니다. 그로 인해서 살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에 따라서 다시 한번 좀 더 분명하게 써 보면 이렇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사는 것입니다. 의인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사람이 처음부터 의인이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원래 그 스스로 의인인 사람은 없는데 어떻게 그러면 의롭게 되느냐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옳은 번역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이게 아니고요 의인은 끊고 믿음으로 살리라 이게 아니고 의 있는 믿음으로 이게 한 묶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인이 되느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기 보여 있는 세 번째 번역이 조금 더 이제 확실하게 의미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마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주님은 변치 않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 나의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주시는 이 믿음으로 인해서 저와 여러분이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징계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저와 여러분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십니다. 그 의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삽니다.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죽이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영원히 영화롭게 하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것을 루터가 발견을 하게 됩니다
종교 개혁을 우리들이 기념하면서 지난 주에는 루터의 일생 가운데 사건 위주로 살폈습니다. 그가 어떻게 어떤 여러가지 심문을 받고 토론을 하거나 심지어 황제 앞에 불려갔어도 굴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사건들을 봤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면 그 모든 근본에 루터가 도대체 어떠한 체험을 했기에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독일에서 그의 아버지는 광산업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산층이라고 할 수가 있었고 아들 교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법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스물두 살 때에 집에 갔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어떤 들판에서 천둥 번개가 치는 것을 보고 정말로 두려워서 벌벌 떨고 서원을 합니다. 그래서 수도사가 됩니다. 그 아버지는 굉장히 싫어하지요. 그런데 루터는 수도사가 되고 난 후에도 얼마나 자기의 죄와 또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지 모릅니다. 죄를 낱낱이 다 고백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백하지 않은 죄는 나를 지옥가게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한테 모두 생각 조금 잘못했던 거 조금 예배시간에 자세 삐뚤어졌던 거 이런 거 다 일일이 고백하다 보니까 6시간도 넘어가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걸 다 들어주는 신부님도 너무 힘든 거죠. 아무리 고백 고백해도 또 생각이 날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아 이제는 고백 다했다 이젠 더 고백할 죄가 없지 그러면 그거는 교만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뭐 이런식으로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루터가 이렇게 자기의 죄로 인해서 고민할 때는 얼마나 괴로운지 마치 지옥 같았다 이렇게도 고백을 하구요. 그래서 그의 스승인 슈타우피츠가 그러지 말고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루터에게 가르쳐 주고 또 성경을 계속 연구하고 또 성경 가르칠 수 있도록 이렇게 지도를 해 줍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성경 로마서를 특별히 읽으면서도 하나님을 나는 미워하고 하나님께 화가 났다. 그런 식으로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면 너무나 하나님이 미운 거에요 감히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의는 나를 심판하고 나를 정죄하고 나를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의니 얼마나 하나님께 내가 화가 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식으로 나중에 고백을 했죠.
그러다가 1517년 초에 바로 그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그해 초에 탑의 경험이라는 것을 합니다. 루터가 있던 그 조그만 방에 그 어떤 탑이 있는 그런 건물이었는데 거기에서 로마서 1장 17절 져 말씀을 읽다가 복음을 완전히 발견하게 됩니다. 뭘 깨닫게 됐느냐 하나님의 의란 정죄하고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거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살리라 그 이로써 우리에게 우리가 믿으면 이 믿음으로써 저와 여러분을 의롭게 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살리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의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루터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그때 온전히 거듭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낙원에 들어간 것처럼 되지요. 전에는 미워했던 하나님의 의를 내가 미워했는데 정말 그만큼 큰 사랑으로 얼마나 감격해서 하나님의 의라는 이 말이 얼마나 감격이 되는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체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 받음으로 우리가 삽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루터가 이걸 발견한 것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이와 이 복음을 다른 사람들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이제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고 아무리 세상에 황제나 어떤 누가 위협을 해도 목숨을 잃을지언정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진리의 말씀만 붙들고 평생 살았습니다. 그리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이 개혁에 동참하게 되었고 결국 이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온 것입니다. 오늘 주제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루터가 발견한 이것은 저와 여러분도 마음속에 확실히 새기고 그래서 우리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아서 살아나는 영생을 얻는 이 복음 하나님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