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게시판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3번은 피조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장엄한 위계질서를 음악적 서사로 구현한 특별한 작품입니다. 총 6악장으로 구성된 이 대작은 가장 낮은 단계인 무기물에서 시작하여 창조주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층위를 치밀하게 묘사합니다. 1악장은 투박하고 직설적인 선율로 바위와 같은 무기물을, 2악장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살랑거림을 통해 식물을, 3악장은 강아지가 뛰노는 듯한 경쾌함으로 동물을 상징합니다. 4악장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심오하고 진지한 인생의 노래가 흐르고, 5악장은 천진난만한 천사들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는 6악장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향하며,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깊은 치유와 힐링을 선사합니다. 이처럼 온 피조물에는 창조주가 세우신 질서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느부갓네살 왕은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권력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높이다가, 식물과 동물의 수준으로 추락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이는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인간이 도달하게 되는 존재론적 실체를 드러내는 영적 경고입니다.
다니엘 2장과 4장에 나타나는 느부갓네살 왕의 태도 변화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지점입니다. 2장에서 왕은 자신이 꾼 꿈을 맞추지 못하는 지혜자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격노하던 폭군이었으나, 4장에 이르러서는 한결 유순하고 다정하게 다니엘을 맞이합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상세히 털어놓으며 다니엘의 신학적 통찰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당시 바벨론에는 '박수(Magician)'라 불리는 지혜자 계층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천문학, 점성술, 그리고 국가의 모든 지식을 총괄하던 엘리트 그룹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로 이들의 우두머리인 '박수장'으로서 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다른 학자들이 해석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도 왕은 분노하는 대신 당연하다는 듯 다니엘을 호출합니다. 이는 세상의 지혜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결국 하나님의 사람만이 진정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왕이 꿈속에서 목격한 나무는 실로 압도적인 웅장함을 자랑했습니다. 하늘에 닿을 듯 솟구친 그 위용은 캘리포니아 하이웨이를 따라 100미터가 넘는 거구로 늘어선 레드우드 숲을 연상시킵니다. 나무는 본래 인간에게 안식을 주는 그늘을 드리우고, 아담과 하와에게 첫 식량으로 허락된 열매를 제공하며, 가구와 도구가 되어 삶을 지탱해 줍니다. 나아가 마지막 순간에는 장작이 되어 온기를 전하는 지극히 고마운 존재입니다. 성경은 종종 사람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사사기 9장에서는 나무들이 왕을 뽑는 비유를 통해 올리브, 포도, 무화과나무가 사명을 다하기 위해 권력을 거절하는 반면, 분수를 모르는 가시나무만이 교만하게 왕이 되려 하는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맹인이 치유받는 과정 중 사람을 '걸어 다니는 나무'로 본 것 역시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영혼과 양심, 감각이 마비된 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이 거대한 나무가 바로 느부갓네살 왕 자신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늘에 닿으려 했던 나무의 모습은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오만함, 즉 '휴브리스(Hubris)'의 전형입니다. 이사야 14장은 자신을 높여 하나님과 비기려 했던 계명성, 즉 루시퍼의 타락을 다룹니다. 루시퍼는 라틴어로 '빛을 낸다'는 뜻이며 헬라어로는 '포스포로스(Phosphoros)'라 불립니다. 과학 원소 중 스스로 빛을 내는 '인(P)'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새벽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금성처럼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발산하며 창조주를 대적하려 했던 왕은, 결국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 자기 영광에 취한 자가 직면할 필연적인 결말입니다.
이처럼 하늘에 닿으려 했던 왕의 영광은 결국 짐승의 비참함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판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합니까? 하늘에서는 '순찰자'이자 '거룩한 자'인 '와처(Watcher)'가 내려와 세상을 감찰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왕들이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는지, 아니면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는지 지켜봅니다. 순찰자는 나무를 베어 없애되 뿌리와 그루터기만은 남겨두고 쇠와 놋줄로 묶으라는 엄중한 명을 내립니다. 이는 하나님이 왕권을 주셨음을 망각한 자를 향한 징계인 동시에, 완전히 멸절하지 않으시고 회복의 여지를 남겨두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왕이 깨닫기까지 '일곱 때'라는 연단의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심판을 피하는 길은 종교적인 형식이나 화려한 제물에 있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라고 간곡히 권면합니다. 권력은 자기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위임된 것입니다. 특히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 눈물 흘리는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왕의 본분입니다. 예수님 곁에 모여든 이들이 바로 그런 소외된 자들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부와 권세를 쫓기보다 하나님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가난한 심령을 가질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참된 인간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우매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반복해서 망각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수차례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고도 왕궁 지붕 위에서 거대한 도성을 내려다보며 "이 바벨론은 내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였고 내 영광을 나타낸다"는 오만한 선포를 내뱉습니다. 그 순간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들짐승의 상태로 추락합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는 이 비참한 몰락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누가 나의 홀을 뺏어 가는가", "누가 내 머리끄덩이를 잡아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가", "왜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를까"라고 절규하며 왕관을 빼앗기고 두려움에 떠는 왕의 모습은, 하나님을 잊은 인간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자의식도 없이 땅만 보고 풀을 뜯는 짐승 같은 삶, 그것이 바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했던 자의 참담한 초상입니다.
비참한 연단의 기한이 찼을 때, 느부갓네살 왕은 비로소 땅이 아닌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본능의 풀밭만을 탐닉하던 시선을 돌려 하늘을 향하는 순간, 그에게 참된 총명이 돌아왔습니다. 짐승의 마음에서 사람의 마음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물질과 육신만을 전부로 여기며 사는 것은 짐승의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눈이 뜨여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지난날의 삶이 얼마나 공허했는지를 깨닫고 참된 인간의 삶을 비로소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의 시선이 땅의 것에 머물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 그것이 지혜의 시작이자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참된 사람의 삶은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적 교만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선악'이란 단순히 윤리적 개념을 넘어, 무엇이 '좋고 나쁜 것(Good and Bad)'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려는 태도를 뜻합니다. 자신의 유익과 안목만을 기준으로 삶의 모든 결단을 내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이며, 느부갓네살을 짐승으로 만든 휴브리스의 본질입니다. 이제 내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비로소 우리는 피조물 중 가장 귀한 '참 사람'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주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의 총명을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지혜의 길로 우리를 친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도사리는 교만의 죄를 경계하게 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만이 사람의 나라와 우리 인생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주인이심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어, 우리에게 하늘의 지혜와 총명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땅의 욕심에 머물지 않고 오직 하늘을 우러러보게 하시며, 날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참된 사람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하던 교만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공의와 긍휼을 실현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바로크 음악의 거장 헨델은 본래 독일 하노버 지방의 궁정 음악 감독으로서 게오르크 선제후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노버에서의 생활에 답답함을 느꼈던 그는 휴가를 빙자해 영국으로 도망치듯 떠났고,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은 채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영국의 앤 여왕이 서거하고, 공교롭게도 헨델의 옛 주인이었던 게오르크 공이 영국의 조지 1세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배신했던 주인을 다시 마주하게 된 헨델은 처벌의 두려움에 식은땀을 흘렸으나, 재빨리 '물 위의 음악'을 작곡하여 왕의 행차에 바침으로써 극적인 용서를 받아냈습니다. 당시 바로크 음악은 이처럼 왕과 귀족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들의 권위를 수식하는 배경 음악으로서 강력한 정치적 도구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음악의 이러한 영향력을 간파하여 자신의 통치 권세를 극대화하려 했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등장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두라 평지에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웠는데, 그 높이는 무려 60규빗으로 오늘날의 10층 건물 높이인 90피트에 달했습니다. 너비는 6규빗으로, 높이와 너비의 비율이 10대 1인 이 신상은 인체의 비례로 볼 때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좁은 기괴한 형상이었습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숫자 '6'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한계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되 첫 3일은 무대와 배경을 만드시고, 다음 3일은 그 공간을 생물들로 채우시는 '3+3'의 구조로 세상을 조성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의 숫자인 '6'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안식하는 일곱째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날인 '7'이 결여된 '6'은 오직 인간의 과시욕과 불완전한 권세만을 상징합니다. 느부갓네살은 2장의 꿈을 통해 자신의 나라가 언젠가 무너질 '금 머리'에 불과하다는 계시를 받았음에도, 신상 전체를 금으로 입히고 숫자 6을 투영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며 영원한 인간의 제국을 꿈꿨던 것입니다.
왕은 이 거대 우상 앞에 모든 백성을 굴복시키기 위해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동원했습니다. 본문에는 나팔, 피리, 수금(기타의 일종), 삼현금, 양금, 생황(심포니아)이라는 여섯 악기가 등장합니다. 특히 '생황'은 헬라어 '심포니아'에서 유래한 단어로 '화음'을 의미하며, 이는 당시 그리스의 악기와 문화가 이미 바벨론에 유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흔적입니다. 주목할 점은 이 악기들의 목록이 본문에서 무려 네 번이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고도의 문학적 장치인 '풍자(Satire)'입니다. 당시 회당에서 이 말씀을 소리로 듣던 유대인들은 처음 두 번까지는 위엄을 느끼다가도, 세 번째와 네 번째까지 악기 이름이 나열될 때면 그 우스꽝스러운 반복에 기득기득 웃음을 터뜨렸을 것입니다. 이는 왕이 부리는 엄숙한 위세와 전체주의적 압제가 실상은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폭로하며, 박해받던 성도들에게 세상 권력을 비웃을 수 있는 신앙적 해학의 용기를 제공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음악이 가사 유무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인간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았습니다. C.S. 루이스 역시 '나니아 연대기'의 '마법사의 조카'에서 사자 아슬란이 노래로 세상을 창조하는 장면을 묘사하며 음악의 거룩한 기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이 신성한 선물을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통제 수단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는 음악 소리에 맞춰 절하지 않는 자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지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철을 녹이기 위해 섭씨 1500도까지 온도를 높이는 고도의 제철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불을 지피는 수준이 아니라, 벽돌 구조물로 화로를 쌓아 열이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두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기술적 경지였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불을 일곱 배나 뜨겁게 하라고 명령한 것은 연료를 대거 투입하거나 펌프질을 일곱 배나 빠르게 하여 산소 공급을 극대화하라는 기술적 지시였습니다. 왕은 이 압도적인 과학 기술을 무력의 상징으로 삼아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겠느냐"며 창조주를 모독했습니다.
이 서슬 퍼런 죽음의 위협 앞에서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능히 건져내실 것"이라는 확신과 더불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절정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저 하늘 멀리 계신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우리 곁에서 모든 사정을 아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로 신뢰했습니다. 구원의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에 속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을 수단화하는 우상 숭배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 순간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는 성숙한 순종을 보여주었습니다.
왕이 보낸 군사들조차 열기에 타 죽을 만큼 뜨거운 불길 속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결박된 채 던져진 세 사람 외에, 결박되지 않은 네 번째 존재가 불 속을 거니는 장면이 포착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혹은 천사의 형상을 한 이 네 번째 존재의 동행으로 인해, 불은 그들의 옷과 머리카락 하나 해하지 못했습니다. 기이하게도 맹렬한 불길이 태운 것은 오직 그들의 손발을 묶었던 줄뿐이었습니다. 이는 성도가 겪는 고난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속박하던 두려움과 염려라는 결박을 태워버리고 진정한 영적 자유를 선사하는 '위장된 축복'임을 실증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몸(Body)'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핵심 키워드로 등장합니다. 왕은 그들의 몸을 해하려 했으나, 그들이 기꺼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을 때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몸을 온전히 보존하셨습니다. 이러한 몸의 구원은 훗날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 신앙의 견고한 단초가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하고 잠시 하나님을 찬양했으나, 그의 신앙은 뿌리가 없어 곧 다시 교만과 우상 숭배의 길로 돌아섰습니다. 반면 다니엘과 세 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교육받은 성경 말씀에 그 영혼의 뿌리를 깊이 내렸기에 흔들리지 않는 최후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체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변치 않는 기록된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불확실한 현실의 풀무불 속에서도 우리를 비추는 유일한 빛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준 그 견고한 말씀 중심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 또한 세상의 어떤 위협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참된 종교 (다니엘 2:31-35)

우리는 일상 속에서 종종 인간의 인내와 지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른바 '불가능한 과제'를 마주하곤 합니다. 직장 상사나 지도 교수가 상식 밖의 지시를 내릴 때 느끼는 황당함과 중압감은 때로 우리의 숨이 멎을 듯한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본문인 다니엘 2장에는 바로 그러한 극한의 위기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는 지식인들이 등장합니다. 당시 성서 세계의 패권국이었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어느 날 밤, 매우 생생하고 특별한 꿈을 꿉니다. 그 꿈이 지닌 영적 의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왕은 바벨론의 모든 학자와 현자, 점성가들을 소집합니다. 그러나 왕의 요구는 가혹함을 넘어 광기 어린 것이었습니다. 꿈의 해석은 물론이요, 자신이 꾼 꿈의 내용 자체를 알아맞히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왕은 학자들이 그저 유려한 언변으로 자신을 속여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고, 만약 꿈의 내용을 재현하지 못한다면 모든 지혜자를 몰살하겠다는 서슬 퍼런 포고를 내립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실존적 위기였으며, 그 죽음의 그림자는 바벨론의 학문 체계 안에 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에게도 예외 없이 드리워졌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 다니엘이 선택한 첫 번째 전략적 행동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는 다급히 친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함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니엘과 친구들이 견지했던 생명에 대한 고결한 관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의 간구는 단순히 죽음을 면하기 위한 비굴한 생존 본능의 발로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 3장과 6장의 행보가 증명하듯, 그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절개를 더 소중히 여겼던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생명이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임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나의 목숨"이라는 고백은, 생명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플랫폼으로 인식하는 청지기적 사명감의 표현입니다. 왕의 일시적인 변덕이나 분노 때문에 이 귀한 생명이 헛되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없으며, 세상에도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무가치한 일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신앙적 태도는 위기를 돌파하는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고, 마침내 하늘의 응답을 이끌어내기에 이릅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 신비로운 해석을 다니엘에게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감격한 다니엘이 드린 찬양은 우리 신앙의 본질적 체계를 가르쳐 줍니다. 다니엘은 가장 먼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지어다"라고 선포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사이라는 극히 짧은 시공간만을 인지하며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남기는 위대한 성취들이 대개 미완성으로 남는 이유도 바로 이 한계성 때문입니다. 슈베르트의 8번 교향곡, 말러의 10번, 푸치니의 투란도트,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걸작들은 창조주의 영원성에 닿지 못한 채 미완의 상태로 남겨지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며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분입니다. 다니엘은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를 경영하시며, 그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예비하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고백이 차곡차곡 쌓일 때, 그것은 비로소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실력'으로 승화됩니다.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께 힘을 얻은 다니엘은 이제 거대하고 화려한 바벨론 왕궁에서 느부갓네살 왕 앞에 담대히 섭니다. 질투 섞인 시선과 엄중한 권위가 지배하는 그 공간에서 다니엘은 이 모든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분이 오직 하늘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다니엘이 묘사한 왕의 꿈속 신상은 실로 거대하고 그 광채가 찬란하며, 보는 이를 압도하는 두려운 형상이었습니다. 머리는 순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종아리와 발은 철과 진흙으로 구성된 이 신상은 장차 도래할 세상 제국들의 부침을 상징합니다. 이를 해석함에 있어 두 가지 신학적 체계가 존재합니다. 첫째는 신약적 안목을 바탕으로 한 해석으로, 바벨론, 메대·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둘째는 다니엘서 자체의 내부적 논리에 근거한 해석으로, 바벨론 이후 메대와 페르시아를 각각 분리된 왕국으로 보고 네 번째 나라를 헬라(그리스) 제국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 핵심적인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황금처럼 화려하고 철처럼 강인한 인간의 나라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 소멸될 미완성된 권세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인간 제국의 허망함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장면은 바로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한 뜨인 돌의 등장입니다. 구약 성경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의 제단을 쌓을 때 쇠 도구를 쓰지 못하게 하셨던 것처럼, 이 돌은 인간의 인위적인 수단이나 정교한 조작이 개입되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을 상징합니다. 인간이 공들여 구축한 정치적 시스템과 강대국들의 권력은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 앞에서 마치 여름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흔적도 없이 흩어집니다. 반면, 인간의 신상을 가루로 만든 그 작은 돌은 거대한 산을 이루어 온 천하에 가득하게 됩니다. 이는 인간 왕국의 폐허 위에 세워질, 영원히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외양과 압도적인 규모에 위축되지 않고, 그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필연적 승리를 확증하는 것이야말로 다니엘이 우리에게 전하는 전략적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이 놀라운 계시와 해석 앞에 세상의 절대 권력자인 느부갓네살은 결국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다니엘의 하나님이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요 만왕의 주"이심을 고백하며 겸손히 엎드립니다. 이후 왕은 다니엘에게 귀한 예물을 선사하고 그를 높여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그의 친구들에게도 중직을 맡겨 합당한 보상을 내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종교'의 정의를 다시금 정립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위안이나 문화적 양식으로 머무는 종교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개인의 내면적 안위에만 국한된다면, 그것은 세상의 수많은 종교적 현상 중 하나로 전락할 뿐입니다. 참된 종교는 세상의 가치관과 권세에 당당히 맞서는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완벽히 습득하여 세상 속에서도 탁월한 전문성을 갖춘 일꾼이었으나, 결코 그 체제에 동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 속에서 실력을 갖추되 소망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두는 거룩한 불일치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 역시 다니엘을 신앙적 모델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최고의 성실함으로 실력을 갈고닦는 것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그러나 그 실력의 목적이 세상 나라의 금신상을 견고히 하는 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오직 창조주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찬송할 때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되며, 하늘의 지혜와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아무리 영원할 것처럼 위세를 떨칠지라도, 우리는 결국 승리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오늘을 인내와 성실로 채워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필요한 지혜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실 것을 신뢰하십시오. 그리하여 이 혼돈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주인공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니엘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현대 신앙인들에게 심오한 영적 자극을 주는 신비로운 예언서이자 역사적 이정표입니다. 이 책의 갈피에는 신비로운 꿈과 환상, 그리고 인류 역사의 종착역을 향한 종말론적 예언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비밀스러운 계시를 풀기 위해 지적 탐구를 거듭해 왔으나,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 견지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태도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 그 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는 오늘날 지혜와 통찰력을 갈구하는 현대인들에게 강렬한 영적 도전을 던집니다. 특히 지식의 축적에 매진하는 청년들에게 다니엘의 명철함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의 탁월함이 단순한 천재성이나 인간적 역량의 산물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보여준 지혜의 근원은 인간의 이성이 아닌, 역사의 주관자로부터 흘러나오는 근본적인 계시의 물줄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거둔 눈부신 세상적 성취의 이면에는 '순전한 믿음'이라는 전략적 토대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대 제국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권좌 곁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했으나,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 화려한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기꺼이 감수한 손해와 고귀한 헌신에 있습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지혜가 세상의 그 어떤 성공적 가치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취의 원인을 개인의 탁월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규정하는 신학적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성공을 위해 신앙을 도구화하는 세속적 종교성을 경계하고,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둘 때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은혜를 목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순전한 신앙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을 통해 그 권위가 더욱 확고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중 종말의 징조를 가르치시며 다니엘의 예언을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특히 "읽는 자는 깨달으라"는 주님의 엄중한 권고는 다니엘서가 인류 역사의 마지막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열쇠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예언의 문자를 해독하라는 지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영적 무게감을 깊이 통찰하고 깨어 있으라는 촉구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친히 강조하신 다니엘의 예언과 그 영적 승리의 비결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압박하는 세상의 거대한 힘이 다니엘을 어떻게 몰아세웠는지 그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유대 왕국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라는 민족적 참극 속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정복지의 인재들을 제국의 부속품으로 길러내기 위한 치밀한 '영재 교육' 정책을 수립했습니다. 왕족과 귀족 출신의 청년들을 선발하여 3년 동안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주입하고, 왕이 직접 하사하는 최고의 진미와 포도주를 제공하며 그들을 제국 체제 속에 안주시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파격적인 특권과 신분 보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신앙의 야성을 거세하고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교묘한 유화책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유혹의 물결 앞에서 청년 다니엘은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키기로 하는 거룩한 결단을 내립니다.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하며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하였습니다.' 당시 왕의 식탁에 오르는 육류와 포도주는 이방 신들에게 먼저 바쳐진 제물이었기에, 이를 수용하는 것은 곧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신앙적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니엘의 결단은 단순한 식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거룩한 절제'이자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명백한 박해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문화적 동화'와 '자기 합리화'라는 소리 없는 유혹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한다"거나 "현실적인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합리화는 신앙의 근간을 서서히 잠식합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은근한 세속화의 유혹에 단호히 맞섬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지켜내야 할 '순전한 구별됨'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마주한 가장 비극적인 현실은 신앙인의 삶이 세상의 방식과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경계'의 상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직업을 선택하고 자녀를 결혼시키며 미래를 설계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세속적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 아닙니까? 부동산의 가치와 학군의 우열에 매몰된 신앙생활은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를 향해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퍼붓게 만드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혼탁한 시대 속에서 다니엘과 같이 마음을 정한 자, 즉 삶의 현장에서 신앙적 차별성을 입증해 내는 '순전한 자녀'를 찾고 계십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구별됨을 입증하기 위해 '열흘'이라는 구체적인 시험의 기간을 제안하며 믿음의 승부를 걸었습니다.
성경적 맥락에서 '열흘'은 신앙의 연단이 갖는 한정된 기간과 그 끝에 예비된 승리를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언급한 서머나 교회의 열흘 동안의 환난이나, 오순절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던 열흘의 시간처럼, 우리가 겪는 시험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종착지가 있습니다. 고통은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감당할 시험밖에는 허락지 않으십니다. 이 '기한이 정해진 연단'을 신뢰할 때 우리는 비로소 현재의 박해를 인내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을 얻게 됩니다. 이 인내의 과정을 통과할 때, 성도는 인간의 시간 속에 유폐된 존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호흡하는 존재로 도약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계시의 시간'입니다.
인간의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는 늘 과거의 회한과 미래의 불안으로 점철되어 우리를 끊임없이 압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Kairos)'가 우리 삶의 지평에 개입할 때, 시간의 주도권은 인간의 불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으로 이동합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했을 때 그의 과거적 상처와 미래적 공포가 소멸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순간 인간의 시간은 영원이라는 광채 아래 함몰되며 근원적인 평강이 깃들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시간의 주인이심을 실존적으로 인정할 때, 우리의 불투명한 내일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주님의 주권적인 인도로 재해석됩니다. 이러한 계시의 시간을 통과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는 영육간의 강건함이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뒤따랐습니다.
열흘의 시험이 끝난 후, 거룩한 절제를 택했던 다니엘과 친구들의 용모는 왕의 진미를 즐긴 청년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윤택하게 빛났습니다. 이는 생물학적 섭취의 결과를 초월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내면의 평강이 육체의 강건함과 탁월함의 근본임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바벨론의 모든 학문과 지혜를 통달하게 하셨고, 특히 다니엘에게는 모든 환상과 꿈을 꿰뚫어 보는 영적 통찰력을 허락하셨습니다. 세상의 학문을 섭렵하되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았던 다니엘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된 삶에는 지성과 영성, 그리고 육체의 강건함이 조화를 이루는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니엘의 삶을 거울삼아, 이 혼탁한 시대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양식이 무엇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뜻을 정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던 다니엘처럼, 우리도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순전한 자녀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다수가 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 위에서 마음을 정한 '한 사람'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부서진 과거를 치유하시고 미지의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삶의 모든 시간을 온전히 의탁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주권 아래 거할 때,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지혜와 영원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역사와 시간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는 다니엘의 결단과 그에게 임한 계시의 시간을 묵상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화려한 유혹과 세속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마음을 정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불안에 떨던 우리의 시간을 주님의 카이로스 안으로 거두어 주시고, 오직 주님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다니엘에게 허락하셨던 그 신령한 지혜와 영육의 강건함을 우리에게도 덧입혀 주시어, 혼탁한 세상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가 지금 요한복음 1장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영원히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다가 때가 되자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참 빛과 생명이신 그분이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어린 아기 시절,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이 되셨고, 마침내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실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처음 나타나신 대목은 바로 그분의 세례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분에게 세례를 주었고, 성령께서는 비둘기의 모습으로 그 위에 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처음으로 하신 일은 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만나신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함께 4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튿날”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특이하게도 “이튿날”이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는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이 얼마나 긴급하고 계획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한 그 이튿날,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 이튿날, 예수님은 안드레와 베드로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튿날”이 바로 그다음 날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이 주님의 계획 가운데 착착 진행된다는 느낌을 줍니다. 또한 다르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루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시고 매일매일을 알차게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비하셨던 일들이 매일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유대 베다니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장소는 유대 지방 남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계시다가 굳이 그곳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유대 지방까지 먼 길을 여행하여 세례를 받으시고 며칠을 지내신 뒤, 이제 다시 북쪽 지방인 갈릴리로 돌아가려 하시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걸어서 다녔으니 며칠이 걸리는 상당한 여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선 그 과정에서 빌립을 만나신 것입니다.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Follow me)”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는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더 자세한 대화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뒷부분에서 빌립이 예수님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더 깊은 대화가 오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주신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빌립은 바로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방식은 대개 이와 같습니다. 길게 설득하지 않으십니다. “나를 따라오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거나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고 권고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호하고 확실하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제자들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능력이 뛰어나거나 대단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모두 뒤로하고, 심지어 생업이나 학업, 가족 등 자신의 삶을 이루던 모든 부분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훌륭한 점입니다. 빌립도 그와 같이 예수님을 따라 첫 제자들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44절에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바로 앞선 본문에서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그 과정이 오늘 본문과 비슷합니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초청했듯이, 오늘 본문에서도 빌립이 나다나엘을 초청합니다. 안드레는 형제인 베드로에게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고,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선뜻 따라나섰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빌립이 나다나엘을 초청합니다.

그들이 모두 갈릴리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 사람들을 우대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다기보다는, 예수님께서는 함께 생활하며 동역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 갈릴리 지방 출신이었고, 예수님께서 첫 사역을 시작하신 곳도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다가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예루살렘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첫 사역은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갈릴리 출신 사람들을 제자로 많이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같이 모두가 아는 중심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멀리하고 멸시하던 ‘갈릴리 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갈릴리 출신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조금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는 지역에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세상적인 조건이나 능력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적으로는 대단치 않게 여겨지고 무언가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 그러한 배경을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주님, 비록 제가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저를 불러주시니 따르겠습니다”라고 응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유, 제가 뭐라고요” 하며 겸손을 표하지만, 실제로는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안 돼요. 저는 그럴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라기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사용하실 수 있고,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빌립처럼 주님을 따르면, 비록 부족한 갈릴리 사람이라도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벳새다, 즉 ‘촌에서 온 사람들’이라 불리던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45절에서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릅니다. 친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초청받았듯, 빌립도 그렇게 합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며, 취미로 할 일도 아니고, 자신의 삶 전체를 드려야 하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온전히 다스리시는 것이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난날의 삶을 그치고 변화되어 새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 자신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빌립은 이 길을 나서면서 ‘누구와 함께 갈까?’ 생각하다가 나다나엘을 찾아간 것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는 굳이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평소 나다나엘이라면 자신과 함께 이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뒷부분을 보면 그 점이 더 명확해지는데, 나다나엘은 평소에도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말하며 기대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역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은 자기가 아는 나다나엘이 그런 사람임을 알았기에, ‘이 친구라면 분명히 나처럼 예수님을 따라나설 거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초청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바돌로매와 동일 인물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의 이름, 나다나엘(Nathanael)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El)은 하나님을, 나단(nathan)은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잠시 언어유희를 섞자면, ‘하나님이 나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영어 이름 시어도어(Theodore)나 여자 이름 도로시(Dorothy)도 같은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물’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가서 예수님을 소개한 말이 이렇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 전체를 요약하는 당시의 관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 또 다른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기록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공의와 자비, 그리고 ‘여호와의 날’이 이 세상에 펼쳐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빌립은 바로 그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율법과 선지자에 기록된 그분이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고 소개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보내주시는 왕이자 구원자를 의미합니다. 안드레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표현한 것을, 빌립은 “율법과 선지자에 기록된 그분을 만났다”고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합니다.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사렛에서 왔다는 말을 듣자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사람들이 그만큼 나사렛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마을 출신이라는 말에, 나다나엘 역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신과 배경, 교육 같은 것이 어느 정도 괜찮아야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는 반문했습니다. 이것이 아마 예수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선입견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대단한 배경을 가진 곳에서 나신 것이 아니라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나다나엘도 그러했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말합니다. “와서 보라(Come and see).” 이 말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오늘 읽지 않은 앞선 본문에서 안드레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제자들도 예수님의 그 말씀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도 똑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것저것 설명하는 것보다 네가 직접 와서 보면 알게 될 거야.”

빌립도, 안드레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고 인도했습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메시아이시다.” “그게 무슨 뜻인데?” “와서 보라.” 이처럼 자기가 체험하고 본 것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사실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가 하는 수많은 봉사, 교육, 선교 등 많은 사역이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조건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오롯이 예수님만을 소개하기를 원합니다. “와서 보십시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고 새 생명을 주시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주시는지 직접 와서 당신의 눈으로, 당신의 삶으로 확인해 보십시오.”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알고, 감사하며, 마음에 만족과 기쁨이 가득한 복된 자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내가 먼저 영접한 예수님이 이렇게 좋은 분입니다”라고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역할은 충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대단히 큰일이라기보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신실하고 정직하게, 정성을 다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며 그 모습을 보여주어, 사람들에게 “와서 보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대단히 좋은 칭찬의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을 처음 만나시는 순간이었지만,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신약성경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정치적, 지리적으로는 유대 땅, 유대인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민족을 일컬을 때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이는 참 이스라엘이다”라는 말은 최고의 칭찬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고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주님의 뜻이 펼쳐질 대상이 바로 이스라엘인데, 이 사람이 바로 그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여기서 ‘간사하다’는 말은 ‘속임수’를 뜻합니다. “그 속에 속이는 것이 없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칭찬을 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마음속에도 사람들을 대할 때 순전하고,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소박하게, 속이지 않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앞뒤가 다르지 않게 대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고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속이는 마음이나 간사함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꼭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사람들을 순전하고 솔직하게 대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환경이나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럴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회생활과 직장 생활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도 모르게 관계가 솔직해지지 못하고 닫힐 때가 많지만, 그렇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야곱의 다른 이름인데, 야곱은 속이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외삼촌과도 속고 속이는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하신 이 말씀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48절에 나다나엘이 묻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처음 만났는데 자신을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나다나엘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께서 그를 보셨다는 것은 분명 그분의 영적인 능력을 보여줍니다. 물리적인 거리상 도저히 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다 보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마 나다나엘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성경 말씀을 가까이했고, 그렇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기를 즐겼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다나엘은 깜짝 놀라 49절에서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는 그 한마디 말씀에 이처럼 뜨겁고 담대한 고백을 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 더 자세한 내용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아가고, 그분의 메시지와 진심, 백성을 향한 뜨거운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온전히 자신의 삶을 드리는 그 메시아의 모습을 보면서, 또한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 제자의 삶에 자신을 헌신하면서 나온 온전한 고백일 것입니다. 이 고백은 그 순간의 고백이었을 수도 있고,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지속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참으로 확실하고 정확한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병을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신 것은, 단순히 랍비(선생님)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서 하신 일입니다.

그분을 처음부터 알아보고 그분의 초청을 받아 첫 번째 제자가 되었으니, 나다나엘과 안드레, 베드로와 빌립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첫 헌신된 친구들이 되어 그분과 함께 생활했던 이분들은 참으로 귀하며, 우리도 그들을 조금이나마 닮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50절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그리고 5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는 ‘아멘, 아멘’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참으로 귀합니다.

먼저, 하늘이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아버지의 품, 그 높은 보좌에서 이 낮은 땅으로 내려오셨기에 하늘은 이미 열렸습니다. 하늘이 닫히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애가에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화목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이 하늘을 여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단순히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장막을 찢었다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본래는 열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 힘으로 찢어 여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셨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할 것이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이라고 칭하십니다. 나다나엘이 말한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왕이라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역설적으로 그분이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 한정하여 “당신은 인간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곧 “당신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참된 모습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사람의 아들, 인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내릴 것이라는 말씀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꿈을 떠올리게 합니다. 외삼촌 집으로 가는 외로운 여정길에서, 앞날이 캄캄했던 청년 야곱은 걱정거리를 안고 돌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그는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아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과 꿈과 인도하심이라는 좋은 선물을 가지고 이 땅의 야곱에게 주기 위해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내린 것입니다. 바로 그 광경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사닥다리가 아니라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이 그 역할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연결되는 우리의 다리가 되시고 사다리가 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인도하려 할 때, “세상에 다른 종교도 많고 철학도 많은데 왜 꼭 예수님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다리요,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아무리 노력하고, 경건과 기도와 선행을 많이 쌓아도 인간의 본성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관계가 되었지만, 이 사이를 이어주시는 유일한 사다리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지금은 다 모르겠지만 앞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사다리이신 자신에 대해 보여주실 것이기에 이와 같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첫 번째 제자들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우리도 이 제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들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부족했지만, 오로지 예수님께 헌신하고 순종함으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순종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알게 되었고, 나아가 그분이 하늘과 연결하는 사다리가 되어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시간 함께 기도할 때,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인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가장 귀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서양에서는 어떤 사람이 새로운 장소에 갔을 때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면 서로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대개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그 사람을 알고 "여러분, 이 사람은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소개해 줍니다. 만약 누가 "나는 누구입니다" 하고 자기 자신을 직접 소개하면 약간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과연 누가 그분을 소개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예수님은 소개가 필요 없으셨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모든 영광과 능력을 보여주시며 "나다" 하고 자신을 드러내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분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들을 보내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탄의 밤에 그랬던 것처럼 천사장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이분이시다" 하고 소개했다면 사람들이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영광스럽고 모두의 눈이 번쩍 뜨이도록 예수님께서 소개되셨다면, 그것은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성품과는 잘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분에게 엄청난 겸손과 낮아지심, 그리고 희생이었습니다. 하늘의 영광과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곁에서 신성을 지니신 그분이 이 땅에 어린 아기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희생입니다. 이처럼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오신 그분은, 요란한 소개가 아니라 오늘도 겸손하면서도 확실한 소개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을 이 땅의 사람들에게 소개하라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본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날이 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날이 곧 올 것이니, 이전의 삶을 돌이키고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표시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씻는다는 의미가 있으며, 이전의 삶은 지나가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진 더 중요하고 큰 임무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친척 관계였기에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을 테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앎을 넘어, 세례 요한이 아직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실지에 대해서는 몰랐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시고, 사람들을 도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며,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 등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는 그 모든 것을 보기 전에 죽게 될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다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를 주실 때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보여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미리 다 보여주시면 속은 시원할지 모르나,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보여주시고 인도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믿고 주님의 손을 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따라 더 보여주시듯,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으로 임합니다. 세례 요한에게도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꼭 필요한 것을 알려주시고, 예수님이 세례받으러 요단강으로 오시면 그에게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29절 말씀을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칩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존귀한 분이 이 땅에 오셨는데, 수많은 동물 가운데 하필 어린 양에 비유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사자처럼 강한 왕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지만, 이때에는 강한 왕의 위엄이 아닌 아주 연약한 어린 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어린 양'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세상에는 사자나 늑대처럼 험악하고 무서운 짐승들이 많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도 실제로 그런 짐승들이 양들을 잡아먹었으니 얼마나 위험했겠습니까? 이 세상은 참으로 위험한 곳입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라는 옛말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해치며 이 세상을 힘들고 위험하게 만듭니다. 이 험악한 세상 한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 갓난아기로 아무런 보호 없이 구유에 누워 오신 것입니다.
이 어린 양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믿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을 믿는다고 답합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가진 신에 대한 개념이 있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때, 무서운 사자가 아니라 연약한 어린 양으로 이 위험한 인간들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한 자와 함께 계시는, 약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약한 사람들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택하셨을 때도, 그 나라는 주변의 바빌론, 페르시아, 이집트와 같은 크고 강한 나라들 사이에서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돌보십니다.
이 말이 우리가 일부러 약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능력이 있는데도 굳이 사용하지 않고 약해지는 것은 나태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실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사용하여 성실히 일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약함이란, 내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악함과 죄악, 사회의 모순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약한 자로서 고통받고 있으며,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못하거나 외면합니다. 결국 사람이 경영하는 세상은 강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고, 그 과정에서 소외된 약자들은 고통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약한 자들과 함께 계시며, 그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세상의 강한 왕이나 장군이 아니라, 아무 볼품없는 어린 양으로 오셔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할 것 없이 보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범죄자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가장 끔찍한 처형 방식인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에는 진짜 죄인들이 있었고 그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채찍질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통과 수치를 당하실 때,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또 한 명의 범죄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이 얼마나 큰 모욕입니까? 우리는 누가 조금 안 좋은 소리만 해도 속상해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우리의 친구가 되기 위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아주기는커녕 범죄자 취급을 하며 온갖 억울한 죄를 뒤집어씌우고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 자체가 이미 이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심판(judgment)'이라는 말이나 '정죄(condemnation)'라는 말은 굉장히 무겁게 다가오지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정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어린 양들을 돌보지 않고 늑대처럼 서로 싸우고 잡아먹는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지를 판단하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로 오신 크리스마스의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벌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31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찾아오셔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을 이스라엘에 소개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다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도 더 자세히 나옵니다. 그전까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시며 숨어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위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소개되는 장면이 바로 그분의 세례였습니다. 보통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이지만,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죄, 곧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거리낌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은 죄 가운데 있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수많은 모순과 고통 가운데 있으며, 크게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고 작게는 각 개인의 마음에 어려움과 염려,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믿는다 하면서도 온전히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 우리의 죄는 우리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고, 죄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들의 형벌을 대신 지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받고 올라오시는 참 인간 예수님의 모습, 그것이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에 소개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32절에서 요한은 또 증언합니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이 모습을 다른 사람들도 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단순한 능력이나 기운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격으로서 완전한 인격이십니다. 그 성령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온 세상을 운행하시고 생명을 주시며, 특별히 이 시간에는 예수님이 세례받고 올라오실 때 그분 위에 온전히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홍수가 끝났을 때 노아가 보냈던 비둘기는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기적, 치유는 성령님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이는 그분이 온전히 하나님 안에서 행하심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그 아버지께 순종하신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세례받으시며, 그 위로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이 자리에 온전히 함께 임재하십니다. 우리가 올 한 해 그리스도 교회의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 알기를 원하고 표어처럼 듣고 가르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데, 이 삼위일체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서 오늘 다루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에만 있는 고유한 믿음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신에 대한 믿음은 있을 수 있지만, 삼위에 대해 말하는 믿음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으며, 성령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오늘 주보에도 여러분이 참조하시면 좋겠지만, 순서는 흔히 아버지, 아들, 성령님으로 말해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은 사실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우리가 가진 개념이나 선입견으로 아는 하나님은 불완전하며 온전히 의지할 수 없습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무엇보다 고통받는 자녀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분입니다.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당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셔서, 부활을 통해 새 생명과 새로운 세상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고 누구나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거기에 더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고 안 믿고를 결정하는 내 의지나 판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불행하게 살거나, 혹은 운 좋게 고통을 피했더라도 그런 어려움을 외면하며 살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사실 앞에 나아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조차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인격으로 계시는 이 하나님은 그러나 세 분이 아니라 '하나'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한 분(one person)'이시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 틀립니다. 왜냐하면 '한 분'이라는 것은 숫자 '원(one)'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숫자 하나가 의미하는 단일성이나 고립성을 뜻하는 '한 분'이 아니라 '하나(one-ness)'이십니다. 즉, 세 위격이시면서 완전한 하나이십니다. 세 분 위에 더 높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도, 세 부분이 합쳐져 한 하나님이 되는 것도 아닌, 이것은 온전한 신비입니다. 철학적인 헬라어는 이런 개념을 매우 또렷하게 구분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알려주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저 믿을 뿐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 사랑을 세상에 가지고 오신 예수님은 지금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오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과 연결되도록 도우시는 성령님. 이 모든 귀한 은혜를 인간의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하는 말이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없지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교회가 잘 정리한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험 보듯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풍부한 의미를 날마다 누리며 하나님 자녀로서 복되게 살도록 주신 교회의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끝으로 34절입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세례 요한의 역할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 물론 그 뒤에도 계속 사역하며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그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키고, 소개하며, 증언하는 것. 심지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일조차도 이 첫 번째 임무에 비하면 두 번째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할 일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네발트의 유명한 그림을 보면, 참혹한 모습의 십자가 곁에 슬퍼하는 마리아와 다른 편에는 어린 양이 있고, 한쪽 구석에 있는 세례 요한은 손가락으로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일입니다. "저분을 보아라. 저분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저분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시다." 우리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증언하며, 이를 위해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봉사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분이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뜻을 우리 모두 힘을 합하여 이루어 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듣는 교회,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그저 듣고 자신만 알고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 듣고 전하기 위함입니다.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가르치라’는 이 명령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당부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명에 충실하고자 우리는 스스로를 ‘가르치는 모임’이라는 의미의 ‘교회(敎會)’라 칭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Church’라는 단어는 주님을 뜻하는 헬라어 ‘퀴리오스(Kyrios)’에서 유래했다고들 하지만, 우리말 ‘교회’는 가르치는 모임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었는데, 이는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교회의 본분에서 가르치는 것은 본래 중요한 사명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가르칠까요? 교회는 학교와는 다릅니다. 학교는 학문과 기술을 가르쳐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곳이지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많이 연구하고 탐구해도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개미가 아무리 연구해도 사람이 사용하는 컴퓨터를 이해할 수 없듯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결코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셔야 우리가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전했고, 우리는 그 전승을 이어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전해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배우며, 또 전하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분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가 교단과 민족이 다를지라도 본래적으로 한 몸인 이유는, 모든 교회가 한 분 하나님, 그분의 계시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기에 본질적으로 모두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기 혼자 연구해서 교회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결국 모두 연결된 한 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이 오늘 본문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구절은 성경의 수많은 귀한 말씀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을 잘 표현하는 대목입니다. 특별히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점, 곧 성육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말씀은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말씀으로 온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어린 아기로 태어나 성장하시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사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 줍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귀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귀한 선물이며, 사람이 하는 말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람이 하는 말은 틀릴 수도, 잘못될 수도,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람은 말을 하고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잊어버리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말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그 안에는 틀리거나 헛되거나 거짓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진리의 말씀이기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헛되이 말씀하시거나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55장에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말씀은 그저 한 번 들리고 사라지는 소리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는 말씀이 곧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인격이심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성경은 단순히 종이 위의 글자나 단어, 문장의 집합이 아닙니다. 성경책을 덮어두고 펼치지 않는다면 그저 종이와 잉크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펼쳐 읽어야 합니다. 속으로 읽든 소리 내어 읽든,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인격이 우리와 교통하십니다.
말씀은 인격이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말씀 가운데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말씀을 읽는 것 같지만, 어느새 말씀이 나를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주어가 되어 말씀을 대하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말씀이 주어가 되고 나는 그 대상이 됩니다. 말씀이 나를 보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은 다른 어떤 책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책이기에, 읽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과 계속해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2,000년, 3,0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나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말씀’에는 두 가지 다른 헬라어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로고스(Logos)’로, 요한복음 1장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 쓰인 단어입니다. ‘로고스’는 논리(logic)의 어원이기도 하며, 말의 의미, 뜻, 생각, 대화, 심지어 토론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합니다. 이는 사람의 생각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밝혀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많은 학문의 이름에 ‘로고스’가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생물학(Biology)은 문자 그대로 ‘생명의 말씀’이며, 심리학(Psychology)은 ‘영혼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또 다른 단어는 ‘레마(Rhema)’입니다. ‘레마’는 문자 그대로 ‘말해진 것’, 곧 육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로고스’로서의 말씀을 우리가 읽을 때, 그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육성, 곧 ‘레마’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람이 살 것이라 하실 때의 그 말씀이 바로 이 ‘레마’입니다. 사람의 말은 공기의 떨림으로 귀에 들어왔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레마’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영혼의 양식이 되어 우리를 살찌우며, 건강과 새 생명을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 곧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정점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최고의 ‘말씀(Logos)’이신 성자 예수께서 친히 육신이 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성육신을 통해 비로소 모든 하늘의 비밀이 우리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 이것을 교회는 가르칩니다.
교회가 성경과 오늘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비롯한 수많은 것을 가르치지만, 그 가르침의 핵심이자 다른 모든 것이 파생되는 근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정의와 같은 모든 진리는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심’, 곧 성육신에서 비롯됩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때로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보이셨습니다. 비록 ‘예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지는 않으셨지만, 메시아에 대한 말씀이 주어졌고 사람들은 때때로 그분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때가 차매, 성탄의 날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본래 온전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그 신성을 포기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신성을 버리고 완전한 인간만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이 되셨을 때에도 신으로서의 영광과 능력을 동일하게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지니신 신성을 계속해서 보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로 구유에 누워 계실 때나, 이 땅에서 성장하시는 모든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신성의 모든 영광과 능력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지금 원하면 하늘의 천사를 부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성을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갖고 계시면서도 사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는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사람들을 온전히 섬기기 위함이었고, 끝까지 종의 모습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위함이었으며, 십자가 고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신성을 조금도 잃지 않으신 참 하나님으로서, 거기에 더하여 완전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 안에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모두 지니신,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신 것,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비밀입니다.
성육신은 다른 어떤 종교나 사상, 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성경에만 있는 비밀이며 우리에게 알려진 진리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귀한 피조물이요, 창조의 정점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귀함과 천함, 강함과 약함이 나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인간이 이토록 귀한 이유는 다른 능력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친히 되기를 원하셨던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만큼 더 놀라운 일이 우주와 역사 가운데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인간의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어찌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연약하고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행하셨기에 참으로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만 머무는 능력이 아니라, 그 테두리를 넘어 친히 인간이 되시는 능력입니다. 약해지실 수도 있는 하나님, 인간만큼 연약해지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수 있는 하나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놀라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참된 의미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연약해지고 겸손해져서 십자가까지 질 수 있을 만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실 수 있을 만큼 전능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함이 우리 인간의 능력보다 강하며, 그분의 능력은 은혜 가운데서 온전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연약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내가 부족하게 느껴지거나 주위 상황이 힘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육신의 가시로 고통받는 약함 속에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연약한 인간이 되셔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형벌과 저주를 대신 십자가에서 지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비밀이며, 이제 우리에게는 환히 드러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에게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희고 환한 모습으로 변모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찬란히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참된 영광은 그런 놀라운 능력의 발현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성을 고스란히 지니신 채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유에 누우신 모습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스터리(mystery)입니다. 성경에서 미스터리, 즉 신비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행하는 성례, 특히 성찬이 바로 미스터리입니다. 믿음 없이 보면 떡과 포도주는 그저 평범한 음식에 불과하지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안에 얼마나 큰 은혜가 있는지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저 보아서는 모르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계시의 비밀을 알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우신 그 연약한 아기의 모습이 얼마나 위대한 영광인지 깨닫고 감탄하며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탄의 밤,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찬양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와 그분의 은혜가 그의 삶 가운데 충만했습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의 태양조차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데, 수많은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 곧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주시옵소서”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신성과 능력을 육체를 통해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진리요, 비밀이요, 계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전해 받아서 배웠으며, 또한 이것을 전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교회’라고 할 때, 성경과 선교를 포함한 많은 것을 가르치지만 그 가운데 핵심은 바로 이것,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독생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 이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로마 등 주요 도시로 퍼져나갔습니다. 교회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처음부터 분명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신약성경의 초기 서신인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기록하고,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의 말씀처럼 “그는 세세에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 고백했듯이,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은 초대 교회부터 명확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사실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확증한 회의가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입니다. 당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교회 내에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로 믿는 신앙과, 그분을 하나님이 아닌, 천사장 미가엘과 같은 가장 높은 피조물로 보는 견해가 공존하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전 로마 제국 각 지역의 주교들이 오늘날 터키의 니케아에 모여 ‘예수는 누구신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논의했습니다. 핍박 속에서 순교까지 하며 믿고 고백하는 그분이 과연 누구신가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혹자는 이 회의를 두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술적으로는 주교들이 모여 표결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차원의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는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사도 시대부터 교회가 믿어온 신앙이 무엇인지를 함께 확인하고 확증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는 새로운 것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전해 내려온 신앙에 공식적인 도장을 찍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300여 명의 주교가 모였을 때, 대다수는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했으며, 처음에는 약 17명 정도가 다른 의견을 가졌으나 논의를 거쳐 대부분 동의했고, 최종적으로 니케아 신조가 선포되었을 때 끝까지 반대한 사람은 두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결정이 아니라,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초대 교회부터 이어져 온 신앙의 발자취를 확증한 것이며, 이것이 교회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훌륭한 인간이나 삶의 본보기로만 믿고 따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 교회의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교리적인 OX 문제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은, 그분이 나의 모든 삶과 생명과 계획을 다 드릴 만큼 절대적인 분이라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나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으며, 나의 주님, 창조주, 구원자, 하나님이시기에 내 삶을 온전히 그분께 헌신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지식적인 동의를 넘어, 나의 삶 전체를 드리는 헌신의 표현이 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다’라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그분을 본받아 닮아가려 헌신하고,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교회’란 무엇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믿고 가르치며, 그분을 본받아 살기를 원하는 헌신된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올 한 해, 우리는 ‘듣는 교회’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그것을 힘써 ‘가르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바탕으로 삼고, 그 말씀을 믿으며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특별히 기억하고 힘쓸 표어는 ‘듣는 교회,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듣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가 맡은 여러 사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주제인 ‘듣는 교회’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시고 수많은 사람을 도우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상한 마음을 치유하셨으며, 마침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이 땅에 첫 번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맨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그리스도인들은 늘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과연 이분이 누구시기에 우리에게 이토록 엄청난 영향을 끼치시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은 분명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시며, 메시아이시다.’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분으로 우리의 주님이요 왕이 되셔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특별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님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셔서 하나님의 일을 행한 인물은 구약 성경에도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그러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분의 능력을 보여준 귀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 중 한 분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그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말씀의 권위가 모세를 능가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는 안식일을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아파 오랜 세월 고통받는 사람을 보시고는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며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라는 율법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며, 율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시며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에는, 그분이 모세나 엘리야를 뛰어넘는 특별한 분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모세나 엘리야에게도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고 특별한 분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를 무덤에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옳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과 행동이 참으로 하나님의 일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고 그의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여야 할 성전이 돈을 바꾸고 제물을 파는 장사하는 곳처럼 변질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시며 상을 모두 뒤엎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달려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성전이 잘못되었으니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는 그분의 말씀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 곧 죽음에서 살아나시는 것을 보며 첫 그리스도인들은 “그는 참으로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으로 충분했을까요? 첫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며 부활하신 분이라는 고백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더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그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한 사건을 넘어, ‘나를 살려주시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놀라운 지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것이 그분 자신의 영광일 뿐 아니라, 바로 ‘나’를 살리시는 사건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께서 살아나셨으므로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선포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설명으로 이해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우리의 죄 사함으로 이어지는지 설명하지 않고, 다만 선포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외쳤고, 살아나신 예수님 안에서 죄가 용서받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고백은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억제할 수 없는 신앙의 고백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이 놀라운 고백에서 기독교는 출발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자체를 넘어 나를 구원하고 내 죄를 용서하는 사건이며, 그로 인해 나의 지난 모든 죄는 씻음 받고 하나님과 나는 화해하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이 신앙 고백이 첫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고백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나의 주님, 나의 그리스도, 살아나신 분이시며, 그의 부활이 나를 살리고 나의 죄를 용서하며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 고백의 바탕입니다.
이 고백 위에서 우리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진정 누구신가?’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가운데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고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이 점차 성숙해 가는 과정이 신약성경에 담겨 있으며, 그 결정적인 고백이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에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마침내 이 결정적인 선언으로 무르익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초부터 계신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순히 한 예언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마침내 보내신 그 거대한 역사의 성취임을 밝혀줍니다. 창세기 1장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문법적인 세부 사항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천지 창조 기사의 핵심 동사는 ‘창조하시니라’가 아니라 ‘말씀하시니라’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으며, 이는 그분의 주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은 단순히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을 뜻합니다. 구약의 관점에서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다름 아닌 ‘하늘 군대’였습니다.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시면, 그 하늘 군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장엄한 이미지를 통해 그분의 왕권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말씀의 주권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그분의 뜻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비밀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위격(person)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태초부터 계셨으며,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2절과 3절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증언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 또한 창조주가 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아들을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분은 만물을 유업으로 받으시기 위해 이 땅에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4절과 5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은 빛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빛이 필요 없으시지만,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기 위해, 즉 계시하시기 위해 먼저 빛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 또한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고백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창조주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알려주는 비밀은 그 빛이 단순한 계시의 빛일 뿐 아니라 생명이요 인격이라는 점입니다. 그분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우리는 그분이 누구시며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분이 주시는 참 생명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끝이 있고 허무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참 생명은 우리에게 주어져 영원히 살게 하는 영광스러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생명의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고,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때 6절과 7절은 세례 요한을 소개하며 교회의 사명을 밝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교회의 사명은 바로 이 빛, 이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들어야 합니다. ‘듣는 교회, 가르치는 교회’가 교회의 본분입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목사는 전하고 성도는 듣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교인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하며, 또한 배운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찬양, 설교와 간증, 전도와 선행 등 모든 것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내 생각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반드시 먼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은 인간의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말이기에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엄연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늘 조심하고 겸손해야 하며, 지금 우리가 교회로서 전하는 모든 말이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건강하게 비판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오류를 겪었습니다. 좋은 뜻으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결국 인간의 생각이 앞서면서 나도 모르게 잘못된 길로 빠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서방 가톨릭교회는 하나님 말씀에서 심각하게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말씀보다 전통과 권위를 앞세우고, 설교보다 성례를 강조하면서 말씀이 밀려났기에 개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지난 지금, 개신교 역시 가톨릭을 향해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개신교는 히틀러가 등장했을 때 그를 지지하는 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루터의 나라 독일에서, 과학과 철학에 대한 인간적인 자부심이 지나쳐 자유주의 신학으로 빠지면서 하나님 말씀을 뒷전으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히틀러를 하나님이 보낸 지도자라는 주장에 동조하거나 침묵으로 동의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면 교회는 언제든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전통과 배경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말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점검하고 비평하며 바로잡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하는 말들이 성경 말씀에 합당한지 늘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좁은 길이기에, 조금만 방심하면 넓은 길로 빠져버리기 쉽습니다. 늘 말씀에 비추어 치우치지 않도록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이 바로잡는 일은 누가 해야 합니까? 목사나 신학 교수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도들이, 평신도들이 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목회자와 신학자들도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에 그저 ‘아멘’으로만 화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신뢰와 순종은 기본이지만, 동시에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개교회뿐 아니라, 세상 속 모든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성경 말씀에 합당한지를 늘 점검하고 시험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교회의 잘못을 제어할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책임이 이토록 막중합니다.
이 일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하며, 성령님과 동행하십시오. 설교를 들을 때 목회자를 신뢰하고 함께 교회를 세워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말씀에 불순물이 섞이지 않았는지 늘 깨어서 점검해 주십시오. 그리고 교회가 바른길로 가도록 여러분의 힘을 모아주십시오. 어느 교회에 가시든지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모임이기에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사명을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듣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이 사명에 충성하여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 공동체로 함께 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55장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부터 55장까지는 하나님이 특별히 위로와 평화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대목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일차적인 대상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도성은 불탔으며,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먼 나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황폐해지고 낙담해 있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이제는 힘을 내고 위로를 받아 다시 믿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격려하시는 부분이 바로 이사야 40장에서 55장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그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너무나 귀한 초청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오라’고 부르시는 말씀인데,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 없이, 필요한 것 없이 그냥 오라고 하십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그런 초청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1절 말씀을 보시면 ‘오라’는 감탄사로 시작합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아뢰기 전에, 어떤 날은 감탄사가 먼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오, 주여!”,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부르는 행위를 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오라.” 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가 나올 때는 분위기가 좋기보다는 안 좋을 때가 많습니다. 이 말의 뜻은 ‘아이고’에 가깝습니다. ‘어쩌나, 세상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 자녀들을 보시고 무언가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아이고야’ 하는 느낌이 드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백성들의 현실이 어떠한지 이사야 1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멍투성이인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두들겨 맞아서 멍들고 터지고 상처 입은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영적으로 그러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사실 잘 살고 있었고, 물질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서 괜찮아 보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는 죄악이 너무 많아서 세상으로부터, 원수 마귀로부터, 또 자기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어쩌나’ 하는 마음을 가지신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요, 자녀요, 기르시는 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보시는데 그렇게 상처투성이로 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세상에,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이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르십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우리 모두 목말라 본 경험이 있습니다. 목이 타는 듯할 때 얼마나 간절히 물을 원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실제로 물이 없어 목마른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간절하고 애타게 불러본 적이 있으십니까? 무언가 힘들 때 더욱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 “주여!” 하며 정말 간절하게 매달리듯이 기도하는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애타게, 목마른 자처럼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 사실 평소에도, 별일 없이 잘 지낼 때에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하지만, 우리는 대개 힘들 때 그러기가 쉽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어쩔 줄 모를 때 주님만 붙들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목마른 자가 되어 간절히 주님께 매달립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때로는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힘들고 어렵다고만 생각하기보다, ‘아, 이것이 하나님께 내가 목마른 자처럼 간절히 매달리라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고 주시는 기회이구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 종이 되었습니다. 먼 나라에 가서 이방 민족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 50년이 지나 마침내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본향으로 돌아와도 독립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종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같은 책을 보면,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우고 성전을 짓지만 여전히 페르시아 사람들의 종노릇을 합니다. 그들은 “주여,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섬기던 이 땅, 이 복 받은 귀한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그 심정을 상상해 보면 너무나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종이 되어 나뿐만 아니라 내 자녀들도 종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메이겠습니까? 그 괴로운 마음 가운데 하나님만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약속하신 대로 이제는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 우리와 우리 조상들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지만, 이제는 이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치유하여 주시고, 다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해 주소서.” 그 간절한 기도가 이 백성들의 ‘목마른 자’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하나님이 모든 이들을 초청하십니다. 그 모든 사정을 아시고 “너희가 목마르구나, 너희가 이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구나. 나오너라, 물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이 대목에 자꾸 나오는 동사가 ‘오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돈 없는 자도 오라.” 이 세상은 돈이 없으면 환영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도, 자격이 없어도, 내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 부족하고 형편없는 한심한 사람일지라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누구나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와서 사 먹되.” 히브리 원어로 읽어보면 동사 하나하나가 굉장히 강조되는 느낌을 받는데, 이 대목이 그렇습니다. 원래 느낌은 ‘너희는 와라! 사라! 먹어라!’처럼 하나님께서 한 단어 한 단어마다 힘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와라.” 하나님께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갈 때 막지 않으십니다. ‘오지 마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와라, 누구나 와라.” 혹시라도 마음이 힘들어 오지 못할까 봐 자꾸 반복하십니다. “괜찮아, 와라. 나는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다. 비록 과거에 그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괜찮으니 와라.”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잘 가지 않으니, 하나님은 심지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오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오십니다. 그날이 바로 성탄입니다. 우리가 그날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지내고 있는데, 우리가 부족하고 무지해서 하나님께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또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간절히 찾으시는 것도 몰라서 나아가지 않으니 하나님이 그냥 짐을 싸서 우리 곁에 오시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우리 곁에 친히 오셔서 함께 계시는 것이지요.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가까이하기 원하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오라’는 그 말씀을 믿고 주님 앞에 가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환영하시고 안아주십니다. 돌아온 탕자를 안아주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안아주시고 환영해 주십니다.

“너희는 와서 사되… 먹어라.” 하나님은 “사라”고 명령하십니다. 앞서 돈 없이, 값없이 괜찮다고 하셨는데 왜 다시 사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모든 은혜와 구원은 사실 너무나 값진 것이기에 당연히 대가가 치러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며 와서 사라고 하시는 것은, 이것이 공짜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목숨 값으로 이미 그 대가가 온전히 치러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우리가 내야 할 돈까지 대신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 값은 바로 예수님의 목숨과 피와 모든 사랑입니다. 온 천하를 다 주어도 사지 못할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대신 값을 치러주셨기에, 우리는 그 값으로, 즉 예수님의 목숨 값과 그 사랑으로 지불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먹어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지으시고 첫 명령으로 주신 것이 ‘먹어라’였습니다. 모든 풀과 과일을 먹고 우리 자신이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의 생명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먹어야 하고 육신으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 매일 먹을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건강을 위해, 살기 위해 먹는 생존의 차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히 여기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 한 식사 장면이 나옵니다. 아주 나쁜 귀족 돈 조반니가 좋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을 때, 옆에서 시중드는 하인 레포렐로는 침을 흘리며 배고파합니다.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하인은 주인에게 바쳐야 할 닭고기 같은 것을 몰래 먹습니다. 주인이 그것을 눈치채고는 짓궂게 놀립니다. 입안에 음식이 가득한 하인에게 자꾸 말을 시키니, 하인은 우물쭈물하며 당황합니다.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그렇게 먹는 것은 단지 육신을 위한 것일 뿐, 자존감에 큰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먹어라’고 초청하시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살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귀한 생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 귀한 생명을 돌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또 서로 먹여주어야 합니다. 그만큼 먹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셔서 “와서 값을 치르고 사서 먹되, 너희 자신이 이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새기면서 자기 자신과 이웃을 돌보고 함께 먹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포도주는 기쁨입니다. 단지 음료일 뿐 아니라 기쁨을 상징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은 감정이기에 보통 명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은 명령할 수 있고, 속마음으로는 싫어도 억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터치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포도주와 젖을 사라”, 즉 기뻐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미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실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기쁩니까? 비록 몸은 종살이하고, 고단한 세상에서 삶의 짐을 지고 가느라 힘들지 몰라도, 우리 가장 깊은 곳에서는 기뻐합니다. 물론 힘든 일이 있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시편 기도가 “구원의 기쁨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처럼, 비록 이 세상에 기뻐할 일이 없어 보일지라도 다시금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지. 하나님은 누구신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지.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고, 내가 장차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갈 사람이라는 것, 나에게는 영원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 하나님과 함께 누릴 영생의 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영광에 비하면 지금 이 땅에서 조금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정말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만히 상상해보려 해도, 내가 나중에 정말 하나님 앞에서,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 어떤 삶일지, 어떤 존재가 될지 상상이 잘 안 됩니다. 그저 말도 못 할 만큼 기막히게 좋을 것이고, 너무 좋아서 감격한 나머지 말로 표현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밖에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을 우리는 받아서 누리는 사람입니다. 본질적으로 크리스천은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슬픈 사람들을 돌보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크게 요란하지 않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잔잔하지만 충만하게, 하나님 주시는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시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즉 빵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여기서 ‘은을 달아 준다’는 것은 저울에 은을 달아 대가를 치른다는 뜻입니다. 은은 예나 지금이나 돈입니다. 기껏 돈을 지불하고 무언가를 샀는데, 양식이 아닌 것입니다. 속은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대단해 보이고 화려하며, 사람들도 다 원하기에 귀한 은을 주고 샀는데, 막상 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유익도, 기쁨도 되지 못하는 것에 허비한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은이 너무 많아 땅의 돌과 같았다고 하지만, 그 많은 은을 다 허비하고 이제는 종으로 사는 것이 이 백성들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그럴 때가 많이 있지만, 다시금 ‘하나님, 나를 도와주셔서 분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나에게 꼭 필요한 것, 나의 생명, 나의 영과 육, 나의 모든 것을 위해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위해 나의 은을 달아주어야지, 그렇지 않고 필요 없는 것에 허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여러분, 우리는 수고를 많이 합니다. 애써서 날마다 일하고 신경을 많이 쓰는데, 그렇게 기껏 수고했는데도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니까 나도 따라서 했는데, 수고만 많이 했지 남는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 나를 도와주셔서 이 귀한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을 나의 생명과 이웃의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한 데에 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 바랍니다.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예전 성경에는 ‘청종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반복하시는 동사는 ‘들으라’입니다. 아까는 ‘오라’를 반복하셨고, 이제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그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받고, 무엇이 하나님 앞에 참된 길인지, 정말로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는 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예전 번역에는 ‘너희 마음’이라고 했는데, ‘나 자신’을 뜻합니다. 다음 절의 ‘영혼’과 같은 단어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님께서 주시는 귀한 양식, 그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나아와 들으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그리하면 나의 마음과 영혼이 살아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이 자기는 좋은 궁전에 살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는 텐트에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주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너는 아니고 네 아들 때에 지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다윗의 집이 영원히 하나님 앞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됩니다. 비록 다윗 왕국은 망했지만,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 영원한 왕이 되심으로 비로소 완전히 성취된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은혜’에서 ‘확실하다’는 말은 ‘아멘’입니다. 우리가 ‘아멘’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그대로 되소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멘’ 하시면 얼마나 확실하겠습니까? 그 확실한 은혜는 다윗에게 허락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님, 다윗의 자손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원문의 뜻에 가깝게 번역하면, “주님께서 찾아지실 때에 찾아라”입니다. 우리가 찾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지신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늘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부르거나 가까이 가려면, 짐승 희생 제물을 가지고 성전으로 가야 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이 쳐들어와 성전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부르고 싶어도 그것이 늘 허락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언약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는 말씀처럼, 지금은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지십니다. 숨으려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어디 계세요?” 하고 찾으면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영원히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주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늘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고, 성령님이 아예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응답하여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나의 죄나 죄책감을 주님 앞에 회개하고 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부르면 주님은 응답하시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은 벌써 거기에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하신 귀한 초청의 말씀과 그 은혜,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가능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생각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말씀에도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다 어렵고, 두려워하고 염려하게 하는 일들이 바깥에 있을지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입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나의 힘이 되시면, 주위에서 나를 괴롭히던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될 것입니다. 겉으로만 큰소리쳤지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면 다 도망갈 것들이 괜히 우리에게 겁만 주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나의 생각이 주님 앞에 똑바로 서 있으면,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서지 못하리라”는 이사야의 말씀처럼, 믿지 않으면 우리는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이 나를 뜨겁게 사랑하시고 늘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이 세상에 환난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더 강하시고 능력이 많으시며, 전능하신 분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셔서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니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자비롭게 여기십니다.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그분과 멀리 느껴졌더라도,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있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낙담하지 말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누구나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아시기에 주님은 더욱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청종하면, 귀를 기울여 듣고 또 들으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시는 이 귀한 초청의 말씀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에는 올라프라는 특별한 눈사람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엘사는 눈과 얼음을 다루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는데, 어릴 적 여동생 안나와 놀며 눈사람을 만들어 줍니다. 동생 안나는 그 눈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사랑을 표현합니다. 훗날 성인이 된 엘사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기로 결심하며 가장 먼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그 눈사람, 올라프를 다시 만들어냅니다. 올라프는 사람처럼 말하고 춤추는 신기한 존재이지만,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의 본질과 모순되는 것을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차가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여름과 햇볕을 무엇보다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 동생 안나가 자신을 안아주었던 그 따뜻한 사랑의 기억 때문입니다. 그는 "안아주는 게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며 따뜻함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눈과 얼음이기에,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따뜻함은 곧 그의 존재를 녹여 없애버릴 것입니다. 이처럼 올라프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거대한 모순 가운데 놓여 혼란과 어려움을 겪는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올라프처럼, 자신의 존재가 깊은 모순에 빠져 고통을 외치는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49장 14절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 시온의 절망적인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셨다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이 고백은 그 자체로 깊은 모순을 담고 있습니다. '시온'은 단순히 예루살렘이라는 지리적 도시를 넘어,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당신의 백성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며 그의 왕위와 도성이 영원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딸 시온아'라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신실한 약속이 이미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히 선하시기에 당신의 언약을 결코 잊거나 버리실 수 없습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시온의 현실은 달랐습니다. 적들에게 도시가 파괴되고, 성전은 불탔으며,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50년 이상이 지났습니다. 바벨론에서 2세, 3세가 태어나는 절망적인 세월 속에서,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의 '머리'와 '가슴' 사이의 갈등과 같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알지만, 가슴으로는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은 의인이었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나를 잊으셨는가"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지만,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고통의 외침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깊은 절망감 속에서 버림받았다고 외치는 당신의 자녀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절망적인 외침에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며 직접 답하십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가장 본능적이고 강력한 사랑의 비유를 드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마치 어머니처럼, 당신의 태에서 낳고 젖 먹여 기른 자식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에서 '긍휼'이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태(모태)'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이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배 아파하고 온몸을 쏟아붓는 것과 같은 깊고 본능적인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설령 세상의 어머니가 혹시라도 자식을 잊는 일이 있을지라도, 당신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어떤 약속보다 더 강력하고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손바닥'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복수형으로, 당신의 양손 모두에 우리를 새기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펜으로 이름을 쓰는 행위가 아닙니다. '새기다'는 것은 정과 망치로 돌에 글자를 파내듯, 고통을 동반하여 영원히 그 상처와 자국이 남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손에 우리의 이름을 새기심으로써, 당신께서 손을 사용하여 어떤 일을 하시든지, 세상을 향해 어떤 역사를 펼치시든지 간에 항상 우리를 보고 기억하실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이 육체적인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우리가 영원히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선언입니다.
성경, 특히 구약에는 하나님을 인간의 신체 부위를 통해 묘사하는 표현(신인동형론)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눈'과 '귀'는 모든 것을 보고 들으심을, '팔'은 그분의 능력을, '코'는 그분의 진노를, 그리고 '손가락'은 창조의 섬세한 솜씨를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의 '손바닥' 역시 그러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살면서, 그곳의 수많은 우상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번역가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타르굼)로 번역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눈, 코, 입이 있는 물질적인 우상처럼 오해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꾸는 등 신인동형론적 표현을 수정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진실을 동시에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며 우리는 그분을 인간적인 한계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무한히 높으시며,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예를 들어, 이미 결과가 나온 면접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는 우리의 기도가 이미 그분의 영원한 계획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시간 속에서 할 바를 다할 뿐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손바닥'과 같은 인간적인 표현을 사용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문맥 안에서는 그 단어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가장 정확하고 강력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람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경계하면서도, 성경이 선택한 이 표현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바닥에 우리를 새기셨다는 이사야의 예언은 궁극적으로 한 분을 통해 성취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그 영원한 상처와 자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박힌 못 자국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 못 자국 난 손을 보여주시며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영원하신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그 못 자국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흔적입니다. 우리가 훗날 주님을 뵈올 때, 그 손과 발의 못 자국을 통해 우리를 향한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을 알아볼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그분의 몸에 직접 새겨진 영원한 증거입니다.
이사야 49장 6절은 이 사랑이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훗날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며, 이방인을 향한 자신의 사역이 이 예언의 성취임을 밝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언약 백성을 넘어 온 세상, 땅 끝에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구원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손바닥에 새겨진 사랑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삶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거나 잊으셨다고 느껴질 때, 우리를 당신의 양손에 새기신 그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사, 그 몸에 영원한 사랑의 증거인 못 자국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확고한 사랑 안에서 참된 위로와 평안을 얻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과 감사로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