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1997년에 나왔습니다. 저는 그때 뉴욕에 있었는데 학교 사람들이랑 같이 보러 갔다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일행이 흩어져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 보면 여자 주인공이 나오고 그녀의 약혼남이 나옵니다. 이 약혼남은 굉장히 돈도 많고 거만하고 다른 사람들 무시하는 아주 비호감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그 배가 침몰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분명 보트가 모자라요. 그래서 다 탈 수가 없는데 이 약혼남이 배의 승무원에게 많은 돈을 건네면서 나를 구명 보트에 좀 태워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이 승무원이 아주 경멸적인 눈으로 보는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생사가 걸린 위기 상황에서도 돈으로 해결하려는 그 모습이 얼마나 속물스러워 보였을까요. 결국 그 약혼남은 어떤 어린아이를 태운다는 핑계를 대고 겨우 보트에 비집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살아남아요. 그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가? 여자 주인공이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는데 1929년에 자살했다 그럽니다.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아요.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1929년은 미국의 대공황이 온 해입니다. 그러니 이 남자는 배가 침몰하는 그 상황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았던 생명력 강한 사람이었는데 자기의 경제가 무너지니까 그만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교훈이 있지요. 타이타닉 배가 침몰하는 것보다 경제 위기가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영적인 면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시지만 우리들의 실제 경제 문제, 먹고 사는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매일매일 먹고 살아야 하고 우리들이 삶의 경제 문제를 매니지하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실제로 먹고 사는 경제 문제에 대해서 많이 언급을 하셔요. 오늘 본문도 그중에 하나가 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놓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가이사,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죠. 함정입니다. 카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여기에 예스를 해도 노라고 해도 함정에 빠집니다. 예스라고 하면 안 됩니다. 왜냐면 유대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로마의 황제가 지배하고 황제를 왕으로 섬기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 그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카이사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한다면 당신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공격을 할 수 있겠지요. 반대로 No라고, 카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 그것은 바로 반역죄가 될 것입니다. 황제에게 반대했다고 해서 당장 고발하고 처벌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함정을 놓기 위해서 한 질문인데 예수님은 거기에 예스, 노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시고 동전을 하나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데나리온이라는 로마의 동전을 가져옵니다. 데나리온은 그 당시에 일꾼의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200불, 300불 그 정도 가치가 있겠지요. 그 동전은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늘 쓰는 동전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과 들판에 있을 때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먹이나 200 데나리온으로도 모자라겠다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그것처럼 평소에 빵 사먹고 일상 생활을 하는데 늘 쓰는 로마의 동전이 데나리온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이 데나리온 동전을 가져오니까 질문하십니다. 이 동전에 있는 이 형상과이 글씨가 누구의 것이냐? 카이사의 것입니다 대답합니다. 동전에는 황제 카이사의 얼굴과 카이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지요. 그것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저 세금내는 문제 가져왔는데 세금만이 아니라 지금 훨씬 큰 경제 문제가 여기에 다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괜히 세금 질문했다가 완전히 덤탱이로 예수님께 이런 과제를 떠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이미 로마의 황제의 형상이 있는 동전을 널리 쓰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유대가 이미 로마의 경제권에 다 편입이 되어 있고 그 로마 경제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 현실을 지적을 하시는 것입니다. 동전에 카이사의 형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거를 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자기 민족도 아니고 지배하는 로마 이방 민족의 황제의 형상이 있는 동선이니까 원래는 만지면 안 돼요.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은 이것을 일상적으로 매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왜 이렇게 되었는가? 예수님 오시기 한 150년 전에는 달랐습니다. 그때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독립 왕조를 세운 적이 있습니다. 하스모니안이라고 하는 독립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때는 유대 동전을 유통했죠. 그래서 유대 왕의 그림이 있는 자신들의 화폐를 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고 로마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동전을 쓰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세금을 걷을 수가 없잖아요. 유대 민족의 동전을 로마인들이 걷어서 뭐 하겠습니까? 세금 걷기 위해서라도 유대인들은 로마의 동전으로 바꿔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그러면 강제로 했느냐? 강제로 칼 들고 너희들 이제부터 유대 동전을 쓰면 안 돼. 로마의 데나리온을 써야 돼 하면서 칼 들고 감시하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둬도 경제라는 것은 자기가 알아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유대의 밀농사하는 농부가 있다면 그 밀을 팔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이 유대 동전을 가지고 사 먹겠죠. 그런데 로마인들은 어떻게 하냐면 이제 유다 동전을 가져오면 로마 동전으로 바꿔 줍니다. 환전을 해 줘요. 그런데 환전을 하면 매우 유리하게 그렇게 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유대 동전을 가지고 로마 돈으로 바꾸면 이제 이집트의 밀을 살 수 있습니다. 이집트는 다 로마 땅이니까, 그런데 훨씬 많이 사는 거예요. 가난한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유대 동전 가지고 유대 밀 사 먹는 거랑 이 돈을 로마 돈이랑 바꾸어서 이집트 밀 사 먹는 거랑 비교해 보면 이집트 밀 사 먹는게 훨씬 이득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이게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생활을 위해서 로마 돈으로 자꾸 바꾸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만히 내버려 둬도 유대인들은 로마의 동전을 쓰고 결국 로마 경제권에 종속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다 아무렇지도 않게 로마의 카이사의 형상이 있는 동전을 쓰게 된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느냐? 이거는 그래도 로마 동전인데 찝찝하다, 그러니 우리가 밥 먹을 때는 세수하자 이랬습니다. 물로 씻으면 마치 그 로마 동전 만졌던 부정함이 씻기는 것처럼. 율법에는 그런 조항이 없거든요. 자기들이 만든 법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들의 전통을 가지고 예수님을 흉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왜 식사할 때 세수하지 않느냐 그렇게 말합니다. 그거는 비위생적이다는 뜻이 아니고 로마 동전 가지고 여러 가지 했는데 밥 먹을 때는 세수해야지 그 뜻인데 너무 소용 없는 말입니다. 그저 자기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규칙인 것이죠. 예수님께서 너희들 외식하는 자라고 그러시지 않습니까? 로마 동전 쓸 때는 실컷 다 쓰고 그걸로 밥 사 먹고 치약 사고 다 하다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아 세수해야지 이러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성전에서 제사 드릴 때는 어떻게 하는가? 제사드릴 때 원래는 소나 양이나 동물들을 가져와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니까 그 먼거리를 제사 짐승을 끌고 오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돈으로 가져오면 성전 앞에서 바꿔줍니다. 그런데 일단 로마의 돈을 유대 돈으로 또 바꿔요. 성전에서 제사드리기 위해서 재물을 사는 그 동전도 거룩해야 된다고 유대 동전을 준비해 놨다가 로마 돈 갖고 오는 사람들에게 바꿔 주는데 이때 또 이득을 남깁니다. 그래서 유대 돈으로 바꿔서 그걸 가지고 소나 양을 사면 그걸로 또 이득 남기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이 이런 엉망된 성전을 한번 청소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빗자루로 쓰셨다는게 아니라 이렇게 완전히 장사 속이 되어 버린 성전을 완전히 뒤엎으신 사건이지요. 그래서 환전하는 테이블을 다 엎어 버리시고 동물들을 다 풀어 주시고 이랬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는 이게 얼마나 외식하는 일인지, 얼마나 하나님을 속이는 일인지 모릅니다. 나가서 평소 생활할 때는 로마 동전 잘 쓰다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제사드릴 때는 뭐 동전 바꾸고 이런 일을 하는데 율법에도 없는 일이고 그냥 자기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식하는 일을 하는 것이죠. 지금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은 생활을 이분법적으로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 교회 일 따로 있고 일상 생활 따로 있어서 일상 생활 때는 그냥 로마 동전 가지고 할 거 다 하다가 예배드릴 때 있으면 세수하고 돈 바꾸고 이렇게 자기들의 생활을 둘로 나누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일상 생활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동전, 로마 동전을 사용하는 일상 생활에서 유대인들은 최소한 하나님께 죄송합니다라는 생각을 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할 건 다 하고, 하나님 앞에 와서는 거룩한 모양만 보이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단순히 세금 내냐 안 내냐 그런 본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지 않습니까? 천국이 이 땅에 오는데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들, 로마 제국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런 세상 여러 나라들 중에 또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오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이 세상 나라를 다 심판하십니다. 다니엘 환상에서 돌이 날아와서 신상을 깨뜨리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면 세상 나라와 충돌하고 세상 나라를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로 투쟁하시는 것이거든요. 지금 그 십자가 지실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저 너들 세금 잘 내라는 말씀하실 리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일상 생활 가운데 이미 얼마나 세속화되어 있느냐. 너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데나리온 로마 동전 가지고 빵 사 먹는 거 그게 하나님 앞에 어떠하냐.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가책이 없다는 이 현실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경제 문제는 지금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하죠. 경제라는 한자말이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경세제민의 존말이고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멋진 말이에요. 영어로는 economy, 집의 법, 집의 살림을 꾸린다는 단어입니다. 경제 문제. 실제로 우리들이 돈을 벌고 쓰고 먹고 사는 문제. 그러니까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합니다. 실제로 우리들은 삶에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생각을 경제 문제, 돈 쓰고 돈 벌고 하는데 소모합니다. 그것이 또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그런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또 직업을 가지고 학교 공부를 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시간과 나의 육체적인 또 노력과 또 나의 정신적인 이런 노력을 엄청나게 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이 일하고 돈 벌기 위해서 계획도 다 하고 생활도 거기에 맞추고 또 이것저것도 걱정거리도 있고 하다 보면은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삶의 에너지를 경제 문제에 썼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경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을 하시지요.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돈쓰고 돈 버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세상의 모든 것에 값을 매겨놓았습니다.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세상은 그렇지 않았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동물과 식물과 열매와 이런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좋고 좋지 않음의 판단자이십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특별히 사람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선악과를 먹었고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선악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도덕적으로 들리는데 원래 의미가 더 넓습니다. 좋다 안 좋다 호불호 그런 의미까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물건을 보고 좋아하면 사고 싶고 안 좋아 그러면 사기 싫고 그런 가치를 담고 있는데 이 선악을 사람이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신 세상인데 이제는 사람이 하나님은 쫓아내고 내가 선악의 판단자가 된 것이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거든요. 이제 사람이 선악 또는 호불호를 스스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숫자로 값을 매기니까 서로 비교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빵 한 조각 1불, 스마트폰 200불 이런 식으로 가치를 내게 됩니다. 빵과 전화기는 비교를 할 수가 없는 대상인데 값으로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위기 상황이 닥쳐서 식량이 없어지면 완전히 달라지겠죠. 빵이 훨씬 비싸질 것이고 폰은 아무 가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그렇게 가치를 부여하고 값을 매겼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세상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답고 멋진 자연 세계에 인간들은 가치라는 덮개를 덮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그 값으로 이 세상을 판단합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돈이라는 선글라스를 끼고 이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이거는 100불 저거는 200불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나라, 인간의 시스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온전히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하는 그때에는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모든 탐욕이 드러나고 심판받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7절 한번 보시겠습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이 이름이라. 이 본문은 굉장히 유명하고 666 나오는 본문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계시록 자세히 공부하면 좋은데 오늘은 666 그 얘기 하려는게 아니라 이 마지막 때에 환난이 닥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 짐승의 표를 갖지 않으면 매매를 못 하게 됩니다. 경제 문제로 마지막 날에 우리들의 신앙의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 환난이 닥치면 핍박이 오면 우리들이 그것을 이겨야 하지요. 끝까지 예수님을 고백하고 그러다가 목숨까지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핍박이나 투옥이나 사형 선고보다 더 어려운 시험이 경제적으로 오는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는데 씨를 뿌리시면 금방 새가 와서 먹고 그런데 어떤 씨는 조금 살아다가 핍박이 옵니다. 마른 땅에 뿌리면 환난과 핍박이 와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그런 씨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씨가 그 환란 핍박 다 이겨내고 좀 자랐는데 그 다음에 오는 시험이 뭐냐? 이 세상의 유혹, 세상의 부, 세상에 부요, 재물, 욕심 이런 것이 가시덤불로 눌러서 더 자라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 무섭지 않습니까? 감옥에 집어넣고 고문하는 이런 환란 핍박보다 더 무서운게 경제적으로 보는 유혹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요한 거 다 보여 줘요. 부잣집 번쩍번쩍하는 것 그리고 좋은 생활 환경, 교육 환경 이런 것으로 유혹하면 넘어간다는 거죠. 마지막 날에는 이게 극단적으로 되겠죠. 그래서 짐승에게 절하지 않으면 매매를 못 하게 된 겁니다. 빵 사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유혹이 오면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우리가 더 깊이 깊이 생각하는 기회를 다음에 갖기를 바랍니다. 이 경제 문제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다음 본문들 잠깐만 보시면 요한계시록 18장에는 그렇게 이 세상은 뭘 추구하느냐? 수많은 부와 무역과 매매함을 통해서 부를 추구하는 이 세상의 실패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스겔 27장은 전체가 이 이슈입니다. 무역을 하는 두로라는 도시가 장사를 하면서 얼마나 부를 많이 축적했는지, 그런데 하나님과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 세상의 부요를, 인간들의 이런 엄청난 이런 성과를 다 심판하실까요? 뉴욕같이 부요한 도시들,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도시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들이 잊어서 안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그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고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변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세상에 우리들의 돈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성도에게도 매우 합당합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성실하게 일하고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거기에 늘 따르는 유혹이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어찌나 위험한지 우리들이 늘 깨어 있고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은 조직적으로 돈을 더 벌라고 우리들을 유혹하고 자꾸 부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주식 투자하라 그럽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이 주식을 해야 기업들이 투자를 할 수 있고 경제가 돌아갑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들이 사는 사회가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당신이 주식 투자하는 이유가 정말로 나의 작은 돈이라도 보태서 기업이 잘되고 우리 사회를 더 잘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물어보면, 뭐 그런 것도 있겠죠,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나의 이득입니다. 내가 돈 더 벌기 위해서 주식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 세상을 주식이라는 눈으로 보게 되고 그래서 세상의 어떤 전쟁이나 재난 사고 같은 뉴스가 생기면 거기 있는 사람을 걱정하는 것보다 먼저 내 투자한 주식이 어떻게 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을 그렇게 유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 말씀하시는데 그만큼 재물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물이라는 맘몬이라는 단어는 돈의 신이거든요. 돈의 신이 하나님과 지금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돈의 힘이 얼마나 크면 그래도 하나님과 지금 비교가 되냐고요. 그래서 예수님은 둘 다 섬길 수 없다. 하나님만 섬기든지 돈만 섬기라고 예수님께서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돈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돈을 신으로 삼아서는 안 되지요. 돈은 그저 사람들이 편하게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사람이 만든 것이니 사람이 돈을 부려야 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될 때가 너무 많지요. 우리들의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마땅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특별히 내가 돈이 없어서 힘들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고 주님 뜻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지금 내가 욕심이 아니라 나의 필요, 나의 가족과 자녀들을 위한 필요로 인해서 하나님 내가 눈물 흘리면서 기도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은 나의 그런 물질적인 부족함도 채워 주십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교회가 함께 힘을 합쳐서 도와주는 것도 마땅한 일입니다. 초대 교회부터 바울과 베드로가 모두 동의했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할 일은 당연히 복음 전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직업을 위해서 우리들이 학교 공부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마땅한 일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일함으로 나에게 합당한만큼 그리고 분수에 맞게 돈을 벌어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기도함 가운데 주님 뜻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우리들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에서 그런 재정적인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주님은 이해하시고 그리고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세상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도록, 그래서 나의 가정을 부양할 수 있도록 주님은 힘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는 늘 위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유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서 자기를 찔렀다. 이 말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돈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돈을 사랑하면 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을 탐내면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에서 떠납니다. 많은 근심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근심하는 적도 있고요. 돈이 우리들에게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찍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성도들에게도 이런 유혹이 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이런 우리들의 부족함도 용서해 주시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들이 늘 주님 불쌍히 여겨소서, 부족합니다, 나를 도와주소서 하고 시험과 근심에 빠지지 않도록 늘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21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세상의 재물은 카이사의 것입니다. 세상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붙들고 있으려고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필요에 따라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대로 우리들이 사용하지만 만약에 세상이 그것을 어떻게든 가져간다면 아 이건 원래 내 것 아니지, 카이사의 것이지 하고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아깝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그런 상황이 있더라도 그렇게 마음을 비울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죠. 그러나 특별히 동전에 카이사의 형상이 있어서 가이사의 것인 것처럼 하나님의 것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저와 여러분이 특별히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은 돈과 비교되어 있습니다. 돈에게 우리 자신을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라. 돈은 그저 우리들이 매니지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욕심 부리지 않고 분수에 맞게 소박하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쓰라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잠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을 그렇게 드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텐데 주님 나 자신 돌아보면서 주님 나의 모든 이런 재정적인 현실적인 필요도 다 아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 채워 주시는 줄 믿고 특별히 나의 모든 필요를 또 주님께서 또 필요한 것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돈에 휘둘리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목소리 내서 주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설교 게시판
우리 모두가 은혜로 변화된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멀리하여서 그저 이 세상에 속해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한하신 은혜로 우리들을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들을 불러서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복되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과 영원히 영광을 누리는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의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늘 감사하고 감격하며 마음속에 늘 평강이 임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세상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나누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을 생각할 수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된 다음에는 평생 이 은혜를 자랑하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기독교 2000년의 역사 가운데에도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평생 주님을 자랑하면서 산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특별히 어거스틴이라는 분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어거스틴은 주후 4세기 5세기 로마 제국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대단한 지성인이고 이 분이 남겨 주신 수많은 책들과 설교가 지금까지도 기독교 신앙에 큰 도움이 되는 위대한 분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젊었을 때에는 완전히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분의 전공이 수사학이라고 하는데 수사학은 말을 잘하는 학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말이 문법과 논리에 맞고 또 여러 가지 표현으로 사람들을 잘 설득해서 내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학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제일 가까운 직업이 변호사, 정치인 그런 겁니다. 그만큼 말로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기술에 능했고 자기의 젊은 시절을 그것을 연구하면서 바쳤습니다. 대단히 명석했기 때문에 성공한 수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늘 마음속에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는거예요. 그래서 20대 젊었을 때에는 마니교라는 종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종교에서 아무리 해도 만족이 없어서 거기를 나오게 되고 결국은 자기가 수사학 교수를 하고 있던 이태리의 밀라노 지역에 있던 암브로스라고 하는 교역자 그리고 설교자를 만나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거스틴의 삶을 봐도 한 사람과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젊은 어거스틴이 암브로스의 설교를 말을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고 들은 겁니다. 자기의 직업적인 것으로 말의 표현에 집중하면서 듣다가 자꾸만 설교를 듣다 보니 하나님 말씀을 접하게 되고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성경 말씀을 읽기 시작하다가 중간에 덮어 버립니다. 왜냐면 자기가 익숙한 수준 높은 품위 있는 라틴어 문헌들과 비교해 보면 성경의 말씀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내용도 좀 희한한 것도 많고 그리고 번역본이기 때문에 본래 아름다움이 살아나지 못한 것도 있고 그래서 성경을 처음에는 가까이 하기 힘들어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꾸 설교 말씀을 접하면서 마음이 열렸지요. 그래서 결국은 무엇을 알게 되었냐면 성경은 은혜로 읽어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적인 도움을 받아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세상의 다른 책들처럼 어떤 지식이나 인생 사는 방법 그런 것을 배우는 책이 아니고 오직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읽으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 분이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가 강력하게 임하는데 이분이 견딜 수 없이 통곡하면서 지난날에 젊은 날에 방탕했던 삶을 완전히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되어서 남은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위대한 목회자, 설교자, 주교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나중에 연세가 든 다음에 자기의 젊은 날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어떻게 죄 가운데 살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는가를 책으로 남긴 것이 있습니다. 유명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인데 지금까지도 기독교의 아주 훌륭한 고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어거스틴 고백록의 9권에 보면 그가 처음 하나님 믿었을 때 오늘 본문인 시편 4편의 말씀을 가지고 큰 은혜를 받았던 대목이 있거든요. 오늘은 그 대목을 중심으로 우리도 함께 은혜를 받아보면 좋겠습니다. 굉장히 옛날 사람이고 또 우리와 좀 다른 버전의 성경책을 읽은게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는 조금 다른 그런 성경 읽기를 보게 될 겁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1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시편 4편 1절에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거스틴이 은혜를 받고 성경을 읽으니까 그냥 단어 하나하나가 은혜입니다. 이분이 희한하게 단어 하나를 붙들고 너무 좋다, 은혜롭다 하면서 그렇게 읽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을 사로잡은 단어는 부를 때입니다. 하나님을 부름. 다윗의 시편이고 다윗이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어거스틴은 다윗이 그랬다는 것 뿐 아니라 내가 부른다는 겁니다. 자기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부릅니다. 예전에 한번 말씀드린 것처럼 그 때에 성경을 읽는 것은 반드시 소리내어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부를 때 라는 대목에서 실제로 어거스틴도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성경 말씀에 그만큼 몰입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자신도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른다, 이 말씀에 딱 꽂혀서 어거스틴이 얼마나 감격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 응답하소서 이 대목이 어거스틴이 읽은 성경에는 응답하십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부르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이렇게 읽으면서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성경 한 단어 한 단어 읽으면서 이게 그저 옛날 누군가의 고백이 아니라 나의 고백이 되고 그리고 내가 이것을 읽을 때 하나님이 즉시로 응답하시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읽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성경 읽으면서 내가 생각하고 은혜받는 것이 좋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고 그 말씀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내가 내 마음을 열 때에 하나님이 나를 만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고백이 옛날 믿음의 선조들 뿐 아니라 나 자신의 고백이 되고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은혜로 성경을 읽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 응답하십니다. 오 좋으신 하나님 어거스틴이 그렇게 성경을 읽고 있지요.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여기서 너그럽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표현을 해 보면 나의 영혼을 크게 하심이라는 표현이 되겠습니다. 고전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의 영혼을 어떤 분명한 실체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들의 육신이나 이 세상의 물질은 도리어 그림자 같은 것이고 나의 영혼이 진짜 참된 실체다, 이렇게 보았거든요. 그리고 나의 영혼이 실제로 크기가 있다고 믿은 거예요. 그러면 나의 영혼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은 뭐냐? 곤란 중에, 우리가 괴로움이나 걱정거리가 있으면 우리가 쪼그라들잖아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얼마나 힘들어요. 그러면 우리의 영혼도 쪼그라들겠죠. 그러나 이렇게 곤란할 때 아무리 큰 곤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렇지 않아요. 담대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나의 영혼이 퍼지는 겁니다. 심호흡도 하고 가슴을 쫙 펴고 두 팔을 들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나의 영혼이 말 그대로 커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와 같은 담대함을 배우기 원합니다. 걱정거리가 있고 내일 당장 교수님 만나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럴 때 떨지 말고 마음을 담대히 하고 곤란 중에 나의 영혼을 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넉넉해지면 실제로 너그럽게 되겠지요. 사람들과도 더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좋은 의미로 나 자신에 대해 자신감,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내 중심대로 살라는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담대하다, 이런 올바른 의미로 어 나의 자의식을 가져야 되겠고 그렇게 할 때에 주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될 수 있겠습니다.
2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이 대목은 대개 다윗 자신의 고백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어거스틴은 여기서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을 볼 때 이렇게 안타까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영광이 있는데 불쌍한 인생들이 어리석어서 이 영광을 말도 안 되는 것과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 가운데 거하지 않고 그 대신에 헛된 일, 거짓된 것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여기에서 어스틴은 자기의 지난 날을 돌아봅니다. 내가 옛날에 마니교라는 종교에 빠져서 헛된 일과 거짓에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말씀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적응하면 안 됩니다.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다른 누구를 생각하면 안 되고, 그렇게 책망하시는 말씀은 나 자신에게 적용해야 옳겠습니다. 어거스킨도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이랬지, 내가 한때 헛되고 거짓된 것을 찾았지 하고 고백을 합니다. 그가 한 때 믿었던 마니교라는 종교는 영지주의에 속하는데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선과 악의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한 세력이 있고 악한 세력이 있어서 동등한 겁니다. 그래서 맞서고 있고 늘 투쟁한다는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니 아무리 세상에 악하고 어두운 권세가 있어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것에 비춰 볼 때 마니교의 선악 2원론은 잘못된 것입니다. 특별히 마니교는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이 다 선하냐?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습니다. 그 영적인 현상이 있다고 다 믿으면 안 되고 분별해야 하죠. 악한 영은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속이고 또 사람들을 겁주고 위협하면서 사람들을 자기의 노예로 만니다. 그런 악한 영들이 지금도 이 세상에서 역사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분별해야 하지요. 그리고 그런 것은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승리해야 합니다. 육적인 것이 다 악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어 주신 우리의 육적인 물질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하는 육신적인 일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고 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우리들의 육신적인 모습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는 마니교의 교리는 헛되고 거짓된 것이었지요. 어거스틴이 그것에 빠져서 있다가 만족이 안 되어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자기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고백을 하고 있지요.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이 말씀은 어거스틴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경건한 자, 가장 귀하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품 속에서 영원히 계시고 때가 되매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분이지요.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 여러 중에서 선택하신게 아니죠. 오직 외아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택하셨느냐? 그분이 우리이 세상을 우리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실 것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은 순종하시고 때가 되매 사람의 몸으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고 십자가 고난받으시고 죽고 살아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영원 전부터 선택하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기도, 우리들을 위한 중보를 들으시지요. 여기서 어거스틴이 로마서 8장 34절을 인용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십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면 여호와께서 들으십니다. 가장 귀하시고 의롭고 경건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간구하고 계십니다.
또 너희가 알지어다 라고 했습니다.이 시편을 읽는 너희가 알지어다. 어거스틴이 지금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의 이런 성경 읽기를 통해서 내 주위 사람들도 좀 알지어다. 알면 너무 좋겠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뭐라 하냐면 내가 옛날 친구들, 방탕할 때 친구들이나 마니교에 있을 때 알던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내가 이렇게 성경 읽는 이 소리를 좀 들었으면 좋겠다 그럽니다. 그래서 그들도 알도록. 지금 나는 성경 읽는 괜찮은 사람이야, 자랑하는게 아니고 자기가 읽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나의 옛날에 알던 그 사람들도 듣고 알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된 주님이시고 예수님의 우리의 사랑을 그들도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언자가 하는 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예언자인데 지금 우리도 성경 말씀을 읽고 이것을 전하면 우리도 예언을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또 그것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듣고 이와 같이 우리 주의 사람들도 알게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말 뿐 아니라 우리들의 행동으로도,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 주위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삽니다. 게으르지 않고 세월을 낭비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수고도 다 아시고 갚아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각 사람들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속이지 않아요. 그리고 성실하게 일하고 공부합니다. 그리고 꾀를 부리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들 속에서 이래저래 해 볼까? 그런 일이 하나님이 다 보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올바르게 예수님 믿는 사람은 성실하게 올바르게 직업이나 학업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세상 사람들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알지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저런 삶을 볼 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너무 보기에 좋구나 하면서 우리들의 생활이, 우리들의 말과 생각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4절입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여기서 떨며 범죄한다는 대목이 어거스틴이 읽은 성경에는 노하여서 범죄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에베소서 4장 26절에도 인용이 되는데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화내지 마라 그런 뜻도 되겠지요. 그런데 어거스틴이 읽기로는 너희는 분을 내어라, 그리고 범죄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 분을 내라고 하느냐? 여기에서 화내는 대상이 누군가? 자기 자신입니다. 나 자신의 옛날에 죄된 모습, 그래서 헛된 것과 거짓된 것을 쫓았던 나의 죄된 모습을 보고 화를 좀 내어라 이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이 다 선한데 특별히 노하는 그런 모습이 나 자신과 나의 죄된 모습,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좀 화를 내고 노하여서 범죄하지 말지어다. 이렇게 어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지난 날, 옛 사람의 모습, 죄된 모습이 있습니다. 이걸 보면서 그냥 무덤하게 늘 그래 왔는 걸 하지 말고 아 그러면 안 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의로운 분노,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경각심을 가지고 매일매일 살면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내가 날마다 죽노라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나의 지난 날 옛 사람, 심지어 어제 모습도 죄된 모습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들을 다시금 깨우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말지어다. 이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지난날 옛 사람의 모습 이것은 그럼 어떻게 되는가? 5절과 연결이 되는데 5절에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의의 제사를 드린다고 했는데 제사의 재물이 뭐냐? 나의 옛사람, 그러니까 나의 지난 날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물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고 날마다 주님 앞에 부족합니다, 내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품어 주시기 때문에 매일매일 살게 되죠. 나의 그런 죄된 모습, 이것을 재물로 드리는 것이 의의 제사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의 지난날, 나의 옛사람 그대로 그냥 계속 계속 살면 크리스천이라고는 하지만 변화가 없는 그래서 보람도 기쁨도 없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이런 모습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것을 제물 삼아서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들이 옛 사람 그대로 살면 마치 꿈속에서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꿈을 깨면 배고픈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참 생생한 비유 같습니다. 혹시 그런 꿈 꿔 보셨습니까? 꿈속에서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꿈 깨고 나면 배고프고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만약에 나의 죄된 모습을 주님께 의의 제사로 드리지 않으면 나의 모습 옛사람 그 모습 그대로 산다면 그렇게 허망한 꿈 속에서 살다가 깨는 것 같은 그런 삶이 됩니다. 그러지 말고 나의 지난 삶을 주님께 의의 제사로 드리는 결단을 하여라. 그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이렇게 어 말을 하고 있습니다.
6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냐 하오니. 6절은 문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선을 보일까?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보여 줄 분이 누구입니까? 이것이 모든 인생의 질문 아니겠습니까? 각 사람의 형편은 달라도 결국 우리 모두에게 내가 좀 좋은 것을 보고 싶다, 과연 누가 어떤 분이 나에게 좋은 것을 선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인생의 질문이라면 대답은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그 응답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모든 질문에 답이 되십니다. 인생은 질문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인생은 완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있고 늘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가야 하므로 주님 앞에서 날마다 질문하는 것이 옳고 좋습니다. 주님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주님 앞에 더 선한 삶을 보여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닮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선을 더 좋은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답은 늘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비추소서,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답이 되십니다. 날마다 주님을 찾는 우리가 되기 바랍니다.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여기서 빛이라는 단어가 어거스틴에게 특별합니다. 왜냐면 옛날 마니교에 있을 때는 빛을 그렇게 강조했거든요. 그러나 헛되었죠. 참된 빛은 우리 여호와의 주의 얼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들은 그 빛을 받아서 비추는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이 인용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들 스스로는 빛을 낼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는 그 빛을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가 그것을 받아서 비추는 빛의 자녀들이 됩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여기에서 어거스틴에게 꽃히는 단어는 기쁨입니다. 기쁨. 결국은 크리스천의 삶을 규정하는 단어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크게 드러나는 눈에 뜨는 기쁨일 수도 있고 또는 여러 가지 형편과 사정에 따라서 잔잔한, 사람들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서 샘물 같이 솟아나는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기쁨이 이깁니다. 우리 삶 가운데 걱정이나 어둠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압도하고 승리하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실제로 기뻐하거든요. 그리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게 아니라 너무 기뻐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성경 읽으면 좀 요란합니다. 그래서 읽다가 할렐루야 하다가 오 주여 기쁨 이러고 그런 소리가 계속 나니까 아마도 어거스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알았을 것 같습니다. 소리 들으면서 아, 또 성경 읽는구나 알았을 것 같아요. 어거스틴이 이렇게 성경 말씀 읽으면서 그냥 자기의 그런 모든 감정과 열정과 자기의 삶을 다 들여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주님 주시는 은혜를 완전히 체험하고 또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 모습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혼자 성경 읽으면서 부흥회 하는 모습을 우리들이 상상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나옵니다. 실제로 우리들의 몸을 풍성하게 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는 그런 표현이 되는데 그런 것이 풍성할 때보다 더한 기쁨, 참되고 커다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은혜로 변화된 사람은 성경을 이렇게 은혜로 읽습니다. 오늘 1장 읽어야 되니까 읽는게 아니라 그냥 단어 하나하나만 가지고도 묵상하고 기뻐하고 아마 그렇게 읽다 보면 뭐 한 시간 지나도 한 줄도 못 넘어갈 겁니다. 그렇게 정말로 하나님 앞에 깊이 잠기는 성경 읽기를 하면 좋겠고, 그렇게 느리게도 읽고 또 한편으로는 또 그러면 몇 년 걸릴 거니까 성경 전체의 스토리도 알기 위해 빨리 읽고 그래서 어 성경을 느리게도 읽고 빨리도 읽는 두 가지를 병행하면 좋다는 생각을 생각이 들게 됩니다.
8절입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이는 오직 여호와심이라. 여기서 평안히 눕고 잔다는 같은 말이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어거스틴이 동일하신 분에 대해서 묵상을 합니다. 동일하신 변치 않는 분. 그분이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알아 주시는 그 사랑이 변치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 수 있죠.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는 그것은 온 우주가 사라져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십니다. 이 시편 4편의 짧은 본문을 가지고도 풍성한 이런 은혜 충만한 그런 삶을 사는 우리 믿음의 선조인 어거스틴의 삶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한번 이렇게 해 봅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풍성히 잠기면서 삶이 진정 변화되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바로 전날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마지막으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왔으니 곧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시고 제자들 자신들도 중요한 자리에 앉고 이제 영광스러운 날이 곧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밤 예수님의 말씀은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의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또 특별한 일을 하시는데 제자들의 발을 시켜 주셨지요. 높은 보좌에 앉으셔야 할 왕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아지신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랐지요. 그리고 자기들의 부끄러운 그 발을 내밀고 예수님께서 씻어 주시는 그 손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내가 이같이 하였던 것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하여라. 너희도 서로 섬기고 서로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곧 왕이 되실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의 말씀과 행동이 굉장히 다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떠나야 한다. 내가 너희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요. 하나님, 아버지, 주님, 영원히 계시는 분. 여러 표현들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특별히 지금 하나님을 부르시는 그 이름은 나를 보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특별히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믿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분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주시고 특별히 병든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마음의 고통이 있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쫓겨나고 멸시받고서 받고 있는 그래서 눈물 흘리는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찾아가셔서 다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셨지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많은 정말 보배와도 같은 귀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 그 하나님에 대한 그 귀한 복음은 아주 간단히 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굉장히 쉬운 내용입니다.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도 얼마든지 나와서 다 내 말을 들어라 하고 초대하셨지요. 너희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어려워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아주 쉽고 그러나 너무나 귀한 말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이 사실만 우리에게 잘 마음속에 새겨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려움 당하고 또 괴로움 당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지요. 병에 걸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곤란도 있고 그 사람들과의 그런 어려움이 있지만은 그 모든 괴로움과 문제를 다 이길 수 있는 그리고 해결할 수 있는 그 사실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지금이 시간에도 우리들을 선하게 살펴보시고 우리들의 모든 기도를 우리들의 눈물을 다 들으시고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지금도 언제라도 우리 곁에 계시지요. 이 사실만 믿을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좋은 곳이 되겠습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해 주신 소식이 그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내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너희가 다 받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예수님이 여러 표현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결국은 우리들이 또 하나님의 그 백성들이 결국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그 자녀의 합당한 삶 그런 삶을 살기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저 막연하게 알거나 굉장히 멀리 계신 분으로 어렵게 여기거나 아니면 아예 모르거나 그렇게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요 너희의 아버지시니 그분을 믿고 염려하지 말고 참으로 복되고 평화로운 그런 삶을 살고 그 사랑을 이웃 사람들과 나누면서 살아라. 그 말씀 전해 주기 위해서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나를 그 목적을 위해서 보내 주신 그분께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금방 자기들 곁에서 왕이 되실 줄 알았는데 주님은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야 한다고 하시니까 제자들 마음에 근심이 있지요. 그렇지만 주님은 이것이 꼭 일어나야 할 일이다.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혜사라는 말씀이 나오죠. 말 그대로 돕는 분이시고 성령님을 가르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가서 하나님께로 가면 내가 보회사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시지요. 성령님 하나님의 영 그리고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십니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우리 마음속에 우리들의 삶 속에 성령님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함께 하시고 우리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주시고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을 주시고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 믿고 매일매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님 그분이 지금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이 성령님에 대해서 특별한 말씀을 하시는데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 여기 세상이라는 단어는 코스모스입니다. 코스모스, 우주라는 뜻도 되고 세상이라는 뜻도 될 텐데 성경에서는 이 세상이라는 단어가 좀 특별한 의미가 있지요. 대부분은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과 반대되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하면 성경에서는 대개는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 그런 뜻이 되겠지요. 그래서 성령님께서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책망하실거라 말씀을 하셔요. 여기서 책망이라는이 단어는 다른 말로 하면 유죄 판결이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이 세상이 주님 앞에서 어떤 잘못된 그리고 고쳐져야 할 그런 현실 안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신다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굉장히 엄중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이 성령님은이 세상에 오시면 세 가지로 책망을 하실 것인데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죄에 대해서 이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은 바로 그들이 나를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오늘 주보에 마틴 루터가 이 본문에 대해서 설교한 내용을 소개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이 세상이 죄로 책망받을 일입니다. 이 말은 사실 아직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될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 믿지 않는게 그렇게 큰 죄냐? 너무 기독교는 배타적이지 않냐? 예수님 안 믿는 것을 죄라고 말하면 너무하지 않느냐. 그렇게 거부감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본래 뜻이 뭐냐, 그 무슨 의미냐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봐야 하죠. 죄라는 것은 루터도 그런 말씀을 하지만, 사람들은 죄라 그러면 거부감을 느끼고 싫어하지요. 왜냐면 내 행실을 자꾸 지적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인데 죄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어떤 범법을 한다는 그런 의미도 있겠지요.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이런 정말로 큰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야 될 그런 것도 죄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라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 하나님과 반대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고 있다. 그 현실이 죄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 말은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내 생각이 어떻고 하는 그런 차원, 그런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뿐만 아닙니다. 그런 것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못된 것은 고쳐야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사는 이 세상 가운데 인간이라는 현실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이 세상이 하나님과 지금 잘못되어 있다는 이 현실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원래 창조하셨을 때 그 에덴 동산, 하나님의 본래 창조는 이렇지가 않았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세상,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세상,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서 지음받은 사람은 그 가운데서 특별하게 하나님과 매일매일 교재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과 사람이 늘 대화하고 함께하는 그런 세상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보시면 하나님이 서늘할 때쯤 늘 동산을 거니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마 매일 저녁 그 시간이 되면 하나님이 산책하시듯이 에덴 동산에 오시고, 원래 인간은 아담,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가 인간이라는 뜻이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오시면 하나님과 함께 산책하고 이런저런 얘기하고 그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원래 관계가 그렇습니다. 어린아이가 하나 부모님 앞에 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 모습이 제일 합당한 비유가 되겠습니다. 순진한 아이들, 아직 아무 염려가 없는 아이들이 부모님 앞에 자랑스럽게,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나와서 부모님 손잡고 동행하는 그 모습이 가장 좋은 모습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원래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렇지가 않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일단 많이 모르고 오랜 세월 동안이 세상 가운데 또 문화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예 잊어버린 사람도 많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그냥 막연한 개념으로만 알고 좀 멀리 계신 어떤 분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을 굉장히 두려운 두려워할 분으로 그래서 나를 늘 간섭하고 힘들게 하는 그런 분으로 아는 경우도 많아서 하나님과 인간 세상의 관계가 지금 매우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인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인간의 책임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뭐냐? 그것을 멀리서 찾을 것 없습니다. 옛날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는데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사실 나 자신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지금 어떤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을 정말 아버지로 매일매일 그렇게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무나 강조하시고 부탁하신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거든요. 두려워하지 말라. 그 말씀 얼마나 많이 하시는지, 풍랑 가운데 걸어오실 때 제자들이 무서워하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 말씀이 얼마나 강조되는지 모르는데 실제로 그렇잖아요. 어린아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모님으로 모시고 있는데 걱정하겠습니까? 아 내가 내일 뭐 먹고 살지? 그런 걱정 안 하잖아요. 그것이 원래 인간의 모습인데 그걸 우리가 잃어버렸죠. 우리들도 사실은 마음속에 그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1년 뒤 10년 뒤 나는 어떻게 하지? 내 가정, 내 자녀들, 내 직장, 학교, 나의 미래는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다 걱정거리가 한두 개가 아닌데 이 모든 이런 것으로 인해서 내가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감사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그런 나의 모습입니다. 그걸로 인해서 나 자신도 힘들고 옆에 사람도 힘들고 세상도 힘들고 그런 우리의 모습이 그걸 보여주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지금 뭔가 잘못되어 있다. 이것이 죄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바로 그런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고 바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시고 그것이 참된 인간의 모습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그리고 그 길을 끝까지 가셔서 십자가까지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믿는 것이 사실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마음에 구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대로 따르기로 사는 따르기로 결심하는 삶, 그것이 사실 정말 마땅한 삶이 될 터인데 세상은 아직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래서 이 세상이 성령님께 책망받을 것입니다.
의에 대해서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의에 대해서 책망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의라는 말은 정의, 공의, 올바른 것, 공평한 것 그런 의미가 있지요. 그런데 가장 본질적으로는 성경에서 의라는 것은 뭐 다름 아니라 옳은 것, 맞는 것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올바른 것.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 올바른 자리, 올바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의롭기를 원하시고 또 의를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십니다. 칭의라고 하는 말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 말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 다시금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마음에 늘 평강이 있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 이것이 의로운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지요.
이것이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시는 의인데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의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의롭게 하신다는 말씀이 로마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의로우신 분, 완전하신 분이고 그분이 의의 기준이신데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하시나?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맞춰 주신다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셨는가? 바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롭게 회복되고 그렇게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는 그것이 하나님 자신을 의롭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필요 없죠. 하나님은 그렇게 굳이 안 하셔도 원래 당연히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잘한 사람 상 주시고 못한 사람 벌 주시고 그렇게만 하셔도 얼마든지 그분은 정의로우신 분인데, 그걸 훨씬 넘어서서 굳이 안 하셔도 되는 일, 우리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불러 주셔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삼아 주시는 그걸 굳이 하신 것이고 그만큼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신 일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에는 그 올바른 일, 의로운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그분의 모든 사역을 끝내시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끝은 그리고 정점은 십자가의 희생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죽기 위해 오셨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지만 그래서 우리들은 죽을 운명에 있는 존재인데 예수님이 그런 우리 인간으로 오셨지요. 그런데 그분이 죽으실뿐 아니라 죽기 위해 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태어나실 때부터 죽을 것을 작정하고 오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이런 죄와 죽음의 이런 괴로움을 다 가져가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 표현하셨을 때 동방 박사들이 드린 선물 중에 아예 몰약이 있는 것이지요. 장례 때 하는 그런 몰약을 어린아이에게 드리는 선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아예 죽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이 세상에서 모든 일과 가르침을 이제 다 끝내시고 그 마지막으로 끝까지 완성하기 위해서 이제 십자가에 바로 이 밤이 지나면 못박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의로운 일, 마지막 가장 옳은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고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더 이상 보지 못하 섭섭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예수님 죽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더 이상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만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요. 그 대신 지금 우리에게는 그분의 영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가장 의로운 길 하나님께서 정하신 올바른 일이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심판에 대해 대하여라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 영어에는 프린스라고 그렇게 되어 있고 이 세상의 주권자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는 로마의 황제나 세상의 왕들이나 그런 권력자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자들이 심판을 받을뿐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는 그 모든 배후에 있는 더 영적이고 본질적인 그런 존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죠. 사탄이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사탄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많고 이상한 것도 많고 그런데, 성경에는 사탄에 대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만 되는 데까지만 나와 있습니다. 자세히 나와 있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탄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가 없고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우리들이 성경 말씀 믿고 신앙생활할 때 사탄을 너무 의식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거 할 때 아 실수했네, 또 사탄이 속였네 너무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우리들은 하나님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은 늘 감사와 기쁨, 사랑 이게 중요한 것이지 사탄이 나를 넘어뜨린다고 너무 의식하시면 사탄이 좋아합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성경에는 사탄에 대해서 최소한의 내용만 나와 있는데 일단 사탄은 자기 혼자 나타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셨죠.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사탄도 예외가 아니고 일단 영적인 존재고 그래서 육신인 우리보다 훨씬 많은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런데 타락을 한 거죠. 그래서 성경에는 아주 살짝 힌트만 되어 있는데 교만해서 자기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천사니까 훨씬 책임도 있고 중요한 그런 일들이 있을 텐데 교만해서 자기 처소를 떠났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타락한 거죠. 그래서 그것이 사탄이 되었고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의 근원은 교만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 교만한 것,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그래서 처소를 떠나는 것, 이것이 죄의 근원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들은 더 자세히 알려고 연구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받았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 사람들을 다 두려움으로 몰고 갑니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내가 지금 여기까지 이루었지만 앞으로 10년 뒤에는 또 불안하지 않을까? 언젠가 나에게 죽음이 닥치면 내 자녀들도 걱정되는데 그러면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을 계속 불안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죠. 그것이 사탄의 제일 주된 무기입니다. 그런 것을 싹 예수님께서 다 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임금이 정죄받고 심판받은 것입니다. 쫓겨난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들은 사탄의 그런 유혹에 또는 위협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물론 우리들에게는 매일매일 이런 시험이나 유혹, 그런 마음이 간혹 들기도 하지만 그냥 스쳐 보내면 됩니다. 머리 위에 새가 날아오는 것을 막을 순 없지만 머리에 동지를 트는 것은 우리들이 털어 버리면 되죠. 그런 비유가 있는 것처럼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 되고 그것도 너무 힘줄 필요도 없어요. 무시하는 것이 차라리 더 좋습니다. 그런 생각은 흘려 보내고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니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기도처럼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이잖아요. 매일매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선하신 그 사랑을 믿는데 왜 두려워하겠습니까?
사실 이것이 우리들의 영적인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은 다른게 아니고 투구 쓰고 갑옷, 칼과 방패와 그런 비유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싸우는 그게 본질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말 영적 전쟁의 가장 최전선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소리 하더라도, 세상에 뉴스나 그런 것들이 틈만 나면 아니야 아직 모자라 더 있어야 돼 걱정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수많은 세상의 유혹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아니야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때문에 전혀 요동하지 않아, 나는 늘 평강과 감사와 기쁨을 누릴 거야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 성도들은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요. 하나님을 모르니까 아예 그런 생각도 안 하고 그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이런 것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살고 있지만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 있는 우리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알아서 그런 두려움이나 염려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만을 믿고 온전히 평화롭게 사는 것 그것이 영적 전쟁에 가장 중요한 모습이 되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 오신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부탁입니다. 유언이라고 할 수 있죠. 예수님 죽기 직전에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우리가 들어야 되잖아요. 예수님 말씀 듣고요. 우리가 예수님 당부하시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두려워하지 않고 영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 주시고 도와주시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다고 하는 것을 굳게 믿는 성도의 삶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을 진리의 성령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이 모든 것을 다 일히 가르쳐 주시고 우리들에게 인도해 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받은 우리들에게 진리의 성령님이 늘 인도해 주시고 말씀해 주셔서 주님이 도와주시는 풍성한 믿음의 삶,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 안에서 축원드립니다.
천국에 대한 본문들을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습니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들이 성경 말씀을 읽는 키워드로 생각하면 많이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 깊은 단어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구약에는 여호와의 날 또는 간단히 그 날이라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오는 날이 됩니다. 그러면 그 날이 언제인가? 마지막 날입니다. 성경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오는 날, 그 날이라고 알면 됩니다. 성경 읽을 때 굉장히 도움이 되는 힌트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마지막 날을 생각하면 흔히 어떤 재앙이나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그 사건들에 집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서 마지막 날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그 권능과 영광으로 이 땅에 친히 오십니다. 그러면 온 세상이 주님 앞에서 마지막 날이 되는 것입니다. 옛날 성도들이 이 마지막 날을 바라보았던 이유는 이 세상에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 어떻게 할 수 없는 악하고 어두운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이 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과 슬픔이 너무나 극심해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도들은 이 세상의 엄청난 악한 권세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 세상을 바로잡아 주신다는 그 날을 믿음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날이 마지막 날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일하는 날, 천국의 날이 됩니다.
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중요한 사건들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날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우리 기독교의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지막 날의 부활에 대한 중요한 성경 말씀을 함께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친구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두 명의 누이와 예수님께서 만나게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 주실 텐데 이 사건이 요한복음 전체에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른 세 복음서와 조금 다르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시면서 굉장히 인기가 좋으셨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너무 어려운 말씀을 하시니까 사람들이 많이 떠나요. 제자들 몇명만 남은 상태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또 사람들이 막 몰려오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예수님과, 또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라는 사람 구경 좀 해 보자 이러면서 예수님 주위에 갑자기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요. 그러니까 그 권력자들이 아 너무 위험하다, 예수님 주위에 너무 사람들이 많이 따라다니까 잘못하면 일란이 일어날 수 있겠다 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전체 스토리의 흐름에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 주시고 그 대신에 십자가에 죽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요한복음의 흐름을 바꿔 놓는 중요한 사건이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씀을 듣고 가셨을 때는 이미 나서로가 죽은지 4일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찾아가셔서 죽은 나사로의 누이가 되는 마르다를 만나십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예수님께 아주 슬픈 목소리로 또 하소연하듯이 그리고 살짝 원망이라도 하듯이 주님 왜 빨리 더 빨리 오지 않으셨나요 하시면서 주님께서 만약에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굉장한 믿음의 표현도 되겠고 예수님 왜 더 빨리 오셔서 오빠를 살려 주시지 왜 이제 오셨어요 하는 그런 느낌도 있습니다. 그러나 22절에서 마르다가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께 무엇이라도 구하시면 주실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자 마리아 마르다가 이런 말을 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믿음, 또 그들이 갖고 있던 상식을 표현하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아나리라 말씀하시니까 그 누이가 좋아하는게 아니고, 오빠가 살아난다고요? 정말요? 하면서 깜짝 놀라서 감격하는게 아니라 좀 시큰둥해요. 마지막 날에는 다 살아난다. 이것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상식적인, 구약 성경으로부터 내려오는 믿음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르다에게 실제로 소망과 능력이 되지는 못하는 거죠. 오빠가 살아난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는데 마지막 날에는 살아나겠죠 알아요. 이런 느낌입니다. 마지막 날에 있는 참된 소망이 되는 부활이 백성들의 어떤 지식으로만 있는 것이고 아직까지 나에 살아 있는 소망이 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다, 이것은 백성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 주시는 것은 그것이 마지막 날,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마지막 날에는 사람들이 다 살아날 거예요. 나랑 상관없죠. 이런 것처럼 언제 있을지 모르는 먼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25절과 26절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부활의 메시지를 한 눈에 좀 볼 수 있겠습니다.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 이것을 내가 믿느냐. 마지막 날에는 살아나겠지요 하니까 예수님이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나 예수 그리스도 바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마지막 날이라고 멀리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임재해 있는 예수님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 다음에 26절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니. 이 25절과 26절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25절에는 예수님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성도들도 죽지요. 우리들의 부모님, 조부모님, 성도들도 죽으면 무덤에 묻힙니다. 그런데 26절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 두 말씀이 어찌 보면 모순인 거 같습니다. 죽는다는 말씀인지 안 죽는다는 말씀인지 두 말씀이 조화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두 말씀을 이렇게 이해해 보면 좋겠습니다. 25절의 말씀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 죽은 사람을 옆에서 보는 사람이 있어요.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잖아요. 이 25절의 말씀은 옆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 그래서 죽은 사람을 지켜보는 가족과 친구들의 시선에서 보면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 이 말씀은 누구의 입장인고 하면 그 죽는 당사자의 입장입니다. 죽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살아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죽지 않아요. 죽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그 사람이 죽지만 정작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 끝이 아니고, 무슨 영원한 망각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의 품에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복된 일이고 사실 우리가 상상도 못할 일이고 다만 우리가 소망을 갖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성도들에게 하나님 주시는 가장 큰 약속이고 복이고 우리들에게도 모두 이 날이 올 것입니다. 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죽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로 예수님 품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모순이 되지 않고 누구 시선이냐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에도 사랑하는 가족들, 친지들 가운데에 또 이미 주님 품으로 안기신 분들이 계실 것이고 또는 앞으로 분명히 그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입니다. 지금 주님 품에 앉으신 분들 우리들의 조상들 부모님들이 지금 주님 안에서 이 가장 큰 복락,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영광과 큰 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돌아가신 성도님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돌아가신 성도들은 지금 잠을 자고 있다고 합니다. 잠 자고 있다는 표현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렇게 지금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 있다가 예수님 다시 오시면 마지막 날에 무덤이 열리고 다들 들림받는 그날에 깨어난다, 지금은 잠자고 있다는 그런 견해가 있는데 저는 거기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성도들이 다 잠자고 있다면 베드로나 바울이나 요한 같은 사도들도 지금 장자고 있다는 말인가? 좀 이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이 땅에 계실 때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 있고 그때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대화를 한 것인데 그분들이 지금 잠자고 있다는 말입니까? 잠자고 있다가 그때 깨어서 대화하고 또 잠자러 갔습니까? 돌아가신 분들이 지금 잠자고 있다는 건 우리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죠. 우리가 무덤을 보면서 표현하는 말이 그렇지, 하나님 보시기에 그분들은 이미 영광 가운데에, 주님 주시는 가장 큰 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주님 앞에서 가장 복된 성도의 복을 복에 참여하고 계시죠. 그렇게 죽는 그 순간이 두려움이 아니고 그 순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가장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 앞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히 맞는 것이지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내가 믿느냐. 이렇게 말씀하 죽은 자의 부활은 기독교의 가장 큰 소망이고 가장 큰 좋은 소식이고 모든 성도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친히 살아나심으로 먼저 보여 주셨고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단어의 특이한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 부활했다고 하는가? 1인칭 내가? 2인칭 당신이? 성경에서는 누군가가 부활했다는 말의 주어는 반드시 3인칭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부활했다는 동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부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부활을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증인이 나가서 그 소식을 전하는 것이죠. 부활 사건에는 부활하는 당사자가 있고 반드시 부활의 증인이 있습니다. 그 살아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이 두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 때에는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을 말씀하시는 것이 임박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목숨 걸고 신속하게 만사를 다 제쳐 놓고 복음 전하는 거거든요.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 지금 마지막 때가 다 되었다. 그래서 때가 다 되었으니까 회개하라. 이것이 신약 성경의 메시지잖아요. 예수님 곧 오십니다. 사실 우리들은 이때로부터 2000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잊어버린 감이 없는데 본래 신약 성경의 정신대로 말하면 마지막 날의 부활이 곧 있을 것입니다. 언제일지 몰라요. 곧 임할 마지막 날의 부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초대 교회 때 성도들이 어떤 소망을 갖고 있었는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들 가운데 가족 가운데 또 돌아가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부모님과 형제 자매와 또 친구와 심지어 사랑하는 자녀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에 슬픔이 있지만 곧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이 잊혀진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 곧 오시면, 마지막 날이 오면 그들이 곧 살아나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원래 기독교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과 내가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강력한 전통인데 지금 우리는 이걸 잃어버린 면이 있습니다.
이것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관계 있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인데 죽은 그 사람이 살아날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날 거예요.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이겠습니까? 죽었다가 부활하는 분, 그 사람과 내가 다시 만날 때에 나와 그 살아난 사람의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서 부활이라는 양상이 몇 가지로 나뉘게 되겠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 부활하는 사람,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과 그 부활을 보는 사람의 관계가 첫 번째 원수지간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죽인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내가 죽였는데 그 사람이 살아난 겁니다. 어떻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해서 죽였는데 살아났으면 나한테 부활은 두려운 소식, 심판입니다. 내가 죽여서 이제는 괜찮겠지 했는데 그 사람이 일어나서 증언할 거 아니겠습니까? 헤롯 왕이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는 소식들 들리니까 헤롯 왕이 뭐라 그러냐면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내가 세례 요한을 죽였는데 소문 들어 보니까 비슷한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헤롯 왕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았네. 부활은 이렇게 범죄자들, 살인자에게는 두려운 심판의 소식이 됩니다.
두 번째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죽인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를 죽였는데 이번에는 이 범죄자가 회개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너무너무 잘못했다.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을 죽게 했는데 내가 너무 잘못했는데 용서를 구할 길이 없는 겁니다. 이미 피해자는 죽었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겁니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이 범죄자에게 부활이 복된 용서의 소식입니다. 내가 죽여서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 죽은 사람이 살아났고 내가 그 사람 앞에 가서 내가 나를 용서해 주세요 하고 그 살아난 사람에게 용서받으면 나의 죄가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식은 그 원수 지간이었지만 내가 용서받고 싶어 하는 죄인이 부활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에게는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 됩니다.
세 번째 시나리오. 부활한 사람과 또 부활을 보는 사람의 관계. 이번에는 이 두 사람이 원래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을 때입니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죽어서 너무나 애통해하고 있는데 그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영 못 볼 줄 알았던 그 사람이 살아나서 이제 만난 거예요. 말로 할 수 없을만큼 큰 기쁨의 소식이 되겠죠. 오늘 본문에 나사로와 그 누이들의 관계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만이 우리들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대 불가능한 영역이지만 하나님은 하십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십니다. 부활의 소식은 우리들에게 경우에 따라서 심판과 두려움의 소식도 될 수 있고 나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기가 막힌 기회가 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나의 가장 큰 슬픔과 상실이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는 가장 복된 소식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예수님께 다 일어났어요. 예수님을 죽인 원수들은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서 떨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죽였지만 예수님께 나를 용서해 주세요 하고 회개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잃어버렸지만 살아나셔서 되찾았습니다.이 세 가지가 예수님께 다 일어났습니다. 성경의 부활의 복된 소식은 우리들에게 기가 막히게 놀라운, 우리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좋은 소식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들의 죄가 드러나서 주님 앞에 심판받게 되지만 한편으로 우리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죽었던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모든 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잃어버려서 너무나 슬퍼했지만 다시 그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우리가 돌려받았기 때문에 가장 그 놀라운 회복과 치유의 순간이 됩니다. 우리들이 죽음으로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회복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평생 그 마음의 괴로움을 안고 무덤까지 가겠지요.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부활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죽음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안 보일지라도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거는, 영원히 흐를 것 같은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죽음은 무정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저 사람은 죽으면 안 되는데 하는 그런 사람일지라도 죽음은 아무런 차별 없이 그냥 데려갑니다. 너무나 무정하고 잔인하고 비인간적입니다. 저의 물리학과 친구가 있었습니다. 대학교 때 정말로 똑똑하고 이름 자체가 김영재였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보면서 내가 물리학을 해도 되나 고민을 했었습니다. 보통은 수업을 듣고 학점을 따는데 그 친구는 시험을 패스에서 학점 따고 그랬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 유학 와서 블랙홀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모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젊은 총망받는, 한국 물리학계의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모두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포항공대에 세미나 하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모릅니다. 저 두뇌가 저렇게 가면 안 되는데,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까운 것은 둘째 치고 인생이 너무나 무의미한 것입니다. 죽음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그렇게 모든 것을 앗아가고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마다 안기는 것이 죽음입니다. 우리의 원수죠. 이 죽음을 이기실 분은 하나님밖에 안 계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부활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죠.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우리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전하기를 원합니다. 지금도 이 소식을 들어야 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 가족을 또 자녀를 잃어서 아무 소망 없이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에게는 예수님 부활 소식 이것 밖에는 약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그분들에게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 소식 전하지 않고 우리가 뭐 하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는 치유가 없어서 죽을 때까지 괴롭게 살아야 되겠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셔서 반드시 사랑하는 가족을 자녀를 다시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이 세상에 이것을 전하라고 우리들을 교회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이 가장 귀한 소식을 우리들이 받았기 때문에 전하기 원하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섬기고 사람들에게 또 우리들의 선한 행실로서 교회로서 책임을 다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는 학생 때 역사를 안 좋아했습니다. 연대를 외울 것도 많고 복잡한 사건들이 많고 사람 이름도 많아서 암기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안 좋아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역사가 얼마나 재미있어졌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전해야 하는데 세계 지도를 보면 지금도 예수님 믿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많습니까? 중동에는 대부분의 나라가 이슬람이고 아시아에는 또 힌두교, 불교도, 국가도 많이 있습니다. 왜 이 나라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까? 그런 것이 당연히 궁금해졌고 그 배경을 알려니까 역사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서유럽 역사는 옛날에는 저한테는 굉장히 먼 나라 이야기였거든요.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는 이야기가 멀게 느껴졌는데 예수님 믿고 나니까 그 기독교 사회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훨씬 이게 잘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역사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서양의 역사의 아버지라고 하는 헤로도투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스인인데 헤로도투스가 가진 질문이 있었습니다. 너무 궁금한게 뭐냐면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전쟁을 하는데 페르시아는 그 당시 세계 최대 최강에 막강한 나라고 그리스는 기껏해야 몇몇 산골의 도시 국가 몇 개가 연합한 것인데 사이즈로도 말도 안 되게 비교도 안 되는데 어떻게 그리스가 이겼냐는 것입니다. 페르시아가 당연히 이길 줄 알았는데 졌거든요. 너무 궁금한 것입니다. 그래서 헤로도투스가 이 질문에 대답을 얻기 위해서 실제로 찾아갑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그리스 여러 지역들을 여행하고 기억이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탐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결과를 쓰고 제목을 히스토리라고 붙였습니다.이 히스토리라는 말의 뜻은 탐구, 연구라는 뜻입니다. 그 자기가 연구 보고서 이렇게 쓴 느낌이거든요. 그런데 그 말에서 히스토리가 역사가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베드로를 심방하려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이 있는데 심방한다는 말은, 실제로 찾아가지요, 이 성도님이 잘 계시는지 그냥 전화로만 묻는게 아니라 실제로 찾아가서 잘 있는지 본다면 탐구하는 건데 그게 히스토리입니다. 그만큼 실제로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이야기하고 그것이 원래 역사라는 것이지요. 그니까 역사는 사람 사는 이야기. 결국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스토리들이 많이 있겠지 않겠습니까? 그 얘기니까 사실 얼마나 흥미진한지 모릅니다.
성경은 역사적인 문서이고 우리 기독교는 역사적인 믿음입니다.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이슬람교도 그렇습니다. 역사적인 신앙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실제로 역사 인류의 역사 가운데 일하셔요. 그래서 구약에서도 모세 때 출애굽 당시에 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이집트에 있다가 실제로 해방되어서 나오고 이스라엘 왕국에 세워지고 하는 그런 역사들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그 나라들을 세워 주시고 사람들이 그 왕국 가운데 살도록 일일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신앙이지요. 신약 성경 예수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는 때는 로마 제국이 탄생하는 시기와 똑같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로마가 이전에는 공화국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공화국이 거의 없는데 로마는 원래 공화국입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SPQR이라는 문자를 씁니다. 그건 뭐냐면 세나투스 그러니까 의회죠, 그다음에 포풀루스 백성들 로마누스 로마의 의회와 백성에게 충성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로마 군인들은 황제보다는 의회에 충성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는 안 그렇지만은 그렇게 로마가 오랫동안 공화정이었다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 등극하는 그때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거거든요. 그다음에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는 2세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입니다. 로마 제국의 탄생지 탄생기와 또 전성기가 신약 성경에 배경이 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다른 종교들 가운데는 역사적이지 않은 종교도 있어요. 역사랑 별로 상관이 없고 어느 시대 어느 어 나라에 갔다 놔도 큰 그런 역사적인 배경에 상관없는 종교가 있는데 예를 들어서 불교가 그렇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언제 어느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 가르침이 중요하다고 얘기하지.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 중에 첫 번째는 인생은 괴롭다, 두 번째는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이다, 이렇게 일반 원리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교는 어떤 철학적이고 교훈적인 교리 가르침이 중요한 거지 그 역사적인 배경은 중요하지 않아요. 부처님이 언제 어디서 그런 얘기를 하셨다고 해도 차이가 없거든요.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는 역사적인 배경을 빼놓으면 설명할 수가 없어요. 사실은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이 굉장히 강하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솔직하게 그리고 마음 열고 읽어 보면 이 말씀을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나? 도저히 우리가 이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말씀이에요. 예수님께서 오늘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십니다. 사람이면 마땅히 부모님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해야 되잖아요. 저도 제 자녀들을 당연히 너무 사랑하고 사실은 하나님을 위해서 애쓰고 시간 드리는 것보다 제 자녀들을 위해서 드리는 시간이 더 많아요. 자녀들을 당연히 사랑해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니까 제 마음속에 예수님 앞에 그럼 죄책감이 들죠. 예수님은 아들이나 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는데 정작 내 삶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너무나 극단적이고 강한데 이런 말씀을 도대체 누가 그대로 순종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지요. 예수님 말씀에 가진 건 모두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얼마나 되겠어요? 눈이나 손이 죄지으면 눈 빼라, 손 잘라 그런 말씀들 너무나 극단적이란 말이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이렇게 완전한 온전한 헌신을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우리가이 말씀 듣고 그러면 진짜로 그렇게 하자 이러면서 부모님 버리고 자녀 팽개치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럼 또 안 된다고요. 이 말씀 읽고서 자녀들 신경 안 쓰면 안 돼요.
극단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순교를 당장 해야 되는 경우. 예를 들어서 일제 시대 때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감옥에 갇혀서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으면 순교해야 돼요. 예수님 안 믿는다고 한마디 하면 풀려나요. 그런데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끝까지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한 그 사람은 순교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자녀들이 있는 거예요. 나는 순교하면은 하나님께 가서 영광이고 다 좋다 이거예요. 내 자녀들은 어떻게 하나요? 눈에 밟히지 않겠어요? 자식들이 만약에 방문 오면 그 자녀들 보는 심정이 어떻겠어요? 그럴 때이 말씀이 적용되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그런 순교해야 된다거나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이 돼요.
그런데 이것을 분별할 필요가 있는데 이 역사적인 상황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 때는 로마 제국이 아주 최전성기이고 그 때문에 다른 유대인 같은 이런 다른 이방 민족들을 억압하고 군사적으로 이렇게 다스리는 그런 때이기 때문에 이 당시에 유대 사회가 굉장히 불안해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위기 상황이고 언제 누가 잡혀가서 죽었다 그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십자가 형이라는 것이 정말로 제일 끔찍한 형벌인데 이거는 그냥 아무런 그냥 보통 범죄자들을 그렇게 굳이 죽이지 않아요. 그냥 도둑질하다 잡혔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형은 로마 제국에 반역했을 때 본보기로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감히 로마 제국에 대해들면 이렇게 된다는 걸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사람을 멀쩡한 사람을 나무에 못 박아서 높이 내달아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위에서 끔찍한 광경을 사람들이 보면서 몸소리를 치면서 아, 나는 로마 제국에 정말 순종해야 되겠구나 그런 힘과 군사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그런 불안하고 위험한 사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이번 주말에 또 십자가 형이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무덤해요. 워낙 그런 일이 많으니까 놀라지도 않습니다. 어 그래 몇 명인데 그러는 거지? 세 명이라는데. 어 그래? 저번에는 800명이었는데 뭘, 이런 식입니다. 실제로 어떤 유대 왕이 나쁜 거를 로마인들한테 배워 가지고 자기 동족인데 자기한테 반대한다고 800명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하나님의 의에 목 마르고 의해 줄인 사람은 정말 거의 제정신으로 살기가 힘든 때인 것이지요. 이 악한 세상 그냥 외면하고 그냥 나는 내 생활만 하면서 그냥 소서민으로서 살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조금이라도 갈망하는 사람은 도저히이 눈으로 보 보이는 현실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그런 때였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붙들려서 십자가 달리기 위해서 끌려가실 때 그 예수님을 보고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막 통곡을 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여인들을 보면서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 그러셔요. 왜냐면은 예루살렘이 곧 군대에 둘러싸일 거예요. 그래서 다 파괴되고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지 않고 다 파괴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 내다보시고 그 도시가 나라가 완전히 황폐되고 사람들이 다 죽고 노예가 되는 미래를 아시기 때문에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셔요. 그런 때인 것입니다.
그런 험악하고 위험한, 언제 누가 죽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때가 사실은 인류의 역사를 보면 더 많습니다. 그런 때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은 하나님 나라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제 가까이 온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지 몰라요. 이제는이 악한 어둠과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이 이제는 끝이 나고 하나님 나라가 곧 온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희망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따라 나서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 나는 예수님 따르고 싶은데 저희 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셨으니 아버지 장사하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 된다 그러시거든요. 그만큼 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극단적인 요구를 하시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거는 그야말로 모든 것 다 버리고 예수님 따르고 심지어 부모와 자녀까지도 뒤로 하고 예수님 따라야 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그리고 실제로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들은 다 구체적인 역사의 그 상황이 있습니다. 아무한테나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그런 말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셔요. 누가 들어도 맞는 말이야. 음. 그런데 실제로 실제로 와닿지는 않는 그런 말씀. 그런 것은 성경에 없어요. 하나님 말씀하실 때는 각 사람에게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셔요. 나 자신에게도 구체적인 상황이 있지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있는 나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런 배경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복음서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지금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그 질문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 당시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 로마 제국의 그 폭력적인 지배를 받고 있고 근데 그 와중에 또 독립운동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래서 열심당원이라는 사람들은 계속 독립하기 위해서 무장 투쟁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뭐가 힘이 있어서 뭐 군사력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게 아니고 진짜 깡으로 좋게 말하면 믿음으로 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약한 상태인데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구원해 주시는 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또 우리 구원해 주실 거야 하면서 믿음으로 로마 제국에 말도 안 되는데도 군사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렇게 되니까 사회는 더 불안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평안한 날이 없는 그런 사회에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분별을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때는 감사하게도 그렇지는 않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부모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예수님 따라야 문자대로 그렇게 할만큼 그렇게 해야 되는가?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하면 그 안 됩니다. 그거는 성경 말씀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있고 그런데 또 각 사람에게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비교적 평화를 누리고 있고 2차대전 한국 전쟁 이후에 세계가 비교적 그래도 큰 그림으로 보면 미국과 한국과 이렇게 우리 세대는 특별히 또 저의 부모님 저와 저의 자녀 세대는 그래도 비교적 전쟁에서는 조금 어 거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이 시간에도 전쟁이이 세계에 있지만은 그런데 이게 도리어 예외적인 것이죠. 그러니까 언제 또 이런 위험하고 전쟁이 있고 이런 상황이 또 닥치더라도 놀래서는 안 되고 어 이게 웬 일이야? 깜짝 놀래서 마치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허둥거릴 일이 아니고 아 이것이 예수님 말씀하시는 그 상황이구나 그렇게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이 세상에 미련 두면 안 되겠지요.이 세상이 너무 좋은 거예요. 세상에 내가 가진게 너무 많아요. 그래서 와 이거를 이제 다 버려야 돼. 너무 아까워. 이렇게 살게 된다면 그것은 예수님 원하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물론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 주시는 일용할 양식과 우리들의 삶을 위한 우리들의 집과 또 차와 그런 것 다 필요합니다. 학교와 직장과 다 필요해요. 그런 것까지 다 버려라. 그것은 도리어 지금 우리들의 상황에서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예수님 믿기 때문에 다 버리고 직장도 학교도 다 포기하고 다 헌금하라고 어떤 종교 지도자가 가르친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분별을 할 필요가 있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만약에 이런 종말의 상황이 지금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언제라도 가볍게 척척 짐싸서 주님 따라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늘 그렇게 한다고 하잖아요. 그분들은 언제나 도망다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짐이 무겁지 않아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그런 삶이 몸에 비어 있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나는 가진게 너무 많아, 떠나기가 떠나려고 하니까 뒤에서 잡아당기는게 너무 무거워, 그런 삶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의 일상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평소에 물론 이런 환난과 또 마지막 때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우리들은 일상 가운데서 나의 삶을 성실하게 살고 양식을 위해서 일을 해서 나의 빵을 벌고 이게 중요합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이런 일상적인 생활을 우리들은 여전히 성실하게 영위합니다. 그게 크리스천의 삶이에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과하지 않게 그러나 나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고 성도들을 이웃들을 섬기는데 있습니다.
우선 순위는 중요하지요. 그러면서 나의 삶을 허비하지 않고 시간을 아껴서 하나님을 위해서 또 나의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매일매일 주님 앞에서 사는 삶 하루하루가 유별나지 않아도 똑같은 삶 가운데서도 주님 앞에서 주님 오늘 하루도 나의 삶을 지켜 주셔서 내가 이렇게 일할 것이 있어서 일을 했고 이렇게 빵을 벌어들여서 내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일상의 삶이 있지 않습니까? 중요합니다. 이것을 행하시고 결혼할 일이 있으면 결혼하시고 자녀를 낳으시고 이렇게 일상적인 삶을 살지만 마지막 때가 언제라도 올 수 있으니까 우리들은 준비되어 있고 우리들의 삶에 언제라도 그렇게 주님 따를 수 있는 그런 무게 중심 우선 순위는 분별해야 되겠다. 그것이 바람직한 성도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주님 앞에 어 겸손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번 여름 수련회를 통해서 오늘까지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것을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들에게 가장 귀한 것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그 사명을 위해서 부름받았으니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고 주님 앞에서 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우리들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람들이 흔히 천국이라 그러면 죽고 나서 가는 데로 생각합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런 찬송가 있죠. 그게 장례에 대한 찬송가예요. 죽고 나면 천국에 간다. 그 말 맞아요. 틀린 말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는 그 정반대예요. 죽기 전에 천국이 온다 그러잖아요.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게 아니라 죽기 전에 천국이 온다 그러셔요. 그러니까 포인트는 천국이 우리가 죽고 나서 가는게 아니고 이 땅으로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 있을 때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이미 천국을 살고 경험해야 되겠죠. 그런데 여기서이 천국을 우리가 잘 이해를 할 필요가 있죠. 이 천국이 어떤 의미냐?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러면 내가 직장이나 학교나 여기에서 천국을 한번 이루어 보자. 그렇게 적용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좀 애매해요. 어디까지 그럼 천국인가? 내가 직장에서 예를 들어서 일을 하는데, 내가 만약에 비즈니스를 하면 어디까지 천국이냐 사실은 그게 기준이 애매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국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거랑 좀 달라요. 내가 직장 생활하고 학교 생활하고 가정 생활하는데 거기에서 천국을 좀 이루어 보자. 그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니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런 삶을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내 직장을 학교를 만들어 보자. 그렇게 사람들이 이해를 하고 또 이렇게 많이 해요. 그런데 좋은 일이지만 그런데 예수님이 정확하게 무슨 말씀하셨는지 좀 보면 좋겠다. 그런 그런게 지금 목적이에요.
그래서 이 천국에 대해서 올해 교회 목표로 삼고 하는데 지금 하는 얘기가 사실 굉장히 중요한 마태복음 10장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이 천국에 대해서 제자들을 실제로 보내시는 대목이거든요. 이거를 보면 천국이 예수님이 어떤 것을 생각하시는지 우리가 알 수가 있겠죠. 4절까지는 예수님이 12제를 뽑으셔요. 12 제자들 이름이 쭉 나와요. 예수님의 제자들 하면은 좀 엉성할 때가 많아요. 실수도 많고 자기들이 다투기도 하고 예수님한테 혼나고 그러는데 그렇게 처음에는 좀 부족한게 많았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하는 사람들이 되는데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굉장히 큰 능력을 주시거든요. 그러니까 대단한 분들이에요 사실. 근데 예수님께서 12제자 삼으시고 명령하시는 말씀이 여기에 나오죠. 5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에게도 들어가지 말고 6절 오히려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이 왜 꼭 이스라엘에만 가라고 하시냐? 다른 사마리아인도 있고 다른 이방 나라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이스라엘 집에만 가라 하시는데 예수님이 꼭 다른 민족을 배척하셔서 그런 뜻이 아니고 뒷부분에 읽어 보면 나오는데 이게 시간이 급해서, 때가 다 되어서 그래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시거든요. 얼마나 가까이 왔는가? 진짜 가까이 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스라엘 마을도 다 돌아다닐 시간이 모자라요. 그만큼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 집으로 먼저 가라. 그런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유대라는 말도 있잖아요. 유대라는 말은 외국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에요. 외국인들은 우리를 코리안이러고 하죠. 근데 우리는 한국 사람이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은 유대인이라고 하지 않고 만약에 누가 유대인이라 그러면 외국 사람이 그렇게 부른다는 뜻이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뜻으로 부르시는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집에 가라 그러시죠.
그 다음에 7절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포인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마을로 다 보내시죠. 누가복음에 보면은 두 명씩 두 명씩 짝지어 보내셔요. 혼자 가면 힘들고 두 명씩 두 명씩 아마도 짝지어서 마을 마을마다 보내시는데 그럼 가서 제자들이 뭐 하냐? 이 얘기 하라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표준 새번역에는 너희들이 가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여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래서 그런 그들이 할 일은 8절이 되겠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한 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져받았으니 거저 주라. 이것이 제자들이 할 일입니다.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마을마다 중앙에 가면은 시청도 있고 시장도 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가 있을 거예요. 거기에 가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능력을 먼저 주셨겠지요. 가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병든 자를 고쳐 주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고 이런 능력까지도 주십니다.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게 이런 일들을 막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마을 사람들이 제자들이 이렇게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라겠죠. 그리고 병든 사람들 이렇게 귀신 들린 사람들을 데려올 거예요. 그럼 제자들이 그들도 다 도와주겠죠. 그러면 사람들이 막 모였어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으면 아 이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면 저분들은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들이니까 저분들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들어보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이렇게 하신다고 사람들을 알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7절에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알아들어요. 그분들은 구약 성경을 기본적으로 이제 알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들은게 많으니까. 그분들은 그게 자기들의 역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걸 그분들이 다 알거든요. 그런데 뭔가 멀리 느껴졌던 거예요. 천국,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아는데 뭔가 멀리 느껴졌었거든요. 그리고 삶은 힘드니까 그냥 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데 우리가 이사야 52장의 설교 말씀 들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런 메시지가 이제 제자들 통해서 왔고 그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는 거예요.
8절에서 특별히 귀신을 쫓아낸다는 그런 말씀이 있어요. 성경에서 구약에는 별로 안 나오는데 신약에서 갑자기 많이 나오는 단어들이 있어요. 중요한 단어들이죠. 예를 들어서 신약에는 부활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많이 나와요. 그리고 성령 이런 단어도 갑자기 많이 나오죠. 그런데 신약에서 또 귀신이라는 말도 갑자기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귀신이라는 단어가 한국말로는 귀신이라 그러면 옛날에 전설의 고향 그런 느낌이 있어 가지고 좀 상상을 하니까 한국말로는 오해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원래 귀신은 그 디먼이거든요. 데몬, 디몬이라는 단어인데 유대인들에게도 이 단어가 외래어예요. 헬라어거든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원래 귀신이라는 디몬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원래 히브리 말이나 아람어에는 디몬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그냥 악한 영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귀신이라는 단어가 헬라어에서 넘어온 외래어를 쓰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하게 헬라어 단어가 들어와서 그런 개념이 이게 실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 디몬 걸렸어, 나 귀신 걸렸어. 이렇게 이런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던 거예요. 사실 무서운 거고 신기한 거거든요. 어떻게 어떤 단어와 생각이 실체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영향을 주느냐 이런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런 영적인 세계를 드러내신 것이고 그리고 기도하면서 그런 것들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또 하나님의 사랑으로 쫓아내는 것을 보여 주셨죠.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을 인해서 고통받는 것을 주님께서 구원해 주셨는데 이 귀신 디몬이라는 헬라어는 어떤 영적인 현상, 사람이 귀신에 들려서 아프고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고 그런 것도 우리들이 생각해야 되고 또 한편으로는 근데 의미가 더 커요. 사람들이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귀신 쫓아내는 그런 거를 많이 생각을 하는데 그런 의미도 물론 중요하고 그런데 좀 더 많은 의미가 있어요. 뭐냐면 헬라어 단어가 들어왔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헬라 문화가 들어오고 헬라적인 그런 사상이 들어온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구체적으로 뭐냐면 헬라문화가 어떤 유대인이나 이런 다른 민족에 들어갈 때 헬라 문화를 세우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어요. 대표적으로 극장이 극장 여러분들께 이렇게 저는 오페라를 너무 좋아해서 오페라 보러 가거나 아니면 뮤지컬이나 보면 다 극장이고 요즘은 케이팝 그래서 노래하고 춤추고 하는 것들이 다 무대잖아요. 다 극장인데 그게 원류가 그리스에서 그런 걸 너무나 잘한 거죠. 그래서 지금 영화에도 헬라에서 그런 예술적인 문화적인 단어 굉장히 많이 왔어요. 예를 들어서 뮤직, 심포니, 오케스트라, 다 헬라어예요. 그러니까 그런 예술적인게 와서 무대에서 다 공연하는 이런 것들이 굉장히 헬라 문화의 아주 좋은 거거든요. 옛날에는 다 무대에서 실제로 연극하고 노래하는데 지금은 TV가 되고 영화관이 되는 거죠. 사람들이 다 영화보러 가고 집에서 여러 가지 비디오 보고 그런 것들이 요즘은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그게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외래 문화가 확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극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확 사로잡는 거지요.
또 대표적인 헬라 문화가 뭐가 있냐면 운동 경기장이 있어요. 올림픽 아테니에서 시작하잖아요. 운동 경기 하면 그 넓은 운동장에서 막 젊은이들이 와서 막 달리고 그런 운동 경기가 대표적인 헬라 문화예요. 여러분 그런 운동 경기 구경하는 거 좋아하시나요? 저는 야구장에 한번 가 봤습니다. 워싱턴 내셔널 야구장에 가 봤는데 재밌더라고요. 야구 경기를 실제로 하는 것도 재밌지만 스크린 보면서 야구 경기 보면서 즐겁게 놀다 왔는데 미국 사람들도 풋볼이나 그런 거에 얼마나 열광을 합니까? 운동장에 다 모여서 빽빽하게 관종들이 응원하는 데서 선수들이 운동하면 다들 열광을 하죠. 운동장 이게 대표적인 헬라 문화예요. 또 하나는 공중 목욕탕, 그런 것들이 유대 사회에 들어온 거거든요. 그래서 그전에는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제사드리고 제사장에 이런 설교를 듣고 기도를 듣고 이런 것이 하나님 섬기는 것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들한테 헬라 문화가 확 들어온 거거든요. 이게 알렉산더 대왕 정복으로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역사를 앞으로 다루려고 하는데 역사를 알아야 됩니다. 특별히 알렉산더 대왕을 알아야 되고 그로 인해서 헬라 문화가 들어오는 걸 알아야 돼요. 알렉산더가 우리 성경에 나와요. 이거 성경 퀴즈 하면 좋았는데 알렉산더가 우리 성경에 나온다. O X 하면 정답은 O, 나오는데 이름으로는 나오지 않고 다니엘서의 어떤 뿔 이렇게 나옵니다. 그니까 비유로는 나오는데 어쨌든 나오는 거죠. 그만큼 중요하고 그래서 헬라 문화가 알렉산더 대왕이 갑자기 정복을 하면서 밀고 들어오는 거지요. 그래서 이건 막을 수가 없어요. 힘으로 들어오는 걸 어떻게 막겠어요? 그런데 힘으로도 막을 수 없지만 그래서 그 사람들이 와서 막 짓는데 극장 지어서 공연하고 운동 경기 하면서 열광하고 목욕하라 그러고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유대인뿐 아니라 어떤 민족이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사람은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기겠죠. 가서 즐기는게 뭐 어때? 그런 사람들도 당연히 많이 생겼어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아 안 되는데, 이거는 외국문화이고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데 방해가 되는데 하면서 막 거부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되겠죠. 어느 민족이나 다 그래요.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너무너무 그런 거를 좋아해요. 우리가 이 우수한 헬라 문화를 받아들여야 된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너무 걱정하는 거죠. 안 되는데 지금 이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데 고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지금 우리는 미국 문화 안에 있고 사실 미국이 서양 문화의 대표적인 그리고 가장 강한 그런 문명으로 되어 있고 우리들은 그 안에서 살고 있죠. 그러니까 우리들한테는 이 서양 미국 문화가 그냥 공기 같은 거죠. 우리가 이것 없이 살 수가 없고 맨날 보는게 그런 거고 보고 또 그렇게 살죠. 그런데 한 번쯤은 그래도 우리가 좀 스톱하고 생각은 해야 되죠. 이게 정말 나의 하나님 섬기는데 도움이 되나? 요즘은 K문화가 너무나 세계적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 내용이 그래도 정말 하나님 섬기는데 도움이 되나 그런 생각은 해야죠. 근데 안 그럴 때가 많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는 대개 그런 거잖아요. 사람들이 자꾸 많이 보고 페이를 해야 되니까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점점 더 매운 거, 내용들이 너무나 정말 매운 맛 진짜로 이렇게 겁나는 그런 내용들도 너무너무 많죠. 자극적인 거. 근데 지금은 그게 너무나 흔해져서 우리들이 익숙해진 거 같아요. 그런데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은 해야 되겠죠. 그런 것들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데 도움이 되나? 안 될 때가 많을 텐데, 절제를 해야 될 텐데 그런 고민을 해야 될 거예요. 어거스틴도 그래요. 그분은 라틴 문명에 있었지만 젊었을 때는 방탕해서 살다가 한 30살 때쯤 회심을 하거든요. 30살 때쯤 완전히 사람이 변해서 신앙의 사람이 되고 나중에 그걸 고백록으로 쓰는데 자기가 하나님 믿기 전에 어떻게 방탕했는지 쓰면서 자기가 연극을 좋아했어요. 내가 하나님을 잘 섬겨야 되는데 연극을 보러 가 거기에 비극의 여주인공의 슬픈 것을 보면서 내가 울었는데 내가 내 영혼을 위해서 울지 않고 지옥갈 내 영혼을 위해서 울어야 될 텐데 그게 아니라 연극 중에 그런 여주인공의 슬픔을 보면서 울었으니 하나님 부끄럽습니다. 그런 내용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세상 문화 가운데 있는 그 세상을 보면서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죠.
이렇게 되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돼요? 점점 죄의식에 빠지는 거예요. 점점 헬라 문화는 이 세상에 주도하는 문화가 되고 그것 없이 살 수가 없고 쫓아낼 수도 없고 쫓아낼 힘도 없고 주의 자녀들은 다 그런게 좋다고 따라다니고 마음속으로 양심은 찔리고 하나님께는 부끄럽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죄의식에 눌리는 거죠. 예수님이 제사들을 부를 때 베드로가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잖아요. 베드로뿐 아니라 성경에 예수님이 죄인들을 부르시잖아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저런 죄인들이랑 세리들이랑 예수님이 같이 식사한다고 비난하지요. 사람들이 왜 자꾸 죄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를 하고 나는 죄인이다 그런 얘기를 하냐면 그 당시에 이런 헬라 문화가 큰 역할을 했어요. 그런 세상 문화는 문화대로 사람들을 누르고 그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께는 죄송하고 하니까 죄의식이 가득할 수밖에 그리고 그 와중에서 사람들이 아 나 데몬 걸려서 나 귀신 들렸어 이런 말이 나와요. 여기서 귀신이라는 단어가 그런 영적인 권세 영적인 형상 그런 의미도 물론 중요하고 그런데 이런 세상 문화 그 유대인들에게 헬라 문화가 들어와서 그들에게 실체가 되어서 귀신이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구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그런 세상 문화에 얽매이지 말고 거기로 인해서 죄책감 갖지 말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삶이 파탄나지 말고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가 멀리하지 말고 돌아와라. 하나님께 돌아와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사랑을 회복해라 그런 뜻이 있는 거지요. 그런 뜻으로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냈다는 그런 말씀을 우리가 이해를 하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권세를 받았고 예수님께서 예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는 그런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다 가능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했고 사람들이 모이면 전하는 메시지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9절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음이나 동을 갖지 말라. 그런 천국의 메시지를 전하는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되냐면 돈이나 그런 여행 경비를 걱정하지 말고 베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이런 여러 가지 여행한다고 이것저것 챙기지 마라, 그럴 필요 없다, 가는 곳마다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일꾼이 자기들이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까 가는 곳에서 천국을 전하면 너희들에게 모든 너희들이 받을 것이다. 이런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받는 메시지는 이거 하나 딱 기억해 주시면 저는 만족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셨다. 왜 보내셨는가? 메시지 전하라고. 그럼 그 메시지는 뭐다? 천국이 가까왔다. 쉽죠? 간단하죠? 아주 짧은 이 한 문장인데 요거만 딱 전할 수 있으면 성공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제자들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듣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죠? 우리들이 오늘 저녁 그리고 내일 또 이렇게 그런 천국에 가까이 왔다 하는 메시지가 어떤 의미인지 계속 살펴보기를 원하고 우리들이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면서 이 메시지가 나의 것이 되기를 먼저 바라고 그리고 나도 이것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천국은 말 그대로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인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복음이 나를 나의 삶에 먼저 실현이 되고 나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그런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제목은 그 나라로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라를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연약한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오더라도 자기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겠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이 주로 생각하는 것은 어떤 위대한 왕이나 메시아가 와서 적들과 싸워서 왕국을 회복시키고 그 자기들은 거기에 속한 백성이 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뭔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사람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하고 생각하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신다는 것을 전해 주기 원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마태는 이 마태복음서의 저자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어보자 하고 펼치면 제일 먼저 보는게 마태복음인데 사실 본문에는 마태가 저자라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 전승으로서 우리가 아는 것인데 마태는 이 본문에서 자기 자신은 감춥니다. 내가 이 복음서를 썼는데 나는 누구고 그런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아요. 예수님만 드러내기를 원하고 다만 오늘 본문에서만 마태가 자기 자신에서 대해서 쓰고 있지만 그것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그냥 지나가는 느낌이 있지만 그러나 그 중요성은 가볍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 즉 세금 걷는 사람인데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지배자인 로마 제국에 바치는 사람이니까 동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겁니다. 종족을 배신한 사람 그런 느낌이 되겠지요. 또 그 가운데는 부정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걷어서 나머지는 자기가 챙기고 그런 느낌이 있기 때문에 세리들은 다 사람들이 미워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예수님이 부르신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마태가 즉시 일어나서 따랐다고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좀 디테일을 생략했을지는 모릅니다. 뭔가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데 성경에서 간단하게 표현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마태뿐 아니라 베드로나 요한이나 다른 제자들을 주님께서 부르시는 장면들을 보면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그렇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주저하면서 아 내가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런 느낌이 전혀 없어요.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따랐다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뭔가 질문이 많이 돼야 될 것 같거든요. 주님, 제가 따라가는 거는 좋은데 예를 들어서 언제까지입니까라든지 일주일에 몇 시간, 휴가는 있는지, 집에는 언제 올 수 있는지 그런 질문들이 있을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거를 예수님께 물어본 느낌이 없어요. 그냥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자들이 굉장히 엉성한 느낌이 많아요. 자기들끼리 실수도 많이 하고 다투기도 하고 예수님이 책망도 하십니다. 제자들이 굉장히 불완전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지금 존경하고 그들로 인해서 우리 교회가 세워진 것을 감사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비록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따르라 하실 때 즉시 따랐다는 것 이것이 정말로 대단한 믿음이고 우리들이 그분들을 존중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사실 뜻이 명확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 무슨 뜻인지 약간 막연하거든요. 그래서 말은 내가 주님 따른다 하면서도 실상은 자기 생활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는데 그 당시 제자들은 주님을 따른다 하면 문자 그대로 따라다니는 거예요. 따르면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배우고 주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시고 고쳐 주시는지를 다 일일이 보고 따라하는 거지요. 예수님과 같이 생활합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따라다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굉장히 쉬워요.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의 직업을 다 버려야 돼요. 이전에 자기의 생활들 뒤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서 생각은 집에 가 있으면 안 되는 거지요. 매일 집에 전화해 가지고 그 투자한 거 어떻게 됐어?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가족도 버려야 되는 거거든요. 나의 부모, 자식, 부부 다 그런 관계도 다 뒤로 하고 주님을 따라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 엄청난 헌신입니다. 이 엄청난 일들을 제자들은 한 것이지요. 주님께서 그만큼 확신을 주신 것도 있고 그들 모두가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사야서 52장 말씀에서 봤듯이 지금 이 세상은 악한 나라들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당시에 대표적이었고 그 외에도 세상에 수많은 악한 왕들,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고 선한 사람들은 괴로움 당하고 설움 당하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을 보고 싶다. 이 소망이 가장 강렬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귀한 복음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신 것이지요.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니까 두 말 없이 다 제쳐 놓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니까 정말 저분의 가르치심과 저분이 하시는 일과 저분이 사람들 만나시는 것을 보니까 정말 하나님이 저분과 함께 계신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면 정말 그런 것이다. 내가 그것을 볼 거야. 그런 소망이 가장 강렬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 다 제쳐 놓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으니까 오래 하지 않겠지 그런 느낌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하겠어. 몇 달 몇 날일지 모르겠지만 금방 하나님 나라가 올 거라고 하니까 선뜻 따라 나섰던 모습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도 그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마태는 일어나 따랐습니다. 근데 마태가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친구들을 모아서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 같습니다. 원문에는 그냥 집이라고 나오지만 마태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크죠. 그래서 자기 친구들이었던 세리들과 죄인들을 불러서 같이 식사를 하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가 됩니다.이 식사 자리는 사실 굉장히 의미가 깊지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많이 먹이십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먹는 자리를 굉장히 많이 마련을 하셔요.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천국 잔치를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구원과 승리와 용서, 백성들과의 화해를 말씀하실 때에 잔치자리에 비유를 하셔요. 오늘 교독문의 이사야 55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었지 않습니까?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다.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함께 모여서 먹는 이 즐거움이 천국 잔치의 모습이라는 것이에요. 성경에서 먹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저는 사실 성경에서 먹는 거에 대해서 다 모아 가지고 공부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이 천지 창조하시고 동물들과 사람들에게 맨 먼저 하시는 명령이 먹으라 입니다. 이것이 너희들의 먹을 것이다. 먹어야 사니까,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시니까 우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특별히 천국 잔치, 이 세상의 모든 불의가 다 없어지고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주님의 백성들이 그 동안에 고난당하고 있다가 다시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셔서 영광 속에 들어가는 그 자리가 천국 잔치인 거예요. 얼마나 기쁘고 복된 자리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다시 재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는 자리를 마련하시고 또 사람은 같이 먹으면 마음이 열리고 얼굴도 밝아지고 서로서로 대화하지 않습니까? 그런 자리를 주님께서는 자꾸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다 초대가 됩니다. 누구는 올 수 있고 누구는 올 수 없고 그런게 전혀 없어요. 오늘 세리들과 죄인들도 초대가 되었습니다.이 세리와 죄인이라는 단어는 흔히 같이 가지요. 세리는 죄인이라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것은 꼭 무슨 법을 어겨서 감옥에 가야 되는 그런 느낌보다는 그 당시에 율법에 의하면 죄인인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 되는데 생활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거예요. 또 하나님 율법대로 하려고 그러면 얼마나 제한 사항이 많은지 이거는 먹을 수 있고 먹을 수 없고 하면 되고 안 되고 몸을 정결하게 씻고 등등 굉장히 율법 조항이 많은데 그대로 다하면서는 못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 중에, 또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사회에서 쫓겨나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되는 그런 사람들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죠. 그런 사람들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도 힘든데 하나님 말씀에서 너는 죄인이라고 하니까 이중으로 힘든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 다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 초대하셔서 같이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그 깊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우리가 알 수 있지요. 주님이 전하시는 천국은 이 땅에서 누구나 웰컴입니다. 그저 예수님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사모하기만 하면, 그리고 내 모습 이대로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신다는 믿음으로 나오기만 하면 누구나 웰컴이에요. 너는 돼, 너는 안 돼,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풍성합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잔치상으로 비유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풍성하게 임합니다. 부족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기쁨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고 또 불편하는 사람들은 꼭 있게 마련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바리새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율법을 너무 잘 지키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너무너무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금식도 많이 하고 예배도 많이 드리고 기도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만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이 있지. 그런데 나에 비하면 저저 죄인들은 아니야, 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어, 이런 의식으로 가득찬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니까 너무나 못마땅한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세리들과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뭐라 그럽니다.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하느냐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꾸만 배제하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에는 우리 같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지, 저 죄인들은 안 돼 -- 배제하는 사람들이고 반면에 예수님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오기 원하는 사람은 받아들이는 그런 사랑의 마음을 예수님은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다 -- 의사와 병자의 예를 드십니다. 병든 사람, 이것은 비유라고도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들은 병든 사람입니다. 실제로 몸이 병들어서 아픈 사람도 있고 마음이 병든 사람도 있고 영혼히 병에 들어서 하나님 앞에 힘든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 어떤 사람은 병자이고 다른 사람은 건강하고 그런 느낌이겠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웰컴하시는데 사실 그 말씀은 모든 사람이 병자라는 것입니다. 병이라는 것은 원래 우리가 건강해야 되는데 뭔가 몸에 어떤 부분이 어떤 이유로 고장이 나고 약해지고 병균이 침투하고 그래서 아픈 거 아닙니까?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야 되는데 우리가 그런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고 우리들은 하나님과 닮아서 늘 하나님 앞에 옳고 사랑이 넘치고 이웃과 이웃들과 좋은 관계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사람의 본래 모습인데 우리 모두가 병이 나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얼마나 문제가 많고 서로서로 힘들게 하고 불의하고 거짓말하고 해치고 이 세상이 지금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지금이 세상은 병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사야 1장에 그 딱 이미지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보시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맞아서 멍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을 고쳐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의사로 오신 것이죠. 우리 모두가 그 예수님의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죄인이지만 죄로부터 지금은 완전히 벗어난게 아니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들이 병자인데 예수님이 우리를 치유해 주시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나는 지금 완전해 건강해 그럴 사람이 없고 계속해서 우리들은 치유받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나 자신이나 또는 옆에 누가, 심지어 예수님을 믿건 안 믿건 상관없이 어떤 사람이 저 사람은 왜 저래 할 때도 있고 저 사람이 날 힘들게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미워하지 말고 아, 병 나서 그래, 이렇게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나 병들 수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병을 고치러 온 의사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뜻이 있는 것 같아요.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것이죠. 그 사람이 나빠서 그렇습니까? 나도 그 병 걸릴 수 있는데 그러니까 겸손하라는 것이고 그러니까 병든 사람 미워하지 말고 저 사람은 나아야 될 사람이야, 의사가 치료해 주고 돌봐 줘야 될 사람이야, 그렇게 이해를 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조금 이해도 될 수 있을 것이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 저 사람을 도와주세요. 고쳐 주세요 하면서 이해도 잘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에게 의사로 오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미워하지 마라, 배척하지 마라, 도리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천국을 전하시는 것은 저런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호세야 6장의 말씀을 인용을 하시는데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나는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는 말씀을 가서 배워라 그러십니다. 주님은 제사가 아닌 자비를 원하십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는 굉장히 많은 제사의 종류도 있고 규칙도 엄격하고 따라서 해야 되고 그런 말씀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주님은 제사 받기를 좋아하시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그런 형식이나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 한 마리 끌고 와서 하나님께 다 통째로 바쳐도 그 마음이 딴 데가 있으면 소용 없는 것이지요. 모든 제사와 예배와 종교 행위의 본질은 정말 하나님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자비로워지는 것입니다. "헤세드"라는 단어는 긍휼히 여긴다, 그리고 공감한다, 이해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정말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그에게는 나름의 이유도 있을 수 있고 어떤 환경이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준다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만 그렇게 불쌍히 여기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을 실제로 도와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행동이 따라가는 단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비롭게 여기시면서 정말로 우리를 품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실제로 행동하십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우리들을 건져 주시고 살려 주시죠.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인데 이 자비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정말로 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자비를 배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의 말씀인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종교 생활 열심히 하고 경건하고 기도 많이 하고 금식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전혀 모르면서 겉보기에 기도나 금식이나 아무리 많이 하면 뭐 하겠습니까? 소용 없는 것이죠. 정말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렇게 모든 사람, 특별히 죄인, 세리,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주님께서 더 돌보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연약한 자녀가 있으면 더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의롭고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인간들의 죄로 인해서 그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시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죠. 하나님은 그것을 슬퍼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이 귀하다, 특별히 세상에서 가난하거나 병들었거나 버림받은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멸시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들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더 마음이 주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모두를 초청하시는 이것이 예수님의 천국의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다가가시지만 특별히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주님 앞에 나오고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들을 돌보시고 찾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마을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찾아가셔요. 그래서 마음은 있어도, 내가 하나님께 나가고 싶은데 용기가 없든지 사정이 안 돼서 못 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지금 마태도 일을 하고 있는 자리였거든요. 세관에 앉아 있는데 주님께서 찾아가시고 부르신 것이죠. 그러자 마태가 일어나서 따라가는 것인데 주님은 이렇게 일일이 찾아가시고 약한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라고 심지어 세리들과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가리라 그랬습니다.이 바리새인들이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가 되겠죠.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천국의 복음이 이것입니다.
이 자비의 마음을 우리들도 배워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교회 생활을 오래 하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굳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함께 신앙생활하는 우리들이 뭔가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도 더 우월한 것 같은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아니야,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낫지 하고 우월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고 벽을 세우는 것인데 그것은 오늘 예수님의 마음과 굉장히 다르지요.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라, 누구든 초대하여라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 특별히 더 해당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멀리하거나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고 우월감을 가질 때가 많은데 그것은 우리들이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 보시기에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그런 사정이나 그런 상황들이 있고 그들 속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지식적으로는 그들이 훨씬 우리보다 나을 때도 많이 있고요. 그런데 우리가 무조건 예수 안 믿으니까 하고 멸시하고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비의 말씀을 배우고 실제로 찾아가셔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먼저 다가가셔서 용서하시고 그래서 그들이 변화를 받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나라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다시금 새기고 우리들도 그렇게 하는 우리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천국,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그 천국을 이 땅에서 살아낼 수 있을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20살 때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형들을 따라서 교회에 갔다가 갑자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신약 성경을 거의 다 읽었을 때였는데 하루는 교회에서 어떤 말씀 달력을 보게 되었습니다. 크게 하나님 말씀이 적혀 있는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너무 귀한 말씀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런데 신약이 어디에 있었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구약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예수님의 고난이 예언서에 벌써 그렇게 예언되어 있다는 걸 알고 굉장히 놀랐고 정말로 하나님의 그 크신 계획과 말씀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때 그냥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500년 전 이상부터 계획하시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예언의 말씀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가슴속에 다 아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이 이사야 53장을 읽으시는 장면을 한번 상상을 해 봤습니다. 그 말씀 읽으면서 이것이 예수님이 가실 길이라고 마음속에 새기셨을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사야 52장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그 말씀과 배경 가운데서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진행되어 결국 주님의 고난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을 볼 수 있겠습니다.
1절의 말씀을 먼저 보시겠습니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내 힘을 낼지어다. 첫 번째 단어 원래는 깨어라 깨어라 시온,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온이 지금 무슨 이유로 주저 앉아 있습니다. 잠을 자고 있는지 정신을 잃었는지 모릅니다. 시온은 다윗 언약 그리고 시온 언약을 상징하는 도시이고 예루살렘인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도시라는 뜻으로 시온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시온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세상 다른 나라들로부터 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주저앉아 있고 쓰러져 있는 상태입니다. 잠자는 듯이 어떻게 보면 죽은 듯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깨어라 깨어라 네 힘을 낼지어다. 하나님께서 힘이 되십니다. 그 힘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십니다. 우리들도 예수님 믿으면서 때로는 너무 힘들다 또는 무기력하다 그럴 때가 혹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힘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뀌었어요. 하나님이 힘이신데 그걸 바꾸면 안 됩니다. 힘이 하나님이다. 그렇게 되면 큰일납니다. 그러면 힘을 송상하게 되고 어떻게 해서든이 힘을, 권력이나 재물이나 이런 세상적인 것들을 더 얻으려고 목숨을 걸게 되지요. 힘을 더 얻으려고 자기 인생을 다 낭비하고 또 힘을 조금 얻으면 약한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힘이 하나님이 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십니다. 시온이 세상의 고난 가운데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는데 하나님께서 힘이 되십니다. 힘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이제 시온이 힘을 내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내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아름다운 옷, 영화로운 옷입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신부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신약에도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신부가 단장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신부에게 아주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는 광경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를 영화롭게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사랑이고 자랑입니다. 서로를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하고 높여 주는 귀한 관계, 이것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귀한 언약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높여 주시는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존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귀한 아름다운 옷, 영화로운 옷을 입혀 주셔서 세상 가운데서 높여 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시온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그 영화를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잠시 걷어가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의 신부가 된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하지만 백성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 하는 것과 똑같이 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에서 하나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됩니까? 의지할게 세상 물질밖에 없는 것이죠. 세상의 돈이라든가 사람이라든가 그런 것만 의지하고 사는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시 잠시 잘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잠시 부요하게 살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멸망입니다. 결국은 죽음, 허무함입니다. 그런 세상이 좋다고 나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고난으로 다가온 것이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매맞는 걸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땅바닥에 쓰러져 있고 죽은 듯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시간이 끝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사랑스럽고 자비롭게 불러 주십니다. 그래서 깨어라. 아름다운 옷을 입어라. 이제부터 부정한 자가 다시는 내게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외국의 강한 나라들, 앗수르, 바벨론 이런 나라들이 쳐들어왔고 그 성을 멸망시키고 불태우고 죽이고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그 부정한 사람들의 군화발이 도시를 짓밟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았습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셨지요.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약속을 하셨습니다.
2절에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지금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온통 먼지와 땅의 흙을 뒤집어 쓰고 있는 상태인 것이죠. 그러나 이제는 일어나서 올바르게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목의 줄이 결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목에 묶어서 노예처럼 끌고 가는 것이고 짐승 취급하는 것이지요. 사실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라는 경구도 있습니다. 사람이 정말 얼마나 악한지, 하나님을 떠나고 자신만을 위하는 위기적이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악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사람을 목을 묶어서 결박시켜 끌고 가는 짐승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온통하고 억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기대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 모르고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영원한 언약이 맺어져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좋은 일이 있고 하나님 주시는 축복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고난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다시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면, 그래서 다시 세상으로 나간다거나 하나님을 버리면, 습관처럼 형식만 있고 겉보기에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 됐지만 마음은 이 세상 것을 더 좋아하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은 고난을 주십니다. 몸이 아프든지 여러 가지 일이 벌어져서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그런 잘못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악한 고난과 사고와 질병을 다 막아 주시면 좋겠는데 사실 하나님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 믿는 백성들이 자동적으로 모든 재앙을 피한다고 하면,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병 안 걸리네 사고 안 당하네 하면서 하나님 믿게 된다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하나님 주시는 복을 받는 길이지만 그것은 기계적으로 되진 않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복받고 안 받으면 벌받고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때로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기 힘들어요. 그럴 때 이사야 52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3절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공식과도 같은 표현입니다. 다 하나님 말씀인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 공식을 쓰실 때가 있습니다. 이 공식이 여러 예언서에 계속 나오는데 그 이유는 잘 들으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진심, 하나님의 관심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강조해 주십니다.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없이 속량 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로 팔렸는데 아무 대가를 받은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다시 속량할 때도, 원래는 몸값을 주고 다시 사오는 것이 속량인데, 처음에 팔릴 때도 받은게 없으니까 되찾아올 때도 돈 없이, 아무런 그런 조건이 없이 되찾아올 것이다.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 다 아십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다시 자유를 주시고 되찾아오실 것이라 약속을 하시는 것이죠. 우리들이 세상에서 고난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믿어도 때로는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해 줄 수도 없는 나만의 괴로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가?
욥이 그렇게 했습니다. 욥이 자기가 당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아무 잘못한 것도 없고 이유가 없는 그런 고난을 엄청나게 당하잖아요. 그래서 나는 너무나 억울하다. 하나님 나에게 이러실 수는 없다 하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이 다 회복시켜 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잃었던 것도 되찾게 해 주시고 몸도 다 낫고 더 영화롭게 회복시켜 주시는데, 그렇게 하시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욥에게 다 말씀하시는 그 순간,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 이미 다 해결되었습니다. 욥이 그동안 갖고 있었던 괴로움과 불만과 하나님께 따지고 싶은 그 수많은 말들이 있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셨다는 것을 폭풍 속에서 욥이 깨닫는 그 순간 다 해결됩니다. 그리고 도리어 부끄러워합니다. 오 하나님 내가 왜 그랬을까요? 내가 불평했던 건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들도 각자 괴로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 그리고 해결책은 결국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해결도 해 주십니다. 그래서 문제들이 다 떠나가고 회복되어서 내가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되는 그 때가 오겠지만, 그 전에도 사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만 마음속에 새기면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온아 그렇게 괴롭고 힘든 것을 너 혼자 당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만으로 문제는 떠나갑니다. 힘들수록 괴로울수록 고난 가운데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 힘든 날을 가고 있다고 느껴지시는 분들은 이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정을 아시고 다정하게 말씀해 주신다는 사실로부터 이미 그 모든 상처가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다 압니다. 세상 어느 나라 민족들도 God 이라는 단어는 알고 하나님 모르는 사람도 힘든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부를 수 있죠. 그러나 하나님 백성에게 특별히 허락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 신약에서는 예수라는 이름. 하나님의 이름은 그냥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6절 끝에 내가 여기 있느니라. 하나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냥 지식으로 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거기에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느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이름 부르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즉시 오셔서 내가 여기에 있느니라 말씀하시는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제일 좋은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즉시 부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이 가장 귀합니다. 우리에게 주신이 귀한 이름 예수 이름,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 귀한 이름을 편하게 마음껏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그때 응답하시고 우리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날에는. 예전에 이 말이 너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약에서 그 날 또는 여호와의 날은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날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좋은 소식은 말 그대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들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시고 새 힘을 주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에게 전해져야 우리들이 알 것 아닙니까? 이 좋은 소식의 내용은 먼저 평화입니다. 더 이상 괴로움이 없고 전쟁이 없고 고난이 없는 평화가 선포가 됩니다. 또한 복된 소식을 가져오는데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히브리말로 문자 그대로 예수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입니다. 복된 소식, 좋은 소식의 내용이 바로 구원, 예수입니다. 그리고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 읽으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가슴 속에 새기시는 광경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이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이 이 세상이 괴로워도, 온갖 악과 불의와 억울함이 가득한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다스리심보다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잘되고 잘 살고, 선하고 약한 사람들이 고난받고 억울하게 죽습니다. 이런 세상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산단 말입니까? 이 세상에 아무 소망 없이 그냥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만 믿고 살라는 말입니까? 있다가도 없어지는 물질, 그리고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결국은 죽을 우리들의 이 인생을 의지하고 살란 말입니까? 아무 소망 없이, 악한 사람 잘돼도 할 수 없고 선한 사람이 고난당해도 억을해도 아무 소망 없이 의미 없이 살다가 죽으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하면 우리의 인생은 끔찍합니다.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복된 소식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아무리 이해가 안 되어도, 약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이 고난당하는 이런 불리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이것 말고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성경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많은 고난과 괴로움을 당했어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이 복음을 붙들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우리들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위해서 결국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산을 넘는 발이 얼마나 그 아름다운지요!
8절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래서 산을 넘어 좋은 소식 전하는 사람들이 달려오면 파수꾼이 멀리서 보고서 복음인 것을 알고 소리를 높여서 일찍이 노래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 그들의 눈이 마주봅니다. 눈이 마주 본다는 표현은 파수꾼들이 서로 본다는 뜻도 되지만 아마 파수꾼의 눈이 시온으로 오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눈이 맞으신다는 너무나 멋진 표현도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온으로 오신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서 가장 강렬한 하나님의 임재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이 말씀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눈을 맞추어 주시고 우리 곁에서 친구와 구원자가 되어 주십니다. 결국 이 복된 소식을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드리셔서 고난의 길, 그리고 고난을 통한 승리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해 주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붙드시면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먼저 우리들은 하나님 다스리신다는 말씀을 가슴 속에 새겨야 되겠습니다. 내가 힘들어도 이해가 안 되어도 결국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꼭 붙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고난받는 사람들, 힘든 분들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눈물 흘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니야, 소망이 있어, 하나님이 다스리셔, 이 사실을 우리들이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위해서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실 때에 이 귀한 복된 소식, 하나님 다스리신다는 소식을 온전히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천국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전체와 부활 이후에 일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영적이나 심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체적인 왕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구체적인 땅을 주시고, 제도와 율법을 주셔서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한 때 전성기를 누렸지만 결국은 인간의 역사의 뒤로 사라졌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가 실패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잘 못되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그 부족했던 것을 상고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은 왕이시지만 언제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리더쉽을 가지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스립니다. 그들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을 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 가장 마지막, 가장 탁월했던 사람이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의 예배와 기도를 주관하고 영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가 기도하면 다른 민족과의 전쟁도 승리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아말렉의 아각 왕을 칼로 조각내기도 하는 등 매우 카리스마 있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합니다. 다른 모든 나라들도 왕이 있다고 합니다. 사무엘은 기도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기도와 예배도 좋지만, 당장 적들과 싸우려면 그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갈 지휘관인 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만일 사무엘이 내가 왕이 되겠다고 말했다면 분위기가 싸해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흔한 인간의 심리입니다. 보통은 하나님께 기도하다가도, 정말로 중요한 인생의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기보다 자기의 뜻대로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포장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동시에 노력해야 합니다. 시험이 있으면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과 생각으로 승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첫째 왕으로 선택하시는데 사울은 신정 국가에서 왕정 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습니다. 그의 왕권 전체에 걸쳐 사무엘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의 권위 아래 시작했고,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했습니다. 당장 전투가 임박해서 군인들을 모아야 하는데 다들 사무엘을 기다리면서 흩어집니다. 결국 사무엘의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의 치세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왕이 모든 권세를 갖지 못하고 제사장의 견제를 받습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면이 있어서 오늘날까지 많은 나라들이 정교 분리를 실천합니다.
사울은 병에 담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뿔에 담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해석이지만, 다윗이 더 풍성한 성령의 부으심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성령을 받았지만 충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황홀한 종교적 경험은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해서 예언을 하면서 옷도 벗어던지고 땅에 드러누워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렬한 경험을 했지만, 그것이 일상으로 연결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평소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인기를 보고 질투하고 죽이려 합니다. 말하자면 교회에서의 모습과 일상의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단 사무엘은 이미 죽었고, 다윗의 시대에는 그의 카리스마에 비교할 제사장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다윗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특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처럼 황홀경의 경험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경험이 아니라, 일상의 생각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싸운 것도 계획한 것이 아니라,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는 것을 듣고 나선 것입니다. 다윗은 찬양이 생활화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많은 찬송시를 짓게 되었습니다. 참된 신앙의 성숙은 열렬히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시간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신앙이 나의 습관과 인격에 표현되는가입니다. 단순히 나의 언행이 아니라 나의 가장 근본적인 생각, 이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가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은지 얼마 후, 비교적 쉽게 왕이 되었습니다. 적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즉시 왕이 되었기 때문에 고난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의 왕권에 대한 확신이나 자의식이 부족합니다. 다윗을 보고 자기를 도와줄 인재가 나타났다고 기뻐해야 할텐데, 도리어 자기의 자리를 불안해 합니다. 다윗은 반대로, 기름부음받은 후 한참 지나 왕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웃 나라로 도망가서 미친 척도 했습니다.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을 본 이웃나라 왕이 어디서 저런 자를 데려왔냐고 화를 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낮아짐을 경험하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비천해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고난이 닥쳐도 이겨냅니다.
반면에 사울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왕권을 이해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왕권을 목숨걸고 지키려 했습니다. 사실 그것이 맞습니다. 왕은 그렇게 하라고 뽑은 것입니다. 왕을 보호하다 보면 나라가 보호됩니다. 왕이 자기 보좌를 지키지 못하면 자기만 죽는 게 아니라 자식들이 다 죽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다윗을 위하는 것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핑계일 수 있지만 아말렉의 좋은 우양을 살린 것은 백성들의 말을 들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사무엘의 선언을 듣고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보다 백성들의 보기에 좋지 않으니 일단 자기와 같이 경배하자고 했습니다.
다윗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법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십계명의 돌판이 담겨 있는 법궤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것이 여기저기 떠돌고 있었고, 심지어 적들에게 빼앗겼다고 돌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임시로 텐트에 보관 중이었는데, 다윗은 자기의 성이 생기자 즉시로 궤를 옮깁니다. 처음에는 수레에 실었다가 그것을 만진 사람이 죽는 등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궤를 어깨에 메게 해서 다윗성에 들이는데 어찌나 기뻐하는지 옷이 내려가라고 뛰며 춤을 추었습니다. 왕이 그렇게 하니 백성들도 기뻐하면서 나팔을 불고 춤을 추었습니다.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그의 왕권이 그의 집안에 영원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다윗의 아들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고, 영원히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의 왕조가 영원할 것이라는 이 놀라운 언약을 다윗 언약 또는 시온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실제 다윗의 왕국은 400여년만에 멸망하지만, 많은 예언자들이 다윗처럼 목자의 마음으로 백성을 돌보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는 다윗왕과 같은 인물의 재림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아모스, 미가, 학개, 스가랴 등이 그랬습니다.
영원한 왕국이라는 것은 매우 놀라운 약속이고 사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왕국이 영원할 수 없는 이유는 먼저, 왕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도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반드시 후계자를 두어야 하고 대개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들들이 서로 왕이 되려고 싸웁니다. 그것은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왕은 가장 행복해야 할텐데 반대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다윗도 자기 아들들이 서로 죽입니다. 세종대왕은 아들이 손자를 죽입니다. 또 왕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일 확률이 낮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에 각각 약 20명의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은 다윗, 솔로몬 외에 히스기야, 요시야 등 극소수입니다. 그만큼 인간들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믿고 맡기실 왕의 재목이 드뭅니다. 또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세상은 원래 하나님의 정의와 뜻이 완전히 펼쳐질 수 없는 곳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결국 이방인의 제국의 침략을 받아서 멸망하게 됩니다.
왕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치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제도입니다. 자기 나라에서는 전능하여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뜻대로 합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 영속성을 추구하여서 자손까지 대대로 왕위를 유지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전능과 영속을 추구하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데 세상의 나라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적인 권세를 추구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핍박받는 사람들이 있고 불의가 있어서 멸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왕으로 오신 것은 이 세상 나라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수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엄청난 권세를 부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사야 14장에 보면 그도 마침내 죽어서 음부로 내려가는데 수많은 죽은 영혼들이 그를 조롱하며 분풀이합니다. 이 땅에서 권세를 누리며 교만하고 핍박했던 모든 왕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왕을 통해서는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에 대해 마리아에게 천사는, 하나님이 그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시리니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렇게 죄 많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무기와 전쟁과 피흘림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우리들은 그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나라에 충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위해서 나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마땅히 할 바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 바라고 바울 왕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사람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그런 일이 혹 있었다면 되게 하고 주님 앞에 겸손한 사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그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삶이 우리들의 학교와 일터와 가정이 하나님께 세팅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서 그분의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우리들이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좀 더 큰 스케일로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향하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그래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복을 누리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우리들은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시는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사진은 희생의 십자가라는 조형물입니다. 알링톤 국립묘지에 있습니다. 칼과 십자가가 잘 어울립니다. 모양이 비슷해서일 것 같습니다. 해리 포터에 보면 얼핏 십자가 같이 보인 것이 칼이었던 장면도 있습니다. 칼과 십자가는 사실 반대 느낌입니다. 칼은 권력, 전쟁, 강함의 상징인데 십자가는 희생, 낮아지심, 겸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 칼과 십자가가 잘 조화롭게 이해된 적이 있었습니다. 중세의 기사도 정신은 자신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적을 물리치고 희생정신을 갖고 약자를 보호한다는 이미지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사울 왕의 미움을 사고, 왕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에게서 몸을 피하는데, 갈 곳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래서 즉시 제사장의 도성인 놉으로 갔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사방이 다 막힌 것 같은 위기 상황을 만납니다. 오직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야 합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선하신 뜻에 따라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먹을 것이 있는지 물었더니, 하나님께 바친 거룩한 떡만 있었는데 그에게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안식일에 밀알을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비난하자 예수님은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 제사장이 한 일을 인용하십니다.
다윗은 또 무기가 없는지 물었습니다. 마침 그가 죽인 골리앗의 칼이 있어서 달라고 하였습니다. 왜 골리앗의 칼이 제사장, 즉 하나님의 전에 있었을까요? 다윗은 골리앗의 갑주를 자기 장막에 두었습니다 (삼상 17:54). 이 단어는 무기라는 뜻이므로, 골리앗의 칼도 자기 집에 가져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다윗이나 그 집의 누군가가 그 칼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제사장에게 주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에봇 뒤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 봉헌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제사장의 대화를 볼 때 부자연스럽습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모르고 그저 칼이 필요해서 물었는데 마침 거기 있었다는 느낌이 본문에 강합니다.
만일 다윗이 아니면 어떻게 이 칼이 제사장에게 왔을까요? 이 칼을 사울왕에게 바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의 공적인 이 칼을 들고 다니기를 꺼려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칼을 보는 사람마다 골리앗과 다윗을 떠올릴 것입니다. 다윗이 사용했다면 가장 자연스럽지만, 다윗이 무기를 그렇게 중요시했는지 의문이고, 왕의 사위자 신하로서 더 좋은 칼을 사용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만일 다윗이 챙기지 않았다면 군인들 중 누군가 그 칼을 집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투의 혼란, 또는 갑작스런 승리로 인한 희열에서 정신없던 차에 누군가 칼을 집어들었고, 이것을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그냥 제사장에게 갖다바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실 제사장은 칼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제사 드릴 때 소나 양을 잡고 살과 내장, 지방, 껍질과 뼈를 다 칼로 처리해야 합니다. 물론 이 칼은 다른 단어입니다. Hereb 이 아니라 maachelet 인데 이상하게 성경에서 이 단어가 별로 안나옵니다. 헤렙은 413회, 마아켈레트는 4회 나옵니다. 제사를 지내는 다른 기구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들이 있는데 칼만 안 나옵니다. 일부러 그런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예는 아브라함과 이삭, 또 사사기에서 남편과 불행한 아내 이야기처럼 사람에 대해서만 나옵니다. 왜 그런지 연구해 보면 흥미로울 것입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엉뚱하게 아주 귀한 무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이런 것 취급하지 않는다고 거부하기도 어렵습니다. 나는 제사 드리고 기도하는 일만 한다고요. 그러나 참된 목자라면, 자기의 종교적 의무만 다할 뿐 아니라 자기가 돌보는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해야 합니다. 이 칼은 결국 백성들의 목숨에 관계되는 물건이고 잘 다루어야 하기에,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제사장은 칼을 들고 싸우는 사람은 아닙니다. 세상적인 권력을 탐하거나 추구한다면 제사장에게 어울리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사실 제사장들이 칼을 갖지 말라는 금지명령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칼 두 자루를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알게 되셨을 때에도 왜 이런 걸 갖고 다녔느냐고 뭐라고 하시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칼을 갖게 되었을까요? 이전에 열심당이던 제자가 계속 갖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누군가 헌물을 하는데 가진 게 칼이라서 칼을 제자들에게 드렸을까요? 아니면 실제로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칼을 구입했을까요? 어쨌든 예수님의 제자들이 칼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갖고 있던 칼 두 자루라는 말씀에 근거한 교황의 교서가 우남 상탐(unam sanctam)입니다. 보니파스 8세가 1302년에 발표한 교서인데 교회는 두 자루의 칼을 갖고 있습니다. 영적인 권세, 세속적인 권세이며 전자가 우월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영적인 권세 뿐 아니라 세상적 권세도 갖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좋은 일일까요? 만일 사람들의 신앙을 공권력으로 강제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때로는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이나 이교가 있을 때 다 가두거나 벌을 준다면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좋은 일일까요? 그러나 교회가 영적이 아니라 세상적인 권력을 갖게 된다면 예수님의 정신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제국이 되었을 때, 세상적으로는 더 높을 수 없는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접한 사산조 페르시아에게는 기독교를 믿는 것이 로마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로마에 속한 사람에게는 복음의 큰 문이 열렸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복음의 장벽이 생겼습니다. 나중에 로마가 권력으로 삼위일체 등의 교리 수호에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한 위격 두 본성이라는 칼세돈 기독론을 강요하였는데, 단성론이 강하던 이집트 등은 결국 이슬람으로 넘어갔습니다. 교회가 칼, 즉 세상 권세를 갖는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하고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며 결국 많은 사람들을 복음을 믿지 못하게 가로막는 큰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아히멜렉 제사장은 본의 아니게 칼을 맡게 되었고, 정치적인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을 피해 도망친 다윗을 돕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역자가 되는 위험을 무릅쓴 것입니다. 제사장이 별 생각 없이, 칼을 달라니까 주었을까요? 나중에 사울왕에게 변명할 때 제사장은 그런 식으로 말합니다. 다른 의도가 없이, 다윗이 왕의 사위이고, 큰 장수이니까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히멜렉 제사장은 홀로 나타난 다윗을 보고 떨며 맞이했습니다. (1절) 왜 당신 혼자입니까? 다윗이 거짓으로 둘러댑니다. 왕이 급한 일로 보내어서 경황이 없어서 무기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나중에 사울왕과의 대화에 보면 제사장은 다윗을 위해서 기도도 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제사장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옮겨갔음을 간파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가 다윗을 도운 것은 우연이나 실수나 우발적 행동이 아니고, 의도적인 결단으로 그리 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울의 미움을 받아서 그 도성의 모든 제사장들과 가족이 몰살을 당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참 억울하다고 할 것입니다. 공연히 사울 왕과 다윗의 싸움에 연루되어서, 애매하게 다윗을 도와주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들 한 사람만 살아남았는데 아비아달입니다. 그는 다윗에게 피했고 나중에 다윗왕 때 제사장이 되었지만, 솔로몬 왕의 미움을 사서 아나돗으로 쫓겨납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그 자손들 중 한 명일 것입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이 처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나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으면 어찌 되었을까요? 나는 이런 정치 싸움에 말려들지 않겠다, 나는 예배 인도하고 기도만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다윗에게 칼을 주기를 거부했더라도, 그것 역시 정치적인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 행동도 안하고, 말도 안하고, 침묵하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중립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제사장이 다윗을 외면했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 사울과 함께 멸망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다윗의 생명이 아히멜렉의 생명과 얽히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죽을 운명이었으나 그에게 음식과 무기를 주고 아히멜렉이 죽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몸값을 자기 생명으로 치른 셈입니다. 이렇게 몸값을 치르는 것을 구속(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몸값이 있는데 노예와 죄수의 몸값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탄의 노예와 죄수였는데 예수님이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이렇게 몸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상황에 의해 두 목숨이 얽히든지, 사랑의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생명이 매였다고 표현된 사람들은 다윗과 요나단, 그리고 야곱과 베냐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자신을 두시고,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자기 목숨을 우리 것과 묶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값을 치르셔서 우리를 살리시고 해방하셨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 사람들을 영적으로 돌본다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영적인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세상은 우리에게 칼을 맡깁니다. 이 칼을 좀 맡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 칼로 사람들이 다칠 것입니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싫어도 때로 칼을 맡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칼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가만히 보관만 해 둔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때로는 선택을 요구받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지만 애매하게 갈등 상황에 얽매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영적인 삶 뿐 아니라, 때로는 세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에 판단을 요구받습니다. 공연히 그런 일에 얽매였다가 곤란해 진다고 그저 외면만 하겠습니까? 교회는 때로 세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고, 하나님의 판단과 선악의 기준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시며,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이니, 서로 존귀하게 여기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에 어긋나는 세상의 권세에 비판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서는 안되겠습니다. 물론 그런 세상적인 칼을 떠맡아야 되는 상황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미리 예비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곤란한 일이 생겨서 나에게 고난이 닥치는가 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일이 아닐 것입니다. 도리어 이런 일은 당연히 언젠가는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러다가 고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제사장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만일 그런 일을 겪을 때,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하나님 내가 잘 살고 있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서 환란이 오게 하십니까 하고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을 살다 보면 당연히 언젠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겸손히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시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고난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번영 신학의 교과서인 로마 제국의 불의를 온세상에 드러내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멸망할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드러내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을 원망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을 본받아서, 이 세상에서 주님께만 충성하면서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다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을 원망하지 맙시다.
십자가냐 칼이냐? “칼을 가지는 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십자가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