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게시판

나아만은 아람 왕의 군대장관으로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병이라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의 병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 사회적 고립과 절망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병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을 경험하며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특정 민족이나 사람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나아만과 같은 영적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로마서 5:8)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로 회복시키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합시다.

나아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계기는 그의 집에 있던 이스라엘 출신 여종의 선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종은 포로로 끌려와 억울한 상황에 처했지만, 원망하거나 복수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을 위해 선한 조언을 했습니다. 그녀는 나아만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소개하며 그가 나을 수 있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말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잠언 18장 21절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소녀의 말은 작고 평범해 보였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을 때 나아만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에, 우리의 말이 감사와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나아만은 하나님의 일을 처음에는 자신의 기준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나와서 그에게 손을 흔들며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간단한 지시만 내렸습니다. 나아만은 이에 실망하며 화를 냈습니다. 그는 요단강이 다메섹의 강들보다 더럽다고 생각하며 거절하려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일을 우리의 기준과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이사야 55장 8절에서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나아만은 결국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집과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요단강은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의 치유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와도 같습니다. 빵과 포도주는 단순한 음식처럼 보이지만,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거룩한 은혜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종종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평범한 곳에서 역사합니다. 요단강의 물은 그 자체로 치유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지만, 나아만의 순종과 하나님의 능력이 결합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며 감사합시다.

하나님은 나아만을 단번에 치유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는 과정을 통해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치유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한 기적의 수혜자로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일에 참여하는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십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몸을 잠그는 동안 자신의 교만과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는 치유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치유를 받은 나아만은 즉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엘리사에게 예물을 드리려 했지만, 엘리사는 이를 거절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나아만은 이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헌신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알지 못했지만, 은혜를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께 온 마음으로 응답했습니다.

감사는 단순히 물질적 축복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와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티아는 같은 어근을 공유합니다. 이는 은혜와 감사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감사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카리스)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지만 조건 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체험한 자는 자연스럽게 감사(유카리스티아)로 반응하게 됩니다. 나아만은 치유의 은혜를 받은 후 단순한 감사를 넘어 자신의 삶으로 그 은혜에 응답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명, 일상, 가족, 구원의 선물—all of this is grace. 추수감사절은 이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삶 전체가 감사의 표현이 되도록 결단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감사가 말과 행동, 예배 속에서 드러날 때, 하나님은 그 감사 속에서 더욱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며 감사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갑시다. 은혜 없이는 감사가 없고, 감사는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아만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광야로 가셨고, 그곳에서 광야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에 태워 먼저 보내시고, 혼자 남아 사람들을 돌려보낸 후 산으로 올라가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추대되는 분위기에 당황했지만, 주님의 명령에 따라 호수 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배가 한 척뿐이었기에 예수님은 어떻게 오실지 의문이었습니다. 한편, 밤이 깊어지고 거센 바람이 불어 파도가 심하게 치기 시작해, 제자들은 배를 조종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새벽 4시쯤, 제자들 중 누군가가 멀리서 하얀 형체를 발견했습니다. 물 위에서 다가오는 모습에 모두가 유령이라 생각해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 가운데 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특별했습니다. 이전에는 병자를 고치고 많은 사람을 먹이시는 주님의 기적을 보며, 제자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적을 통해서는 단순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순간이 바로 이 기적에서 나타납니다.

어두운 밤,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가 이는 바다 위로 한 사람이 걸어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모습은 창세기 1장과 비슷한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창조 이전, 땅은 형체가 없고 흑암이 깊은 물 위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셨습니다. 이는 완전한 어둠 속, 아무런 빛이 없는 가운데 거대한 물과 폭풍이 일렁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기 직전의 혼돈과 흑암, 물과 바람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장면과 연결됩니다. 제자들은 마치 창조의 순간으로 돌아간 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 다시 한 번 기적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던 그분이 강풍 속에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이 장면은 천지 창조를 떠올리게 하며,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물은 생명과 심판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지만, 물에 빠지면 죽음에 이르듯이 심판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에서의 심판은 물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물 가운데서 땅을 나오게 하셨으며, 하늘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이처럼 물이 창조와 심판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세상이 물에서 나와 성립되었다고 말하며, 우리가 믿고 서 있는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바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숨쉬며 살아갈 수 있지만, 그분이 손을 거두시면 우리는 물로 인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있었던 노아의 홍수처럼,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으며 우리의 궁극적 소망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가다가 예상치 못한 위험을 맞닥뜨렸습니다. 주님은 일부러 그들을 위험 속으로 내보내셨고, 그들이 이를 통해 배우기를 원하셨던 듯합니다. 제자들이 주님 없이 배를 타고 나섰을 때, 큰 파도가 몰아쳐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그 가운데서 중요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영원한 분이며, 이 세상은 그분과 달리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떠올려 보면, 물로 멸망한 세상은 주님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성경은 이 땅이 불로 멸망할 때를 위해 보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본 베드로는 주님이 맞다면 자신도 걷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베드로는 성미가 급하고 실수도 많은 성격이지만, 그만큼 대담한 믿음을 보인 사람입니다.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 빠지긴 했지만, 저는 그를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예수님 외의 인간 중 물 위를 걸었던 유일한 사람으로, 믿음이 대단합니다. 물론 주님만 바라보았으면 빠지지 않았을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는 바람을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본다고 해도,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다시 자신을 의식하게 되고, 그 순간 물에 빠질 위험에 처합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다 해도, 주님이 건져주신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 위를 걷기 시작했고, 그 순간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믿음과 순간적인 순종이야말로 우리에게 큰 도전과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하실 때, 우리가 그 말씀을 얼마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을 억누르겠다고 다짐한다고 정말 두려움이 사라집니까? 물 위를 걷는 것은 단단하고 안정된 기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정과 안전을 원합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를 교육하며, 미래를 준비하려면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부모로서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직업이 필요하고, 매일매일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신의 생각이 성령을 거스른다고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계획과 염려 속에서 주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저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의 안전과 재산, 자녀의 미래를 위해 계속 염려하고, 계획하며 삽니다.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염려하며 떠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님은 새와 꽃처럼 염려 없이 아버지께서 입히고 먹이실 것을 믿고 살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염려합니다.

이 시간에 다짐해 봅시다. 기도하며 "주님, 내가 염려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결심해 봅시다. 그러나 그 다짐이 얼마나 오래 갑니까? 하루도 가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염려하고,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은퇴 후에 평화가 올까요? 아닙니다. 세상에서 수고하며 사는 한 우리는 여전히 불안 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예"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이 됩니다. "아니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찔러 쪼개어, 우리의 살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우리의 육신은 파괴됩니다. 주님을 만나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육신의 생각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가 그 은혜 없이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육신의 약함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아시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그 아들을 보내셔서 죄 가운데 있는 우리 육신 속에서 죄를 정하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자신의 힘이 아닌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 의지했습니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붙드셨고, 바람 가운데서도 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순종의 그 한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마다 주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매번 자신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주님께 염려를 내려놓고,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겠다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우리가 순간순간 주님께 나아갈 때마다 원수는 우리를 정죄하고 넘어뜨리려 합니다. 또 실패했다고, 또 죄에 넘어졌다고 끊임없이 정죄하지만, 그것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고, 그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가 1년 뒤, 10년 뒤를 염려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주님을 의지하며, 순간적인 순종을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가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같이 주님의 날개 아래로 올라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 순종하는 이 순간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믿으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많은 도시들을 다니셨는데, 하루는 두로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두로는 유대를 벗어나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처럼 외국여행을 하신 셈입니다. 두로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왔던 사람들 중에 한 헬라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온 이유는 어린 딸이 있는데 악한 영이 들려서 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딸을 고쳐 달라고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친절하시고 자상하시고 모든 사람을 맞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부탁도 선뜻 들어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이 부탁을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자녀가 떡을 먹고 있는데 뺏아서 개에게 줄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비유인데 의미는 분명합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 빵은 하나님의 은혜, 능력, 사랑, 그리고 개는 이방인 헬라인을 말합니다. 이 여인을 개에게 비유하신 것이니, 듣는 우리도 민망하고 당사자는 얼마나 큰 수치를 느꼈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해피엔딩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그 여인이 비록 그렇게 거절당해도 가지 않고 계속 간청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꼭 주님처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해도 우리도 그 여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다면 이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픈 것이 낫습니다. 내가 아프다면 참든지 싸우든지 할 수 있는데, 눈앞에서 아이가 고통받는데 볼수밖에 없으면 마음이 찢어집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 해도, 육신의 고통을 함께 느껴줄 수는 없습니다. 마음으로 함께 아파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그 고통을 느끼거나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딸은 영적인 정신적인 병에 걸렸습니다. 나중에 그 어머니가 집에 가보니 침대에 얌전히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증세가 심할 떄에는 아마 난폭하고 폭력적이고 달려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딸이 이렇게 병에 걸려 제대로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니 얼마나 어머니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딸을 낫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달려 온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좀 냉정한 말씀 하셨다고 해서 섭섭하다고 기분나쁘다고 가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 너무 심하게 말씀하시네요!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아닌 가 봐요! 나는 갈랍니다. 리뷰 엉망, 벌점 테러할 테니 기대하세요! 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인이 그렇게 가 버리지는 않을 것을 우리도 알 수 있지만, 여전히 의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두로는 유대에서 북쪽에 있는 고대로부터 유명한 항구도시였습니다. 무역이 성했고 부가 몰렸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에스겔 27장을 보면 두로가 고대 여러 나라들과 얼마나 많은 무역을 해서 풍요롭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수 있습니다. 두로가 헬라 문화권에 결정적으로 편입된 것은 본문부터 약 360년전인 알렉산더 대왕 때입니다. 알렉산더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름으로는 아니지만 구약성경에도 나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왕이었고, 그리스를 다 평정한 다음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습니다. 이 당시 페르시아는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세계사에 유래없는 큰 영토를 지배했는데, 오늘날 터키 팔레스타인 이집트 이라크 이란 중앙아시아 그리고 인도까지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다스렸습니다. 그에 비하면 그리스는 변방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이 페르시아 제국으로 쳐들어가 소아시아에서 일차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내륙으로 진격하지 않고 이집트를 정복하러 갔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성급하게 내륙으로 들어갔다가 뒤에서 역습을 당하거나 본국과의 보급로가 끊어지면 큰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유럽에서 아시아를 치려면 이집트를 먼저 정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렉산더가 이집트로 내려가기 위해 지중해 동부해안을 따라 진군하는 데 그 길목에 두로가 있습니다. 사신을 보내서 항복하고 길을 열라고 요구했더니 두로인들은 웃기시네 하며 그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알렉산더의 혈압이 바짝 올랐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불과 23살인데 성질을 제대로 건드렸습니다.

두로인들이 큰소리를 친 이유는 육지에서 반마일 떨어진 섬에 견고한 성을 쌓아놓았기 때문이었다. 성벽의 높이가 60m였다고 한다. 그런데 알렉산더는 바다를 메워 도로를 만드는 대공사를 시작한다. 돌과 흙으로 엄청난 공사였다. 두로인들이 성에 숨어서 내려다 보니 바다 위로 도로가 점점 다가온다. 가슴이 서늘하고 경악하여 반격을 한다. 불화살을 쏘고 돌을 굴리고 배에 불을 붙여 보내고 했지만 결국 7개월만에 함락되었다. 분노한 알렉산더는 그들을 죽이고 불태우고 다 파괴시켰다. 그리고 자기에게 저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2000명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해변을 따라 몇마일을 십자가가 섰으니 정말 끔찍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거룩하고 은혜롭다. 그러나 원래는 가장 사람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형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험악, 흉칙, 혐오, 비참.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미워할 수 있음을 극명히 보이는 증거이다.

알렉산더의 마음은 이미 사람이 아닌 짐승. 나에게 저항하는 자들을 이렇게 한다는 그는 이미 신이 되어 있다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이유 (6계명) 질문 살인하면 안되는 이유는? 창세기 9장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으므로. 사람을 죽이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죽는다. 하나님의 형상이 못박힌다. 알렉스가 그런 폭력과 살인은 사람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정의를 땅에 짓밟았다. 피가 흘러 땅을 더럽힐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 하나님의 정의 못박히고 모욕당한 영광을 어떻게 ? 다 지옥불? 마지막 때 그리하신다 그러나 다 멸망시키는 보복하는 심판은… 사실 헬라인들이 로마인들에게 그렇게 보복을 당했다.

보복만 하면 끝나나? 보복과 심판으로만 하나님의 정의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니다. 하늘과 땅에 큰 죄를 지은 알렉산더와 헬라인들의 죄를 용서, 치유, 화해받을 수 있는가? 헬라인들이 통회하며 회개하고 울면서 주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길밖에 없다. 가슴을 찢으며 울며 용서하옵소서. 자기들이 죽였던 사람들에게 영혼에게라도 미안하다 용서하라고 비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용서를 빌 수 있단 말인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세상 것을 움켜쥐고 있어서는 안된다. 알렉산더는 33살에 죽었다. 자손들은 그런 조상을 둔 죄밖에 없지만 그로 인한 지배자로 군림하며 온갖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 특권을 누리며 다른 민족을 멸시하거나 최소한 외면했다. 그들의 죄에 동참했다. 권세와 재물. 이 세상 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회개가 없다. 양심이 안다. 죄악의 열매을 누리며 산다. 나로 인해 고생하는 다른 민족들을 멸시하거나 외면했는데 그 특권을 놓지 않으면 회개가 없다.

나에게 오고자 하는 자 재산을 버리고 오라 하셨는데 과연 누가 그리할 수 있단 말인가? 단 한명이라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의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라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본문의 여인이다. 왜냐면 이 여인의 마음은 사랑이기 때문에.

결국 문제의 해결은 사랑이다. 물론 혈육에 대한 사랑이지만 이 사랑이 세상 것을 버릴 수 있게 한다. 자존심 상해도 좋아요. 멸시 당해도 좋아요. 주님의 은혜만 필요해요 하고 다가오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만약 예수님이 이 여인의 부탁을 바로 들어주셨다면 혼자만의 은혜로 끝이다. 그러나 이 여인으로 하여금 너는 헬라인임을 상기시키신다. 다른 죄가 없다. 오직 헬라인이라는 이유뿐이다. 여인으로 하여금 수세기의 큰 죄 가운데 살았던 헬라인을 대신해서 주님께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이다. 모질게 대하신 것이 아니라 놀라운 사랑의 표현.

왜냐면 주님은 이 여인이 주님의 은혜만 붙들것을 아셨다. 맞습니다. 마치 주인 집 자녀들이 식탁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같은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너무 큰 죄인이기 때문에 감히 그런 은혜를 바랄 수 없다. 자녀들이 당연히 먹듯. 나는 한마리 개 식탁 밑에 쪼그리고 앉아 눈치보다가 부스러기 떨어지면 핥아먹듯이.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가 쓴 몽테크리스토 백작 어릴 때 읽었다. 주인공이 에드몽 당테스 19살에 선장이 되고 약혼을 하고 인생의 최고를 맞이하지만 시기한 친구들의 모함으로 약혼식 파티장에서 경찰에 끌려간다 외딴 섬 감옥에 갖혀 평생을 살게 되었다. 늙은 아버지가 있었는데 자식이 그렇게 되니까 충격을 받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절망하고 음식을 거부하다가 굶어 죽는다. 14년만에 기적적으로 탈출하고 보물을 찾아 부자가 된 후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가 물어보러 다닌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가 충격과 절망과 걱정 가운데 굶어서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탄식한다. 어찌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 존귀한 분이 한마리의 개가 주인에게 버림받고 사람에게 멸시받고 쫒겨나서 굶주리고 병들고 사람들이 다 미워하는 개라 하더라도 그래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다 침뱉고 돌던지고 막대기로 때리며 쫓아내도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명이라고 불쌍하다 할 수 있다. 자비를 베풀어 빵 조각 던져주면 그걸 먹고 사는 법인데 어찌 그리 돌아가셨단 말입니까 하고 탄식하는 대목이 나온다.

본문에서 개는 천한 동물이다. 본문은 분명 그런 의미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개가 아무리 천하고 더럽고 혐오스러워도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라도 빵조각 던져주면 먹고 살겠다. 주님은 감동하셨다. 도와주리라!

우리도 대단한 것을 구하기 보다, 이미 많은 것을 받아 누리고 있는데 더 달라고 하기 보다 한번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처음 마음으로 기도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이 그만큼 사랑하신다. 그러나 당연시해서는 안된다. 가졌는데 더 달라고 하는 것은 민망하다. 혹시 기도하지만 마음이 시원하지 않거나 요즘 힘들다면 은혜를 당연시한 때문일 수 있다. 여인의 마음을 갖자 다른 것 필요없고 주님의 은혜만 족하다. 주님의 은혜는 크고 작은 것이 없다. 아무리 작아도 진짜가 중요하다. 헬라민족을 살리기 위해 온 민족이 회개하겠습니다 가 아니라 단 한 명 이 여인의 한 방울의 눈물을 원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된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작아도 진짜냐가 문제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그런 마음으로 구할 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로 인해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나로 인해 이 시간 은혜의 문이 열리는 구원의 빛으로 들어오는 다른 사람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 지금도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저희들이 오직 주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바라보도록 도와 주소서. 오늘 본문의 헬라 여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고 욕심이 사로잡혀 커다란 죄악 가운데 있습니다.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울고 있습니다. 저희가 주님의 교회로서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죄악의 권세가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더욱 크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드러낼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성령이여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각자와 가정에 은혜를 베푸시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도록 날마다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러분 반갑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고 감사합니다. 저는 청년 때 유니버시티 교회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데이트하던 지금의 아내가 이 교회에 있어서 같이 와서 당시 청년들과 좋은 교제를 했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오게 되어서 정말 좋습니다. 여러분은 김밥을 좋아하시지요? 그런데 김과 밥은 원래 만날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사는 데가 바다와 땅으로 완전히 다르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 조합을 좋아하기 때문에 만나서 김밥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원래는 만날 일이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공통점은 그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셔서 이렇게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청년 때에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전공이 수학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살다보면 한번쯤은 수학과 친해져야 되는 떄가 있잖아요? 수학이 다른 과목들에 비해, 답이 매우 명확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1이면 1, 2면 2 분명합니다. 어떤 과목은, 가령 영어나 역사는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수학은 명학하고, 특별히 어떤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증명은 논리적으로 완벽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한번 증명이 성공하면 그 다음에는 이게 혹시 또 틀리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전히 믿을 수 있습니다. 가령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2500년전에 증명된 것인데요, 그 이후로 아무도 이런 경우에는 틀렸는데요 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과학이나 학문은 틀렸던 것이 드러나면 수정하고 보충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학으로 무엇을 증명하면, 그것은 명확하고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진리가 됩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수학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영원하고 보편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수학적 진리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에게 권위를 가져다 줍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절대 참이라는 확신과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학 선생님도 실수하실 수 있지요. 그때 선생님 그거 틀렸는데요 하면 선생님도 오 그러네 하면서 제 말을 들어주셨습니다. 저는 좀 내성적이고, 제 주장을 막 세게 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수학은 저에게 진리에 대한 그런 권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뉴욕에 유학생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뉴욕의 한 이민교회를 가게 되었고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처음 간 것이 9월 1일 주일이었습니다. 오늘이 꼭 그 날짜와 요일이지요. 그것이 7년에 한번, 윤년이 있으면 6년에 한번 오기에 아주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오늘이 더 의미있고 감사한 시간입니다. 저는 교회에 나갔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 안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물론 수학의 진리와는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 수학적 진리는 논리적이고 고정되어 있습니다. 수학의 어떤 문제를 풀게 되면 물론 기쁨이 있고요, 특유한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학의 진리를 배우면서 아 너무 감사하다, 이 방정식에 감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영혼이 깊은 데서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나의 삶이 변화되고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되었다고 느끼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를 알려줍니다. 성경은 더 크고 놀라운 진리, 삶을 바꾸는 진리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인격적이고, 날마다 새롭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학교 공부보다 성경을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성경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에 대해 듣게 됩니다. 도마가 묻습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 길이신 예수

먼저 예수님은, 내가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나를 통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길은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길 위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례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주어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어이십니다. 그 분이 길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이유는, 그 분이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독생자, 홀로 나신 아들, 단 하나뿐인 그 분이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오셨습니다. 그 분 자신이 그 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시면서, 우리를 위한 길도 되어주십니다. 오직 이 길로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아버지께 갈 수는 결코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자에게 스스로 갈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 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참된 길,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랑하시는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그 분이 길이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갈 수 있다. 세상 어느 종교에도, 도덕에도, 이런 소식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진리가 되십니다.

-- 성육신의 은혜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받을 아무 자격이 없고, 댓가를 치를 수 없지만, 아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가령 어떤 왕이 있는데, 궁전 밖에 거지가 있습니다. 왕이 그 거지를 초대해서 씻기고,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으로 대접한다고 해 봅시다. 그 거지에게 그것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선물입니까? 거지는 아무 자격이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왕이 보기에는 너무나 낮은 자리에 있지만 왕이 그렇게 선물을 준 것입니다. 은혜란 그렇게, 아무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 분의 가장 소중한 외아들을 주신 놀라운 소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입니다. Grace and mercy. 하나님의 자비는 그분의 은혜와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아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가 있고, 자비는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진심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와 함께 마음아파하신다는 말입니다. 거지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얼마나 자기 자신을 보며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왕이 초대해서 대접할 뿐 아니라, 그 손을 잡고 진심으로 그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아실 뿐 아니라, 우리의 아픔과 고난도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아픔을 아신다는 것은,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아픔을 느끼실만큼 아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자비, 긍휼을 가리키는 단어는 창자와 상관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감정을 몸에 비유할 때가 많은데, 창자는 그만큼 애가 끊어질 만큼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그 분의 뱃속으로 느끼실만큼 아시고 함께 아파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십니다. 사람은 은혜를 베풀어도 공감은 못할 수 있습니다. 왕이 거지를 초대하지만, 함께 있지 않고 가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은혜와 자비는 늘 함께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시는 이 은혜가 또한 진리이기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요한 1:14은 말씀합니다.

-- 생명이신 예수

이렇게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또한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25:29에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싸개 안에 싸여 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소중히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호흡하고 살아갑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귀한 생명을 주님은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보호하고 돌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이 귀한 생명을 학대할 때가 있습니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멸시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 세상의 눈으로 판단하면서, 나 자신의 생명을 괴롭히는 것은, 결국 그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매우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언젠가는 약해지고 끝날 것입니다. 꺾인 꽃은 지금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횟집의 물고기는 어항에서 헤엄쳐도 죽은 목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생명도 원래 그렇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예수님의 생명이 없으면 우리는 살아 있어도 꺾인 꽃처럼, 횟집의 물고기처럼 죽은 목숨들입니다. 히브리서 2:15에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딤전 6:8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당장 먹고 입을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년, 10년 뒤, 노후, 자녀들 걱정까지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않고 늘 불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영원히 사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 붙어 있으면 참된 생명을 누립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생명,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십니다. 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명수 샘물을 아낌없이 주시는 예수님 떄문에 우리는 참된 생명, 창조자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이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최악의 경우에도,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해롭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생명, 예수님과 붙어 있는 생명은 건들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러한 담대함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 진리이신 예수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길이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사실이 진리이고, 예수님은 그 진리 자신이십니다. 이 진리는 무슨 자연법칙이나 우주의 원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수학의 정리나 법전의 조문처럼 고정된 명제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의 인격, 우리와 눈과 눈을 마주보고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사랑하시는 인격적인 진리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보장이 아닙니다. Guarantee 가 아니라 assurance 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혹시 인간 부모는 자녀와 헤어질 수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저는 이 약속을 믿습니다. 저는 혹시 내가 앞으로 잘못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취소되지 않을까? 혹시 0.1%라도 내가 구원을 잃어버리고 천국에 못 가지 않을까? 걱정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천국행 티킷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그 분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 약속의 말씀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강하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그것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진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놀라운 사랑과 은혜로 선택하시고 불러주신 주님의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희의 모든 삶이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은총을 주시고 능력을 주옵소서.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 삶이 새롭게 되고 변화받고,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며 사는 복된 삶들이 되도록 늘 저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희 모든 가족과 학교 일터와 주위 사람들이 저희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또한 받아서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저희의 생명과 자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