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0월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10월이 되면 우리 교회는 종교 개혁을 기념합니다. 우리가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리포메이션(Reformation)입니다. 원래 뜻은 종교만이 아니라 그 국가, 정치, 사회, 심지어 각 개인의 양심까지 완전히 새로 포맷하는 그런 큰 사건이었습니다. 1517년이니까 500여 년 지났지요. 우리가 이 개혁을 생각하면서 그 전통이 있는 것을 다시 살펴보기 원하는데, 그 이유는요? 왜 우리가 역사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써야 하는지 그런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미국에서는 좀 개교회주의가 발전해 있기 때문에, 그냥 우리 교회 잘되면 되고, 또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가 개척이 되면 굳이 교단에 얽매일 필요 없이 그냥 초교파로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고, 또 그런 교회 가운데 대형 교회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리더십의 카리스마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면 잘되면 되지 않나, 굳이 교단에 또 들어가서 신경 쓸 필요 있나 그런 생각도 하거든요. 그런데요, 교회가 본래 무엇인가를 생각을 해 보면 좋습니다. 당장 우리 세대에 우리 교회가 크다 작다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어떤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당대에 되지 않거든요. 어떤 교회가 금방 성장에서 커질 수 있어요. 그런데 정말 그 교회가 진짜 좋은 교회였다는 것은 그 다음 세대까지 가 봐야 돼요. 그러니까 한 교회는 그저 우리들이 갑자기 모여서 잘하고 못하고 그런 차원이 아니고, 저 옛날 예수님 때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오는 한 몸이거든요. 지금 2,000년 이상 지났는데 교회가 한 몸이에요. 그런데 우리 교회는 그게 약해요. 이유는 많이 있고, 또 그게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오늘 우리가 10월이 되어서 이번 주 또 다음 주까지 이 개혁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하는데, 이 역사를 살펴보는 이유는 결국 교회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예수님의 몸이 나뉠 수 있느냐? 바울의 말씀이잖아요. 예수님 몸은 하나잖아요. 옛날부터 한 몸, 옛날부터 믿음의 선조들이 해왔던 믿음의 싸움들을 우리들이 받아서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저 옛날에 믿음의 선조들이 했던 그런 일들을 보면서 우리도 한 몸인 예수님의 교회에 속하는 것이지요. 그런 뜻에서 역사를 살펴보고, 또 특별히 10월에는 종교 개혁을 보기를 원합니다.
종교 개혁은 마틴 루터라고 하는 한 분의 이름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루터는 독일 북부에 계셨던 원래 카톨릭의 사제입니다. 그리고 신학 교수예요. 그런데 이분이 하루는 자기 교회 성도님들을 보니까 그 면제부 얘기를 하는 겁니다. "면제부? 야 너 샀어? 나 샀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이 루터 사제님이 "그거 뭐요?" 그랬겠죠. 그랬더니 사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 이 면죄부를 사면 죄를 사해 주고 벌도 면해 줍니다" 이러는 거예요. 이론적으로는 복잡한데, 아무튼 우리가 죄를 용서받아야 되고, 또 죄는 용서받았는데 벌은 받고 뭐 그런 개념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싹 다 해결해 준다는 거예요. 이 면제부를 사면. 그 당시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좀 굉장히 세속적이 되기도 했고, 또 경제적인 압박도 있습니다. 터키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이 계속 있으니까 방어해야 되고, 로마의 대규모 공사도 있고 뭐 그래요. 그러니까 빠른 그런 방법으로 면제부를 판매하는 것을 교황님이 허가를 했습니다. 그래서 독일 지역에 이 마케팅을 하는 사람의 이름이 태첼이라는 사람이 희한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는데, 이 면제부를 사는 동전이 쨍그랑 떨어지면 그 소리와 함께 부모님의 영혼이 천국에 간다 이런 마케팅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평신도들 입장에서는 안 사기도 찜찜하고, 또 이걸 사야 지금 연옥인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우리 부모님의 영혼이 천국 간다 하니까 안 사면 두려워하는 것 같고 뭐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사는 거예요. 그런데 마틴 루터 사제님이 이걸 보니까 이건 큰일 날 소리인 거예요. 이거는 단지 돈을 뜯긴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영혼이 걸린 문제라고 봤어요. 왜냐하면 우리 죄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은혜를 받아서 용서를 받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 앞에 나의 영혼이 올바르게 되어 있고 그래서 천국 가는 건데, 이 성도님들이 그때는 성경을 못 읽으니까 다 라틴어로 되어 있으니까 성경을 못 읽어요. 그러니까 듣는 말 듣고 하는 건데, 이거 그냥 괜히 종이 면제부 샀다고 회개 기도도 안 하고 그러다가 그 영혼이 나중에 잘못되면 어떡할 거냐고? 그건 누가 책임집니까? 이 큰일 날 일이라고 본 거예요. 그래서 이 루터라는 이분이 자기의 신학적인 훈련을 받았으니까 "이렇게 우리 이거 토론 한번 해 보자" 하면서 글을 씁니다. 95개조 반박문(논제)이라는 글을 딱 써서 자기 있는 비텐베르크 그 교회 성문에 딱 붙이고, 비텐베르크가 베를린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지금은 거기를 루터슈타트라 부릅니다.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에 딱 붙이고 또 신학 교수님들한테 편지를 보내서 "우리 토론 한번 해 봅시다" 그런 느낌으로 시작이 된 거예요, 처음에는. 그런데 그 당시에 아주 대단한 미디어 혁명이 있었거든요. 뭐냐면 인쇄술입니다. 인쇄술이 그때 마침 나왔기 때문에 그게 막 이렇게 퍼져 나가는 거예요. 이게 지금으로 말하면 SNS 같은 거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에 그런 미디어의 역할에 대해서 이코노미스트 같은 글도 있고 뭐 그래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저작권 개념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누구 글인지 그런 거 따지지도 않고 그냥 독일 전역에 인쇄업자들이 "어 이거 장사되겠는데?" 하면 그냥 찍어내는 거니까 그렇게 막 퍼져 나가서 갑자기 이게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터의 메시지가 독일 귀족들에게 호응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에 독일은 지금 같은 통일 국가가 아니고 신성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말만 제국이지 그냥 여기저기 공작, 백작 이런 영주들이 다 조그맣게 다스리는 그런 지역들의 느슨한 연합체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프린스 카운티, 프린스 조지 카운티 할 때 '카운티(County)'가 백작령을 뜻하거든요. 카운트(Count)가 백작이니까 뭐 그런 느낌으로 이런 작은 영토들이 느슨하게 모여 있는 게 당시 독일이었는데, 자기 지역에서는 영주가 마음대로 하는 겁니다. 공작이나 백작이나. 그런데 그 사람들이 루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평소에 안 그래도 로마로 자꾸 돈이 빠져나가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루터의 말이 그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니까 로마에서 "이것을 안 되겠다. 이렇게 가만 놔둬서는 안 되겠구나" 하면서 이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루터를 이단 재판에 소환을 합니다. 그 당시에 이단으로 찍힌다는 거는 사형 선고거든요. 왜 이 루터가 이단이냐? 교황님이 허가했는데 이걸 반대했으니까 교황에 반대하니까 이단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원래는 루터를 로마로 소환을 하려고 했는데, 루터가 속한 지역이 작센주거든요. 그리고 작센주의 영주가 프리드리히(프레데릭)라는, '프레데릭 더 와이즈(Frederick the Wise)'라고 불리는 지혜공이었습니다. 이분이 신성 로마 제국의 굉장히 실력자입니다. 그 황제를 선출하는 권세가 있는 사람이 딱 일곱 명의 선제후라고 합니다. 선거한다는 선제후인데, 그 일렉터(Elector)라고 하는 그 일곱 명 중에 한 명이에요. 그러니까 굉장히 권세 있는 분인데, 이 프레데릭이라는 이분이 비록 루터가 하는 말이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내 백성인데 로마에 데려가는 건 안 되지"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로마랑 긴장 관계에 있다가 결국은 로마까지는 가지 않고 독일 남부의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라는 도시로 소환이 됩니다. 그것도 멀어요. 남부는 가톨릭이 강하거든요, 지금도. 그래서 한 300마일 거리를 걸어갑니다. 루터가 그렇게 이단 재판에 소환이 돼서 가면서 얼마나 스트레스가 받겠어요. 가면서 배탈나고 뭐 난리가 납니다. 아무튼 그렇게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는 이단 재판에 딱 갔는데, 거기 있는 사람이 카예탄이라는 추기경이 있었습니다. 추기경은 교황 바로 다음이거든요. 굉장히 높은 사람이고. 그런데 이 카예탄 추기경이 지금 심기가 불편해요. 왜냐하면 이 독일 귀족들한테 바로 그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회의를 했는데 "지금 터키가 계속 공격해 오니 돈이 필요하다. 세금 좀 더 내라" 그랬는데 거절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카예탄이 마음이 심기가 불편해서 "내가 루터 이 문제라도 잘 해결해야 되겠다"는 그런 느낌으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온갖 자기의 화려한 예복 다 입고 관을 쓰고 그런 세상 권세와 같은 그런 권위를 이제 내세우면서 있고, 나이도 많습니다. 루터보다 아버지뻘쯤인데 루터는 그냥 이름 없는 한 명의 사제일 뿐이고 그 앞에 갔으니까 루터가 얼마나 쫄겠습니까? 그렇게 굉장히 이제 긴장해서 있는데, 이 카예탄 추기경이 처음에는 부드럽게 시작을 합니다. "루터야, 아들아. 그러지 말고 네가 지금 이단이 되면은 넌 지금 생명도 위험한데 그러지 말고 네가 딱 한 마디만 하면 돼. 레보코(Revoco, 취소)한다는 거거든요. 'I recant (나는 취소한다)' 딱 한 마디만 하면 돼. 그럼 너는 자유롭게 풀려날 거야" 이렇게 좋은 말로 시작을 해요. 그런데 루터가 뭐라 그러냐면 "추기경님, 내가 한 말 중에 성경에 어긋나는 게 뭐가 있습니까? 성경에 만약에 어긋나는 말을 내가 했다면 나는 당연히 내 말을 취소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이 카예탄 추기경이 "그러면 성경을 보자" 이렇게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성경을 별 생각도 안 하고 교황의 권위를 얘기합니다. "교황이 교회의 머리인데, 그 교황의 허가 받고 다 하는 걸 네가 반대하니까 너 이단이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 교황의 수위권이 첫 번째 이슈가 되었고, 두 번째 이슈는 죄 사함입니다. 죄 사함을 어떻게 받느냐는 거예요. 가톨릭 교회 입장은 그것입니다. 교인이 죄를 고백하면 사제가 사해 줘야 공식적으로 사함받는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사제가 그 말을 듣고 "너희 죄를 사하노라" 그런데 어떨 때는 "너 그냥 말로 안 되겠네. 너 죄가 좀 크니까 너 가서 마당 열 번 쓰라" 뭐 이렇게 일을 시켜 숙제를 내든지 뭘 바치라 그러든지 뭔가를 하면 그러면 오케이 사해 준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건데, 그 사제의 사함이 있어야 죄 사함을 하는데 "너 그렇게 그런 사제의 권위를 네가 부인하면 되냐?" 루터가 또 반박을 합니다. "죄 사함을 그렇게 받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죄 사함을 어떻게 받느냐? 만약에 사제는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고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이 믿음이 없어. 그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잖아요. 자기 죄를 모르고 회개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사제가 "너 죄를 사하노라" 말하면 그게 죄 사함이 되겠습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맞잖아요. 우리의 죄 사함은 나의 믿음으로, 나의 회개로 주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는 거지, 사제든 누가 뭐라 그런다고 거기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죄 사함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또 질문을 하죠. 그러니까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고, 결국 거기서는 루터가 이단으로 곧 정죄가 될 것입니다. 루터는 하고 싶었던 거는 그냥 하나님 제대로 믿고, 또 성경 말씀에 따라서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고, 성도님들도 바른 구원의 길로, 영생의 길로 인도하고, 그것을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지금 이런 고초를 당하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8절의 말씀 한번 보실까요.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함이라." 루터가 자기의 올바른 믿음을 가르치고 성도님들에게 그런 믿음을 세우려고 했더니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총독과 임금들 앞에 지금 끌려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증거가 되려고. 고초가 있지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었을 때 그걸로 고난이 있다면 그 당연한 것입니다. 사실 없으면 이상한 것이고.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이냐? 증거가 되어라.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이 증인이 있다는 그 사실을 최소한 증거는 될 것이다. 그들이 믿으면 제일 좋고, 설사 그들이 믿지 않아도 그 증거는 될 것이다. 이런 말씀 여기 있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루터가 계속 로마 교회에 완전히 이제는 찍혔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1521년 보름스 제국 회의라는 것이 열리게 되겠습니다. 보름스 제국 회의에서는 황제가 나서게 됩니다. 황제는 그 당시 신성 로마 제국 전체 황제였던 분이 카를 5세(Charles V)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인류 역사에서 유례없이 넓은 영토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서유럽에서 이 사람의 땅이 아닌데를 말하는 게 더 빠를 정도입니다. 프랑스 빼고, 포르투갈 빼고, 교황령 빼고 나면 유럽 대륙에서 다 이분 것입니다. 심지어 콜럼버스를 보내서 아메리카를 탐사한 스페인의 왕이 이분의 외조부였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땅을 받아서 남북 아메리카가 이분 겁니다. 그러니 엄청난 분이죠. 그 권세와 재산이 엄청난 분인데, 나이도 젊은데 갓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지금 루터를 잡겠다고 제국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그야말로 거기에서 이단으로 판결이 나면 문자 그대로 사형선고입니다. 그래서 또 거기에 소환되어서 가게 되는데, 친구들은 말렸습니다. "가지 마라. 도망가라" 그러는데, 루터가 유명한 말을 한 도시가 보름스입니다. "이 도시에 기와장만큼 많은 마귀가 있어도 나는 간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가서 황제 딱 계시고, 교회 온갖 높은 분들이 쫙 앉아 있는 그런 재판장에 루터가 서게 되었습니다. 그 앞에는 루터가 썼던 책이 한 40권 쭉 놓여 있습니다. 질문 두 가지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이 책들이 너의 것이냐?" 예. 질문 두 번째입니다. "이 중에 무엇이라도 네가 취소할 것이 있느냐? 취소할 것이 있느냐?" 그렇게 물었습니다. 정말로 여기에서 세상의 모든 권력자, 전 유럽을 다스리는 권력자들과 세상의 높은 사람들 앞에서 한 사람의 죄인으로 딱 서 있고, 그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있고, 말 한마디 못 하면 당장 죽을 수 있는 그런 무시무시한 장소에 지금 끌려갔습니다.
이때 루터가 붙들었던 말씀이 바로 이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입니다. 28절 한번 보시겠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할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지금 루터가 거기에 딱 갔을 때 다짐한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다짐한 것은 이것은 그냥 사람들 앞에 내가 두려워하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못 보이고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의 영혼이 달려 있는 문제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구원이 달린 문제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 거기 쫙 있습니다. 황제가 뭘 하겠습니까? 기껏해야 몸을 죽일 수 있겠죠.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 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 그래서 내가 몸이 죽을 수 있지, 이거는 지금 각오하고 가는 거거든요. 신성 로마 제국의 이름으로 내가 처형당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나의 영혼은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면, 나의 믿음을 부인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것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흔들리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갔습니다. 그 자리에 가면 떨릴 수 있죠. 그래서 완전히 큰 압박감을 받아서 나도 모르게 "잘못했어요" 그럴 수 있는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나를 보호해 주소서" 기도하고 갔습니다. "주님, 내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되느냐? 하나님만을, 나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던질 수 있는 그분만을 두려워하도록 나를 도와주십시오." 29절의 한 말씀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이렇게 하찮은 참새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고, 나의 생명은 그분께 달려 있으니 그분만을 믿고 의지하고 두려워할 것이고, 그 외에 어떤 세상 권세, 황제든, 교황이든, 누구든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렇게 결심하고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자리에서 심문 받을 때, "네가 쓴 너의 주장, 너의 책들이 이렇게 있는데 이것 중에 무엇이라도 네가 취소할 것이 있느냐?" 질문을 딱 받았을 때 루터가 이렇게 말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다. 스크린에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혼들의 구원이 달린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바로 오늘 마태복음 10장 33절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 말씀 듣고 간다. 그 보름스 회의(Diet of Worms)에서 루터가 이렇게 말한 다음에,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 그럽니다. 그래서 그다음 날에 다시 모이거든요. 루터가 하루 동안 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냥 그 당시에 내가 즉흥적인 느낌으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고, 하루 동안 고민을 한 거예요. 나의 믿음이 확실한가?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믿고 있는 이 바가 정말로 올바른가? 그리고 이것이 혹시라도 나의 잘못된 실수가 아닌가? 그리고 그다음에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도 다 생각을 했겠지요. 내가 만약에 나의 말을 취소하지 않고 믿음을 굽히지 않으면 그다음에 어떻게 될 것이 뻔하거든요. 사형선고거든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죽어도 나는 괜찮은가 다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는 그래도 나의 몸과 영혼을 모두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붙들겠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서 그 다음 날에 다시 회의장으로 갔습니다. 그다음 스크린에 제가 또 읽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제가 이용한 성경 말씀에 묶여 있습니다." 방금 읽은 그 말씀이죠.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그 말씀에 나는 묶여 있습니다.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서 양심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는 양심 그러면 나 자신의 어떤 도덕이나 나의 정직한 마음 그렇게 생각하는 개인적인 양심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 당시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 있는 나의 신념, 양심(Conscience)이라는 말은 '함께 안다(Con-science)'는 뜻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본심이 나의 양심이거든요. 그 양심은 하나님 말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굉장히 유명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 양심이 나의 생명이 무엇의 포로가 될 것입니까? 죄의 포로가 되겠습니까? 아니요, 하나님 말씀의 포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루터가 이렇게 선언을 합니다. "황제도, 교황도,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의 포로입니다. 나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합니다. 성경의 증언이나 분명한 이성의 확인이 아니라면 저는 어떤 것도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못합니다." 그다음에도 굉장히 유명한 말입니다. "저는 달리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아멘." 루터의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달리 어쩔 수가 없다는 것. 여기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그것이 루터의 이 엄청난 세상 권력 가운데 가장 높은 자들이 모여 있는 그 자리에서 그가 한 고백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었고, 젊은 황제 카를 5세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걸어 가지고 "내가 이 사람을 처단하겠다. 이단자로 처단하겠다" 이렇게 다짐을 했는데, 루터가 나와서 나오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자기 방에 돌아와서 친구들 앞에서 "나는 만세! 내가 승리했다!" 이렇게 만세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그 압박이 심하면 나도 모르게 굴복할 수 있잖아요. 거기에서 그 위에 눌려서 나도 모르게 자기 믿음을 부인할 수 있는데 끝까지 믿음을 지켰으니까 "난 내가 이겼어! 만세!" 이렇게 막 기뻐 뛰었습니다.
그리고서 루터가 "나는 이제 죽었구나" 그러고 있는데, 루터가 있는데 갑자기 웬 기사복을 입은 말 탄 무리가 휙 나타나 가지고 루터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루터를 붙들어 가지고 어디론가 데려갑니다. 자취를 감춘 구출이었습니다. 프레데릭 공이—루터가 속한 작센의 선제후 프레데릭 공이—사람들을 보내서 루터를 납치하여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모셔 놓습니다. 그 바르트부르크 성은 오페라 좋아하시면 탄호이저라는 오페라의 배경인데, 탄호이저도 딱 그런 내용입니다. 독일의 신앙과 로마의 권위가 충돌하는 내용이 있거든요. 그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모셔 놓고, 불편하고 아주 좁은 방에 갇혀 지냈는데, 루터가 (몸이 안 좋은 와중에도) 그 성에서 한 일이 독일어 신약 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때부터는 독일의 성도님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게 된 거거든요. 처음에는 신약, 나중에는 구약도 번역했습니다. 지금도 루터 바이블은 지금도 있고 지금도 베스트셀러입니다. 루터가 이렇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상황에서 자기가 품에 간직하고 있던 딱 책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 원어와 헬라어 신약 성경 원어였습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루터가 곧 죽을지 모르는데 품에 품고 있던 게 원어 성경 그 두 개를 품고 있는데, 붙들려가서 이제 성에 갇혀서 할 것도 없고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성도님들의 손에 성경을 쥐어 주게 되었고, 자신의 눈으로 읽어 보니까 맞거든요. 로마서 1장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성도님들이 변화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종교 개혁이 불길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전통 안에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루터는 독일 스타일이고, 루터 혼자 개혁을 할 수가 없었고 그를 보호해 주고 공감한 귀족들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살아날 수가 있었고, 개혁이 독일 지역에서는 퍼져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독일의 정치 지형에서는 그게 맞았고, 그런데 그게 독일 바깥으로 수출되기는 좀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 말씀과 그런 가르침을 받은 칼빈이라는 분은 프랑스 사람입니다. 프랑스는 워낙 카톨릭이 강하니까 거기서는 쫓겨나다시피 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이민자로서 그곳에서 이제 개혁 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전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개혁 교회입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거쳐서 장로 교회라고 불립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전통을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냥 "우리 교회 너무 잘하고 있어" 하고 개교회 중심으로 가는 것은 장점도 있지만, 본래 교회의 정신, 그리고 전통을 따라 쭉 이어오는 한 몸이 되신 예수님의 한 몸이 있는 그런 교회의 본질에 좀 맞지 않습니다.
전통(Tradition)이라고 하면 우리들이 딱딱하게 느낄 수 있는데, 교회에서 전통이라는 단어는 특별합니다. 그 전통(Tradition)이라는 말의 원래 뜻이 '넘겨받다'는 뜻이거든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가 믿는 거를 발명해 내지 않았습니다. 아무 교회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이 복음의 메시지는 누가 생각해 낼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반드시 누군가로부터 전해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사도들에게 그것을 전해 주셨고, 사도들은 그다음 세대, 그다음 쭉쭉 전해 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2,000년 지난 우리들도 그걸 받은 것입니다. 그 전통(Tradition)을 받아서 우리들은 전해 주죠. 바울이 "내가 전에 들은 것을 너에게 전한다" 하면서 성찬식 얘기할 때 같은 단어(전통, Tradition)를 쓴다는 겁니다. 교회가 전통을 얘기하는 것은 옛날 전통 그런 느낌이 아니라, 원래 뜻은 우리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부터 면면히 이어지는 일관된 주님의 몸 된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비록 지금 우리 인간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그리고 역사적인 여러 이유로 인해서 교단들이 갈라져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거예요.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지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이렇게 여러 교단으로 갈라져 있으면 서로서로 대화하고 형제자매로서 한 가족으로서 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어 이루어 가는 그런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거는 상관없이 그냥 우리 교회만 잘되는 개교회주의가 미국에서 굉장히 발전해 있고 한국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극복해야 됩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들이 속해 있는 전통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가 그냥 여기에 딱 하나 있는 게 아니라, 이런 말씀의 전통 가운데 특별히 개혁의 전통이 있는 우리 교회가 갖고 있는 역사가 왜 중요한지를 살펴보았고, 특별히 마틴 루터라는 하나님만 두려워한 사람, 그 사람이 겪었던 고난과 그 투쟁과 세상의 위협 가운데서도 말씀만 붙들고 믿음을 지켰던 그분의 헌신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신 이런 믿음, 또 말씀을 우리들이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설교 게시판
지금 우리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새벽 기도회 때도 이사야서를 읽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조인하시면 좋겠고 또 각자 집에서도 계획표를 따라서 함께 읽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오늘 읽은 이사야 10장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사야서는 주전 8세기가 배경이고 그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앗수르의 침략이거든요 앗수르라는 거대한 제국이 주의 여러 나라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고 유다를 향해 물밀듯이 쳐내려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가 어 거의 멸망하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이 이사야의 배경이거든요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을 어떻게 성도들이 어 맞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은 정말로 절실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어떤 그 전쟁의 어 모습을 보였는지 이사야 5장의 말씀이 있거든요 한번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5장 28절에 제가 읽어 드리면 그들의 앗수르 군대에 화살은 날카롭고 그 무기가 다 아주 잘 정비되어 있고 모든 활은 당겨졌으면 그 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거죠 장전이 다 끝났습니다 그들의 말은 부시돌 같고 부시돌 이렇게 불켜는 불꽃을 일으키는 돌인데 말들의 발굽이 얼마나 그 빠르고 강하면 밑에서 불꽃이 튀는 정도라는 거지요 그들의 병거 바퀴는 회오리 바람 같다 병거 그 말들이 앞에서 끄는 전차 있지 않습니까 그게 요즘으로 말하면 탱크입니다 그렇게 말들이 쏜살 같이 전차를 끌고 내달리면 그 앞에서 다 도망갈 수밖에 없는 그런 강력한 전쟁 무기인데 그 바퀴가 돌아가는 것이 회오리 바람 같다 그러니 정말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지 말로 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그 군대의 부르짖음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하고 쭉 계속 더 나가겠습니다 사자 같은 그런 무서운 그리고 말들이 내달리고 전차가 회오리 바람 같이 막 이렇게 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해 보면 아 정말 빠르고 강하다 뭐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무서운 군대가 유다를 향해서 쳐내려오고 있으니 하나님 도대체 저 군대가 어떻게 이런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상황에서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바로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이사야 10장입니다
5절의 말씀 한번 보시겠습니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앗수르 군대가 저렇게 온 세상을 정복하고 다니는 것이 그들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이 뭐 하나님을 뭐 몰아낸다든가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무기력하신다든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고 도리어 앗수르 군대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손에 드신 막대기요 몽둥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지금 진노하셨거든요 그래서 자기 백성을 이제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막대기와 몽둥이 그것이 앗수르 군대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이런 권세를 잠시 허락하신 하나님을 그들이 인정하고 찬양해야 하지요 만약에 앗수르 진영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었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앗수르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면 그들은 이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언자가 그 가운데서 할 말씀은 아 지금 우리 앗수르 군대가 이렇게 강한 것이 우리가 잘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늘의 하나님이 잠시 우리에게 이런 권세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그분의 뜻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강하고 잘난 것처럼 세상 나라들을 우리 마음대로 다 이렇게 멸망시키고 다녀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을 그들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나라든가 또는 나훔 이런 선지자들이 앗수르를 상대로 하는 선지자들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 말씀을 그들이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런 죄의 길 가운데 행하고 결국은 이들도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막대기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진노 그분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노하심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미워하신다거나 이제는 적개심을 가지고 대하신다거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늘 하나님의 사랑에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뜨거운 열정적인 사랑이고 그것이 때로는 진노로 표현이 됩니다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사랑과 진노가 같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어떤 영화를 보고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이게 좀 옛날식 제목으로는 혹성 탈출이라고 하는데 플래닛 오브 에이프스라는 영화 또 얼마 전에 리부트도 됐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침팬지가 어떤 실험을 통해서 인간과 같이 이렇게 똑똑해지거든요. 이 침팬지가 어떤 마음 좋은 가족이랑 같이 살고 있는데 그 가족의 할아버지가 이제 연세가 있으니까 기억력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이 할아버지랑 옆집에 사는 어떤 남자랑 다툼이 생겼어요 그래서 옆집 남자가 화가 나서 이 할아버지를 밀칩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위해서 그 똑똑한 침팬지가 내려다 보고 있다가 갑자기 격분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이웃집 사람이 밀치는 것을 보고 참지를 못해서 그만 집을 집 앞으로 뛰쳐 나가서 그 옆사람을 옆집 사람을 공격하죠 그때부터 일들이 걷잡을 수 없이 막 흘러가게 되는데 이 침팬지가 그렇게 막 경로했던 이유는 뭐 성질이 나빠서 그런게 아니고 이 할아버지를 사랑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런데 나의 사랑하는 그 사랑이 지금 괴로움 가운데 있으니까 그게 진노로 표출이 되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뜨겁게 사랑하시는데 때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또 때로는 이 세상의 시험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가서 하나님을 버리고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그 사랑의 감정을 뜨겁게 표출하시는데 이게 진노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그 손의 몽둥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고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하신 뜨거운 마음과 그 사랑이 이렇게 표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6절의 말씀 보시겠습니다 내가 그를 앗수르를 보내서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경건치 않은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또 유다 나라가 되겠습니다 그 영어로 가리스라고 되어 있는데 딱 와닿죠 하나님이 없는 백성 경건치 않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맺어졌습니다 그 출애굽기 때 이집트에서 하나님이 그 종사리에서 해방시키시고 언약을 맺으셔서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그분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이 맺어졌습니다 그 언약의 기초는 십계명이고 그 첫 번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하나님만을 섬기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되고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것이 너무나 옳습니다 왜냐면 우리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전능자이시고 온 우주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은 사람이 만드는 거예요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절하는 것입니다 예 그러니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만 하나님 백성들이 그렇게 하였죠 다른 나라에 다른 신들을 섬길뿐 아니라 그것이 우리 하나님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하나님을 그렇게 왜곡시킵니다 자기의 욕망 자기 욕심 자기의 쾌락을 하나님에 대한 경원과 이렇게 종합시킴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신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올바른 길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 그 막대기와 몽둥이를 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 나라를 명령하여서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치게 하시고 그들을 탈취하고 노략하고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7절의 말씀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 앗수르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그러나 앗수르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이 지금 나를 쓰시는구나 하면서 겸손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고 전혀 하나님은 관심 바뀌고 그저 자기의 힘 자기의 군사력과 자기의 힘을 자랑하면서 어 이 세상의 여러 나라들을 파괴하며 멸절하겠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의 마음이 정말로 특별하여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과 반대되고 불순종하고 그럽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지으신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 사람만이 유일하게 이렇게 합니다 사람 위에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과 같은 영이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섬깁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기지요 천사들은 오로지 하나님만 위만 바라보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인간 아래에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동물들은 땅만 바라보죠 그래서 그들은 그저 육신의 필요만 채워지면 먹을 것만 있고 안전하게 잠잘 곳이 있으면 그냥 평안합니다 그래서 이 땅만 바라보고 육신으로 살죠 동물들은 죄짓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물들에게 무슨 언약이나 율법이나 그런 걸 요구하지 않으셔요 그래서 육신대로만 살면 만족한 것이 동물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딱 그 사이에 있어요 천사들처럼 온전히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동물처럼 육신을 물질을 섬길 수가 있는 그런 존재지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말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유 의지 하나님 우리에게 자유로운 의지를 주셨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내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 버리고 떠날 수도 있고 그렇게 창조하셨다 예 그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왜 그런 왜 그랬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로봇이라면 그냥 무조건 입력한 대로 오직 하나님만 따르도록 그렇게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렇게 로봇이라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말할 수 없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데 자기 선택으로 스스로 하나님 사랑하는게 진짜 사랑이죠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인격적인 상대 사랑하는 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만약에 그들이 원한다면 하나님 사랑 안 할 수도 있는 그런 선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스로 하나님 사랑하는 이것이 참 사랑이기 때문에 그런 존재로 우리 인간을 지으셨고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도록 하나님은 원하셨다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설명이 있고 굉장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이 자유 의지라는 이 개념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런 자유로운 의지를 주셨는가 선악과를 주셨는데 왜 따먹을 수도 있는 그런 선악과를 주셨는가 이런 질문에 예 자유 의지를 주셨다는 대답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어떤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집에는 뒤에 수영장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였는데 그 물놀이를 하고 놀았습니다 한쪽은 얕고 점점 깊어지는 수영장이었는데 저는 그 집에서 그 집사님과 같이 대화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딱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발도 벗고 양말도 벗고 주머니에 폰도 꺼내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수영장 쪽을 보는 거지요 아니나 다를까 좀 있으니까 제 아이가 물 먹고 있더라고요 저는 바로 냅다 물속으로 첨벙 뛰어 들어가서 이제 그 아이를 건져냈습니다 잘했죠 예 저의 그 행동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아이를 건져내는 행동이 자유 의지일까요 자유 의지 맞죠 아무도 저에게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거기 가서 아이를 건져내지 않으면 너는 벌을 받을 거야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순전한 저의 자유 다른 한편으로 저한테 초이스가 있었을까요 아 이건 내 자유니까 건져도 되고 안 건져도 돼 제가 그랬습니까 저에게는 초이스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저의 자유가 있지만 저는 그 모든 자유를 전부 사용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그 아이를 건져내는데 사용했습니다 왜 아이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나의 자유로 모든 거 다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걸 다 하지 않고 오롯이 그 자유를 사랑에다가 쓰게 됩니다 저는 그때 아이를 건져내는 거 한 10초 그 시간에만 그렇게 했고 대부분은 굉장히 실수가 많지만 하나님은 온전히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자유 안에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자유와 사랑이 두 단어가 하나님을 딱 특징 짓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자유가 있으십니다 아무도 하나님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명령할 자가 없죠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로운 주권자이시지만 그 사랑을 온전히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데 쏟아붙는 것입니다 자유 안에서 사랑하신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 자유로 자기 자신을 속박시키시고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 의지라는 말이 굉장히 좋은 말이지만 오해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모든 섭리의 해답이라든가 그렇게 완전한 대답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자유 의지에 대해서 굉장히 깊은 묵상을 하신 분이 어거스틴 우리가 예전에 봤었죠 어거스틴 고백 7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우리 그 다음 그림을 하나 보시겠습니다 그다음 슬라이드의 그림을 보시면 어거스틴이 자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 위에 있는 천사들은 마치 불과 같아서 불은 위로 올라가잖아요 그것이 그들의 본성이니까 천사들은 하늘의 위에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위를 향하고 동물들은 돌과 같아서 저 돌입니다 돌은 땅이 떨어지는 것이 그것의 본성이라서 땅으로 향하고 그래서 동물들은 땅으로 향하는데 인간만이 그 가운데 천사와 동물 가운데 있는 존재라서 위를 향해서 하나님을 향할 수도 있고 이 땅을 향할 수도 있고 그죠 죄를 내 육신을 향할 수도 있고 그런 존재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인간을 굳이 창조하셨는가? 이 피조 세계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라 그럽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시는데 만약에 위를 향하는 천사와 아래를 향하는 동물만 있으면 그 가운데가 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치 않은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완전하게 딱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특별한 거 그 위를 향할 수도 있고 아래를 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위를 향하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의 위계 질서에서 위를 향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모든 것을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는 사람의 마음은 그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 그 것으로부터 왜곡되어서 반대쪽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들처럼 이 땅에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것을 향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이고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괴로움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맞는 말이지요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죄악과 괴로움 가운데 고통받고 슬퍼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의 마음이 위로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반대로 이 땅을 향하고 세상의 물질과 육신적인 즐거움과 육신적인 그런 안정 그런 것을 원해서 살다 보니까 하나님을 등져 있죠 그것이 이 세상의 죄와 괴로움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앗수르 왕이 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앗수르에게 잠시 이런 권세를 주신 것인데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아 내가 지금 이렇게 강하구나 뭐든지 할 수 있어 하면서 세상 나라들을 다 하나하나 격파하면서 다니는 것이죠 그 마음이 이 땅을 향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죄 가운데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유 의지에 대해서 깊은 통찰을 주는 분이 루터입니다 루터가 노예 의지론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아니다 우리들은 죄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죠 우리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아닐 수 있고 그런 거 같지만 인간들이 워낙 오랫동안 타락해 있기 때문에 그죠 우리 이전에 수많은 세대들 수천년 동안 인간들이 이런 죄 가운데 우리가 너무나 이제는 물들어 있어서 사실상 선택이 없다 우리들의 의지는 노예로 묶여 있다 이렇게 말을 그러니 우리들은 죄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면 참 심오하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분명히 나의 뜻으로 나의 자유로 하나님만 섬기고 주님만을 기뻐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자녀로서 염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돼요 희한하게 며칠 지나면 다시 나의 생각은 이 세상을 향하고 염려하고 이 세상적인 육신적인 그런 즐거움과 또는 안정감과 그런 것을 추구하게 되죠 저 옛날 앗수르 왕 이때에는 왕들이 이렇게 온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세상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그런 왕이나 황제라든가 이런 귀족이나 그런 이런 사회의 계급이 아니라 예 물질 돈이 되어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돈으로서 계급을 나누고 돈을 더 갖기 위해서 밤에 잠도 자지 못하고 염려하고 그것으로 사람 차별하고 멸시하고 멸시받고 이런 세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나라들이 이 사람들이 자유롭지 않은 것이죠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런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자유를 스스로 올가매서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의 또 육신의 죄에 종노릇하는 그런 인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다시금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저 위를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저 위의 것을 찾으라 우리의 시민권이 있는 하늘을 향해서 우리의 의지가 똑바로 다시금 위를 향해야겠습니다 그것이 회개이고 그것이 거듭남이죠 우리들이 거듭나면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들이 즉시로 아주 거룩한 성인이 되는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믿어서 차츰차츰 성화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인격은 아직 많이 부족하고 심지어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 행실로만 성품으로 보면 우리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안 믿는 분들 중에도 많이 있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이제 거듭나고 예수님을 믿으면 비록 겉모습은 아직까지 이렇게 구별되지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방향은 똑바로 위를 향해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점이에요 비록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은 크리스천들도 뭐 그렇게 특별하게 다른 건 없네 그냥 뭐 똑같이 사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것이 맞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비록 내가 아직 부족하고 많이 성화될 것이 많이 남아 있어도 그러나 적어도 방향은 올바른 것입니다 위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똑같이 살았어도 방향이 반대였어요 죄를 향해서 육신을 향해서 살았어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지요 그러나 지금은 방향을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래서 똑같이 살아도 마음은 다르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더 닮기 원합니다 하고 성화되기를 바라는 그런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죄된 모습 그런 육신의 부족한 모습을 이제는 당연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 여기죠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 내가 아직까지 나의 육신적인 그런 염려가 있어서 마음에 불안하기도 하고 두려움도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는 이런 부족한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요 하고 나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는 그 모습은 있죠 그게 다른 겁니다. 이 크리스천의 가장 큰 덕목은 결국은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것입니다 주님 내가 이만큼 부족합니다 아직 예수님 닮기 위해 갈 길이 멀지만 그러나 이런 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나는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하면서 늘 겸손한 것이 크리스천의 참된 모습이 되겠습니다 그런 세상 의지하는 모습을 더 이상 당연히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는 안 되니까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런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하는 그 모습이 늘 있습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인 하나님 자녀들의 다른 모습이죠 우리들이 나 자신을 이 시간에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찾고 주님 앞에서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오늘 또 한번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2절의 말씀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이렇게 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앗수르 왕이 그 자기 마음대로 교만해서 내가 세상 나라들을 다 멸망시키고 다닐 거야 죄악된 생각으로 가득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앗수르를 통해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일이 다 되고 난 후에는 다 행하신 후에는 이제는 앗수르 왕을 벌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하 13절 이후에는 하나님이 앗수르 왕을 어떻게 심판하실까에 대한 내용이 쭉 나오게 되지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세상 나라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더라도 하나님은 심지어 그것마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지요. 성경에는 그런 예가 굉장히 많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았을 때는 나쁜 마음으로 그렇게 했고 그래서 결국은 요셉은 이집트에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일마저도 하나님은 은혜로 바꾸셔서 나중에 야곱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내려올 수 있도록 미리 인도하신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멀리하여서 자기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이렇게 교만해서 이렇게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비록 내가 내 생각으로 이래저래 한다 하지만은 우리 마음의 생각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 이 앗수르 왕처럼 반대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용하시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적어도 방향은 하나님의 앞에서 똑바로 설 수 있도록 그래서 나의 생각과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결혼을 할까요 말까요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제가 이 공부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하나요 별의별 하나님께 드릴 질문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참 예술 같습니다 이게 뭐라고 간단히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고 그야말로 한편의 그런 예술처럼 그렇게 어 섬세한 면이 있는데 대체로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힌트들을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물론 당연히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 우리들이 기도를 하고 그 가운데 아 내 마음이 편하구나 이럴 때가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어떤 이렇게 했을 때 이것을 생각할 때 아 마음에 내 마음에 평화가 있네 아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예 그렇게 그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때 그런 적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 적이 많이 있고 그러나 완전한 답은 아닙니다 이게 완전히 그렇다는 뜻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나의 선입견으로 딱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 길을 생각했을 때 내 마음이 편하구나 그것이 하나님의 길일 수도 있지만 또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게 답이라고 단정 지으면 안 되고요 그렇지만 그런 것으로 하나님 뜻을 구하는 그런 하나의 힌트를 삼을 수는 있겠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선택지가 있는데 제일 힘든 길로 고난의 길로 가라 그럽니다 이게 또 말은 됩니다 왜냐면 평소에 내 생각대로는 절대로 안 갈 길이라면 거기에 혹시 하나님이 뜻하신 길이 있으셔서 오직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이 어 택하신 사람만 갈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길 고난이 있다든지 그런 특별한 길로 인도하실 때가 있는데 그 그런 선택이 있다면 그렇게 가라라고 하는 그런 어 말씀도 들어본 적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도 완전한 답은 아닙니다 늘 그러라는 말은 아니에요 당연히 힘든 길로 갔다가 그 나에게 맞지도 않아서 나중에 너무 고생하면은 너무 힘들죠 예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딱 정답은 없을 것입니다 야 이렇게 되면 이게 그 길이야 그런 뭐 알고리듬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하나님 뜻을 우리들이 기도하면서 찾고 가는 것이죠 하나님과 우리들이 어찌 보면 계속 대화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비롭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일일이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하나하나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경우도 있고 예를 들어서 다윗이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할까요 하나님이 일일이 알려 주시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인간의 수천년 역사 중에 몇몇 경우만 성경에 나오는 거거든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일상적으로 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 말씀 들려 주시면 내가 알겠습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고요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성숙해 가고 성화의 길을 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길을 찾을 때에는 그저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 어디로 갈까요 그 선택에 나의 절실한 질문보다 사실 결국 더 절실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지요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더 닮아가고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또 그분의 뜻으로 나의 삶을 돌아본다면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점점 더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내가 주체적으로 나의 자유로 책임감을 가지고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나는 몰라요 하나님 선택해 주세요 그것은 그렇게 성숙한 태도가 아닐 것이고요 하나님 안에서 나의 뜻이 하나님의 마음과 가장 합하기를 바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하나님 안에서 책임감 있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도와주셔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성숙해야 되겠죠 그래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을 인도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그 뜻이 나의 삶 가운데 가득 채워서 채워져서 자연스럽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그 발걸음이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삶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성결하게 되는 성화의 길을 가고 기도의 길을 가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주님 사랑하시는 자녀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또 주님께 나의 삶이 나의 마음이 합쳐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인도하시는 대로 나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세상 죄인들처럼 되지 아니하고 나의 마음에 하나님과 합하여서 주님 인도하시는 대로 주의 뜻을 이루는 그런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 돌아보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의 제목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이 질문을 했습니다. 이 분은 과연 누구신가? 누구시기에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잘 가르치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이 분과 함께 있어서 모든 영적인 존재들에게 명령하시고,병자들을 고쳐주시는가? 질문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또는 옛 선지자 중 한명이라고 말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조금 전에 세상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열정적으로 전한 분입니다. 그는 악한 왕 헤롯에게도 거침없는 비판을 날려서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죽은 세례 요한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요한을 헷갈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sns가 없어서 사람들이 얼굴을 잘 모를 수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요한 두분 다 하나님에 대해 탁월하게 가르치시니까 헷갈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요한이라고 말한 것은 헷갈린 게 아니고, 죽은 요한이 살아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요한이 부활했다고 믿은 것입니다.
몸의 부활은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이 죽은지 3일째에 부활하셨고, 그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몸이 부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물어보면, 죽으면 영혼이 구원받는다, 영혼이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리스 로마 문명에 기반한 서양 전통에서는 영혼의 구원이 중요합니다. 인어공주 이야기 다 아시죠? 특히 디즈니 버전이 제일 알려졌지만, 원래 안데르센의 원전을 보면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원래 안데르센의 원전을 보면 이것이 굉장히 종교적인 내용입니다. 그 세계관에 의하면 인어들은 한 300년쯤 살고 그다음에는 물거품으로 사라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어공주는 “이렇게 300년을 살아도 결국 물거품으로 사라진다면 너무 허무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아주 지혜로운 할머니에게 가서 상담을 하죠. 그랬더니 이 할머니가 말합니다. “저 육지 위에는 인간들이 사는데, 그들은 비록 100년 남짓밖에 못 살지만 그들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있다. 그래서 그 영혼으로 영생할 수 있다.” 그러자 인어공주가 말합니다. “나도 그 영혼 갖고 싶어요. 나도 영생하고 싶어요.” 할머니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네가 인간이랑 결혼하면 그 사람의 영혼이 너의 것이 되기 때문에 너도 그 영혼을 받아서 영생할 수 있다.” 그래서 인어공주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것처럼 서양 기독교회는 ‘영혼이 구원받아 하늘나라 간다’는 개념이 아주 강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그 악한 왕 헤롯을 비판했다가 감옥에 가고 결국 억울하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엄청난 불의이고 범죄지요. 그런데 그렇게 죽은 세례 요한이 영혼만 하늘나라에 가면 그 사람은 좋겠지요. 이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니까 더 이상 슬픔과 아픔이 없는 그 영혼의 상태로서 영생을 사니까 그분은 좋겠지만, 땅에 남아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 악한 헤롯 왕은 계속해서 벌도 안 받고 죄를 짓겠죠. 그러면 그 왕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신음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부르짖겠지요. “하나님, 어찌 이 세상이 이렇게 악합니까? 하나님 제발 구원해 주세요!” 만약에 그런 영혼의 구원으로 끝나고 이 땅에서 아무 일이 없으면, 그럼 하나님은 하늘나라만 다스리실지 몰라도 이 땅에는 하나님이 무력하시거나 무관심하시거나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나라뿐 아니라 이 땅, 모든 피조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하늘나라를 다스리시는 것과 같이 이 땅도 다스려 주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강력한 판결과 심판의 행동이 ‘부활’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이 살아난 분이 예수님이라고 처음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그를 죽인 헤롯 왕입니다. 자기가 목베어 죽였거든요 그런데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헤롯왕은 아주 악한 사람이죠. 성경을 읽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부활의 개념을 갖고 있었던 것은, 그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일반적으로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산다는, 의학적인 사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헤롯왕이, 자기가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그래? 그럼 다시 죽이지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심 두려워합니다. 요한은 죽여도 죽일 수 없는 사람이다, 그가 살아서 헤롯왕의 악행을 모두 고발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지요. 무엇보다 그가 두려워한 이유는,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죽인 요한을 하나님이 살리셨다. 하나님이 요한의 편이시다. 그러면 요한을 죽인 자신은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두려워한 것입니다.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지요. 예수님이 죽고 살아나셨다는 것이 기독교 메시지의 시작입니다. 이 부활은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이고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자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지요. 우주와 그 안의 별들과, 행성들과 갤럭시와, 그 안의 모든 생명들과 세포들을 모두 창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사람의 부활을 말하거든요. 무덤 속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부활할 것입니다. 무덤 뿐 아니라, 요즘은 화장이나 수목장 등 어떤 형식이어도, 그 분은 우리가 죽어서 몸이 다 흩어져도, 다시 새로운 몸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신에 대한 개념은 있습니다. 믿지는 않을지라도, 대략,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모든 것을 아신다. 내 마음 속의 생각도 아시고 모든 곳에 계시지요. 그리고 그 분은 전능하십니다. 그런 분에 대한 개념은 있어요. 그래서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 되면, 믿지 않았어도, 저도 모르게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지요. 그런 것을 자연적인 신지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연적인 신지식은, 우리들이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될 때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온전하고 믿을만한 인식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 인간의 경험과 지식은 너무나 제한되어서, 정말로 전능하신 하나님 그 분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성을 아무리 활용해봐도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증명하지 못합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연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하나님이 있다 없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근대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중세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실제로 천구들을 돌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와 달과 행성들은 하늘의 여러 천구들, 마치 양파처럼 생긴 층들에 박혀 있고 모든 별들은 가장 바깥 층에 고정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저 위에서 돌린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행성들과 별들이 돌아간다는 것이죠. 그러나 뉴튼이 만유인력으로, 물리법칙으로 그것들을 설명하면서, 그런 하나님은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없어도 우주는 잘 돌아가네. 그런 식으로 점점 하나님이 인간의 인식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우주의 모든 원리를 다 발견하면, 하나님이 필요없습니까? 어떤 집에 대해 완벽하게 다 알아서, 그 재료와 구조를 다 설명할 수 있으면, 그 집을 지은 건축가가 없어집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은 이 우주의 법칙을 아예 만드시고 우주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이 만드신 우주의 법칙에 매이시지 않지요. 그러니 우리의 과학 법칙으로 그 분을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약 어떤 과학자가, 과학을 근거로 하나님이 없다거나,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이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크고 놀라우신 분입니다. 가령 그 분은 모든 곳에 계시지요. 하나님이 안 계시는 피조세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령 우주는,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크기가 930억광년이라고 합니다. 말이 쉽지, 상상도 못할 크기인데, 그 모든 우주의 구석구석에 하나님은 다 계십니다. 만약 100광년 떨어진 별이 있으면, 그 별빛이 오는데 100년 걸리지요. 우리가 보는 그 별의 모습은 100년 전 과거의 별입니다. 그 별과의 중간지점에서는 50년전 과거의 별을 보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별과, 지구와, 그 사이 모든 지점에 모두 계십니다. 그러니 그 별의 현재와, 50년전, 100년전, 모든 시간을 동시에 보십니다. 같은 원리로 우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는 현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은 단순히 아---주 오래 계신다는 뜻이 아니고요. 그러면 얼마나 지루하실까요. 그게 아니라, 우리 우주의 시공간을 아예 초월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그 분 앞에는 마치 바로 눈앞에 있듯이 다 보입니다. 그런 존재만이 참 신이시죠. 그런데 그런 존재를 어떻게 과학으로 접근하기를 시도조차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과 상상을 모두 완전히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가 안 느껴진다고, 하나님이 없다거나 멀다거나 하고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판단이나 느낌은 하나님에 대해 무력하고 믿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다가오셔야 합니다. 그 분이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면, 비로소 우리는 그 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객관적이거나, 과학적, 역사적일 수 없습니다. 단지 그 계시를 보고 들은 사람들이 전해줘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성경이 바로 그 기록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증언하고 기록한 것을 모은 책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20절의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메시야는 원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고,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서 그의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특별히 보내시는 구원자, 주님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전히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그 분이요 그의 영광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째에 부활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부활은 단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은, 세례 요한의 경우에서 보듯,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살려주시고, 그를 죽인 악한 사람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을 보여주시는 행동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로부터 악한 일, 불의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그렇게 약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는 분입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은 단지 메마르고 지루한, 비인격적인 개념이나 원리나 에너지가 아닙니다. 인격적인 분이시고 매우 열정적인 분입니다. 뭐에 열정적이신가? 그 분의 자녀들을 위한 사랑이 어찌나 뜨거운지, 못 말리는 분입니다. 그 분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과 불의를 당할 때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오셔서 세상에 자신을 알리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보시고, 반드시 개입하시고, 자녀들을 건져 주시고, 악한 사람들을 정의로운 심판자로서 소환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부활로 나타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에 의해 불의하게 죽임을 당했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살리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죽였던 악한 권력자들을 벌벌 떨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해 온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부활은 세상의 악한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 심판이 됩니다. 내가 죽인 사람들을, 내가 죽은 다음에, 모두 다시 살아나서 만나야 한다면, 그것처럼 두렵고 괴로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거기에 재판장으로 계십니다.
반면에 부활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말할 수 없는 기쁜 소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은 분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평생 그 상실을 가슴에 묻고, 죽을 때까지 슬퍼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고, 그저 멍든 가슴을 가지고 죽는 날만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우리들의 몸을 살리십니다. 그리고 죽음이 갈라놓았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그 소망과 위로, 회복과 치유가 성경에는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기어이 안믿겠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우리 몸도 살리실 수 있는 전능하신 창조주를 믿으면, 세상 아무도 주지 못했던 놀라운 기쁜 소식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있습니다. 인간세상에서는 더이상 만족과 평안을 갖지 못해도, 나의 이해와 경험 너머에 계신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 분을 믿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처리할 수 있는 데이타로 주어지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분을 찾아서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누구라도 성경을 읽으면 그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선택을 요청합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안에 들어갈 것이고, 거절하면 똑같은 삶이 지속되다가 끝날 것입니다. 증명할 수가 없으니 믿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분은 언제나 우리 바로 곁에서, 우리가 그 분을 바라보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결코 짧지만은 않은데, 그 긴 세월 동안 한번도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는다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한번만이라도, 젊은 날에, 혹시 하나님이 진짜가 아닐까, 그 분을 믿으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지식이나, 선입견이나, 전에 들었던 여러 이야기들이 있더라도, 한번은 그런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그 분만 마음속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직 잘 몰랐지만, 그 분은 그 모든 시간동안 나를 사랑하신다는데,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데, 그 분께 마음을 열면 어떻게 될까, 살면서 한번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그 분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 하나님 아버지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입니다. 내용이 지난주에서 바로 이어지겠습니다. 때는 주전 8세기, 유다 나라가 북쪽에 있는 두 왕국, 아람과 에브라임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서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있습니다. 왕 아하스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저 두 북왕국들은 곧 사라질 터이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라고 왕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믿음으로 굳게 서면 흔들리지 않습니다라고 권면했지요. 그런데 아하스 왕은 그 말을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고 합니다. 징조는 표적이라고도 하는데 사인입니다. 하나님이 사인을 보여 주시면 정말로 그 말씀대로 되겠구나 하고 믿을 수 있지요. 왕에게 사인을 한번 구해 보시지요 말했는데 왕이 거절합니다.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습니다. 그 말이 믿음이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인을 안 보여 주셔도 나는 잘 믿을테니까 굳이 그렇게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반대입니다. 아하스는 그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전혀 없어요.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이 보여 주셔도 내가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 느낌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고 이사야 선지자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말합니다.
13절에 보시겠습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하나님이 지금이 괴로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괴로우시게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평강과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고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주님은 해결할 길을 주시는데 우리가 믿지 못하면, 자녀가 부모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힘들어하면 부모님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아, 괴롭다 그러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들이 주를 의지하고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고 감사하면서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내면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14절에 이사야가 말합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징조는 사인이지요. 사인은 의미가 중요합니다. 교회로 들어오는 길 입구에 교회라고 적혀 있고 화살표가 있으면 그것은 사인입니다.이 길로 가면 교회가 된다. 그런데 그 화살표를 아무리 들여다 봐도 거기엔 교회가 없습니다. 사인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중요한 것이지요.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사인을 주실 건데 사인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하는 바가 중요하겠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굉장히 유명한 말씀이지요. 바로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나실 예언이 되겠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많은 예언들 중에 맨 먼저 인용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은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특별한 아이가 태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예수님으로부터 700년 이상 이전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때 예수님이 너무 먼 미래이십니다. 7세기 이상. 그런데 본문의 맥락은 당장 북쪽의 왕국들이 처내려오는 긴급한 상황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분들, 이 말씀을 받고 읽는 8세기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무슨 의미가 되겠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게 성경 읽기의 재미입니다. 성경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무슨 마음인가 하는 것을 읽을 때에, 때로는 우리가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해서 그 당시 분들에게는 무슨 의미였는가? 오늘 우리에게, 또 미래에는 무슨 의미인가? 다양한 의미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다 여러모로 살펴보면 참 유익하지요.
그 당시에, 당장 지금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가? 아마도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가 잘 아는 어떤 아이가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지금 우리들은 누군지 모르지만 그 아이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사인이니까, 이 아이가 어떤 이름인가, 아이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게 중요한데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그러니 이 아이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아이입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출석을 부릅니다. 임마누엘, 네 하면 선생님도 옆에 있는 아이들도 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다시 한번 상기할 수가 있지요.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해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는가? 나는 그렇게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그러나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리키는 사람,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람, 그래서 임마누엘,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구나, 이런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우리 하나님 자녀들의 삶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이 아이가 그런 아이고 이름 자체가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사실을 아는 곳마다 이웃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처녀가 잉태하여라고 했는데 그러면 BC 8세기 그때에도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가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처녀라는 히브리 단어는 젊은 여인이라는 의미로도 번역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때에는 아마도 어떤 젊은 자매님, 사람들이 다 아는 자매님이 아이를 낳았던 일이 있었고 그 아이가 임마누엘이었고, 그러나 그 아이는 사인인 것이고 진짜 예언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동정녀 탄생으로 나실 때에 완전히 성취가 된 것이죠.
15절에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선악이라고 하면 굉장히 윤리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이 아이가 자라서 선과 악을 알 정도의 성숙한 나이가 되었는가 생각할 수가 있는데, 선악이라는 단어는 의미가 더 넓다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호불호게 더 가깝습니다. 좋으면 가지고 싫으면 버리고 그 얘기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나이가 됩니다. 저도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까, 아이들이 조금 자라면 먹을 걸 주면 애가 좋으면 입으로 암! 먹고 싫으면 싫어! 그러죠. 우리가 예스 하면 끄덕하고 싫으면 고개를 흔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하다 보니까 바로 알아듣게 되는데 원래 그 동작하고 아니라는 느낌은 아무 상관이 없지요. 제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까, 끄덕은 맛있는게 있으면은 먹는 거, 싫은 음식 주면 안 먹는 거기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은 좋은 거는 가지고 싫은 거는 안 가지고 하는 그 정도 나이가 대략 세 살 정도면 됩니다. 굉장히 어린 나이를 말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아이가 잉태되어 태어나고 그 정도 자라서면 대략 4년 정도의 시간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 예언이 주어질 때부터 4년 이내에 가까운 미래가 되는 것이죠. 4년이라는 세월이 길다면 길지만 우리가 나이를 먹다 보면 세월이 빨리빨리 가지 않습니까? 4년이라는 세월도 길지만도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굉장히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4년 뒤에 어디에 계시는지 또 어디서 뭘 하고 계실지 궁금하시죠. 하나님 뜻 안에서 우리들이 가진 꿈과 계획대로 주님이 힘 주셔서 인도해 주시고 좋은 일들이 일어나서 각자 하나님 인도하시는 가운데에 많은 일들을 하는, 그래서 주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그런 삶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4년 후에 여러분 어디에 있더라도 늘 응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게 조금 원래 계획이랑 갈라지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그런 경우에도 놀라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주님께서 뭔가 새로운 일을 행하시려고 내 계획과는 다르게 인도하신다고 믿음으로 가는 우리가 되기 바랍니다. 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비록 당장 북쪽의 왕국들이 와서 불안해 하고 있지만 멀지 않은 미래, 4년 정도면, 비록 우리가 인내할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뭔가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엉긴 젖, 커드, 요구르트 같은 유제품과 꿀을 먹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중에 나오겠습니다.
16절. 그렇게 되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 아람과 에브라임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원어의 의미로는 버림받으리라. 우리가 땅이 있으면 웬만하면 가지겠어요. 그 땅에 농사를 짓든지 집을 짓든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왕들의 땅이 얼마나 황폐해졌는지, 줘도 안 갖는 땅, 쓸모없는 버림받은 땅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3, 4년 이내에 하나님께서는 그 두 왕국이 망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아라 말씀하시지요.
17절입니다.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 그 남북 왕국의 분열이 일어나는 그 때로부터 보지 못한, 처음 당하는 일을 일어나게 하실 것인데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 앗수르 나라가 사실 모든 문제의 진짜 원인이 되는 것이죠. 북쪽의 두 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고 강한 나라가 지금 하나하나 다 격파하면서 쳐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하스 왕은 큰 형님 아수르한테 좀 붙어 보자. 그래서 거기 편이 되어서 살아남아 보려고 했지만 그 큰 제국이 어 유다라고 봐줄 리가 없죠. 결국은 유다까지도 집어삼키기 위해서 처내려 올 것입니다.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 당시로서는 가장 큰 재앙이고 고난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임마누엘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 평화와 기쁨의 소식만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성탄절이 되면 명절을 즐기면서 트리와 선물을 생각하지만, 예수님 오셨던 그 때는 너무나 위험하고 척박하고 힘든 날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임마누엘 특별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문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더 커져요. 이전에 마주했던 문제보다 더 큰 그런 문제가 생길 것인데 앗수르 왕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8장 그날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나일강에서 먼 곳에 파리를 부르신다. 이집트는 고대로부터 정말로 강국이었어. 세상의 최강이었던 때도 있었고 전통의 강호, 뼈대 있는 집안, 그런에 애굽이 이때는 파리처럼,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는 종이 호랑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집트가 독립 국가가 제대로 된 거는 최근입니다. 20세기거든요. 그 긴 세월 동안 이집트는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이죠. 거기에서 군대가 올 텐데 파리가 굉장히 성가시게는 할 수 있지만 진짜로 피해는 못 주잖아요. 그런 이집트의 파리떼들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앗수르 땅에서는 벌이 올 것입니다. 벌은 실제로 힘들뿐 아니라 피해를 입히죠. 그래서 앗수르 왕의 왕이 보내는 군대는 유대 나라에게 실제로 위협과 어려움이 될 것입니다.
20절에 그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성경에서 강물이라고 나와 있고 아무 설명이 없으면 유프라테스 강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면 그 강은 워낙 유대인들에게 눈물과 아픔이 서려 있는 강이기 때문에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유프라테스트 강하면 눈물을 주룩 흘리는 그런 느낌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강물 건너편, 앗수르에서 세내어 온 삭도, 앗수르 왕을 면도칼에 비유 하십니다. 웬 면도냐? 앗수르 왕이 와서 주의 백성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의 털을 다 밀어버린다. 실상은 굉장히 비참한 것이죠. 그런데 돌려서 좋게 말하는 것인데 이게 굉장히 모욕적이지 않습니까? 온몸을 면도를 시켜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들이 당하게 되는 고난과 모욕과 수치와 그리고 실제적인 피해가 엄청날 것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이 그렇게 고통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앗수르왕을 hire했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왕이 잘나서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 주님이 다스리시는 것인데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을 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바로 잡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힘들지라도 이것이 주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꼭 믿어야 합니다. 그게 더 좋지요.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는데 이게 주님도 손 쓰실 수 없는 그런 일, 주님도 외면하시거나 무력하신 그런 일이면 그게 진짜 큰 일이지요. 그런데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 삶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반드시 주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그분의 지혜와 또 사랑 가운데 때가 되면이 모든 것을 그 뜻대로 이루시고 우리들에게 그 모든 의미를 알려 주실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부모님과 같은 사랑, 그것을 우리들은 믿습니다. 자녀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반드시 하나님은 가장 좋은 뜻을 위해서 때로 우리들에게 이런 어려움도 주신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21절 그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북방에서 앗수르왕 군대가 쳐들어와서 온 땅을 황폐케 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고 땅이 버림받아서가 엉겅퀴 가시나무, 이런 것 만나고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심지어 들어가기도 힘든 그런 땅으로 변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농사 지을 수가 없고 평소에 먹던 빵이나 포도주나 이런 걸 먹을 수가 없어요. 음식이 굉장히 귀해지겠죠.
예레미야 애가 2장 11절 한번 보시겠습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상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나에게 쏟아졌으니 이는 내 백성이 패망하며 어린 자녀와 먹는 아이들이 길거리에 기절함이라. 너무나 가슴 아픈 말씀이 되겠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슬픔의 노래, 바벨론으로 인해서 유다 나라가 멸망당하고 백성들이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게 될 터인데 그때에 실상이 이러합니다. 전쟁으로 상하고 죽는 것도 고통이지만 적들이 포위하고 있으면 당장 닥치는 어려움이 성 안에 양식이 떨어져 버립니다. 굶어서 죽는 것이고 그런 때가 되면 사람들이 인간성을 버리고 자기 목숨만 살아남기 위한 무서운 짐승 같은 세상이 되면 제일 피해를 얻는 것은 약한 사람들이죠. 어린아이들. 어떻게 그 생존 경쟁에서 이길 길이 있겠습니까? 약자들, 어린아이들, 병든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제일 괴로울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도 다름 아니라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기절해서 먼저 죽는 것입니다. 이런 괴로운 광경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슬픔의 노래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2절 보시면 한 사람이 기르는 암소와 두 양, 그 동물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러니 앗수르 왕이 와서 온 땅이 황폐해지고 농사지을 사람도 땅도 없기 때문에 식량이 없어질 것인데 그러므로 평소 같이 빵이나 포도주는 못 먹겠지만 다행히 하도 풀이 많으니까, 온 땅에서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게 되니 사람들은 차라리 소와 양을 기르게 될 터이고 풀을 많이 먹고 우유를 많이 낼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유제품을 많이 먹는다 그 얘기입니다. 먹을게 그거밖에 없어요. 아침에는 우유, 점심은 치즈, 저녁에는 요구르트, 디저트는 꿀 이렇게 먹으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려운 시기를 지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되겠습니다. 임마누엘 아기가 3-4살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다, 그 얘기입니다. 굉장히 힘든 날이 오기 때문에 먹을 것이 귀해지지만 마침 풀이 많아져서 우유를 먹고 이 아이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임마누엘이 아기가 우리에게 주는 예언의 의미가 상당히 무겁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귀한 예언이 되는 말씀이 결코 우리들에게 쉽고 가볍지만은 않다. 도리어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고 힘든 고난의 때에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도리어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선물로이 임마누엘 아기를 보내 주시는 것이지요. 이 아이는 누구에게라도 비록 힘들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메시지를 어디서나 전하는 아이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 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크리스마스의 캐롤 부르는 느낌보다는 실제로 사람들이 너무나 힘들어할 때입니다. 당시에 헤롯 왕이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아이들을 죽이는 그런 악한 때거든요. 아무 잘못이 없어도 하루 아침에 그렇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의 죄와 고난이 많은 때에 예수님께서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서 요셉의 꿈에 말씀하시기를이 아이의 이름은 예수라 하라.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시니라.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말은 백성들이 죄가 많으니까 그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뜻도 되지만 백성들이 죄의 능동태가 될 수도 있지만 수동태도 되거든요. 죄 때문에 고통을 다 하는 백성들이라는 뜻도 되지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 헤롯과 같이 악한 사람이나 세상에 그런 나쁜 일로 인해서 내가 죄로 인해서 고통을 받아요. 죄의 피해자가 되는 백성들도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하거든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백성들의 죄와, 그들을 괴롭히는 세상의 악함을 인해서 그들에게 구원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오신 분입니다. 세상에 구원이 필요할 때 예수님께서 선물처럼 오신 것이죠.
아하스 왕 당시에 이 아이가 자라나도 문제가 당장 해결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문제가 더 커집니다. 작은 왕국이 아니라 앗수르라는 대제국이 밀고 내려오는 큰 문제가 생깁니다. 사실은 진짜 문제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죠. 앗수르 왕이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문제들이 그냥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진짜 문제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전에 우리가 힘들다 어렵다 하는 문제들이 진짜 문제가 아니라 겉보기였을 때가 많이 있고 진짜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큰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회피하거나 무기력해지거나 그러기가 쉽죠.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시면 우리들이 진짜 문제를 대면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 앞에서 숨겨질 것은 없기 때문에 주님은 모든 것을 드러내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들을 대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임마누엘 아이가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앗수르왕이 쳐내려와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물론 인내해야 하고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쉬운 일이라고는 말하지 않아요. 그러나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주님은 어찌했든 구원을 베푸시고 피할 길을내어 주십니다. 그래서 평소 때 먹던 맛있는 케이크나 이런 거는 못 먹겠지요. 그러나 비록 맨날 유제품만 먹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내의 시간을 통해서 반드시 구원을 베푸시고 또 주님의 큰 뜻을 보내어 주시고 도리어 더 중요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참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실 때는 험악한 때였고 예수님 장성하셔서 사람들 가운데 사역하시는 그때는 더합니다. 죄악이 더 가득하고 세상에 죄가 얼마나 많은지 결국은 예수님 그분을 죽이려고 덤비잖아요. 사탄의 권세죠. 죽음의 권세, 죄악의 권세. 그것이 예수님 앞에서 드러나잖아요. 그전에는 숨어 있을지라도 예수님이 딱 광야에 금식하실 때 사탄이 자기를 드러내지요. 하나님 앞에서 숨어 있을 것이 없죠.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문제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죠. 우리들이 그것을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임마누엘 하시면 대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 권세를 맞서시죠. 사탄은 더 날뜁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으니까 그분을 십자가에 죽이려고 그렇게 도모를 하지요. 예수님께서 모든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임마누엘 이름은 예수님께는 사인이 아니라 그분 자체이십니다. 예수님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 자신이 황폐케 되셨습니다. 아까 그 땅이 황폐케 된다는 의미가 버림받는다는 뜻이라고 했잖아요. 예수님 자신이 버림받으셨어요.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신 것과 똑같은 단어거든요. 예수님 자신이 버림받으심으로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시고 죽음의 권세를 그분의 몸으로 친히 이기고 부활로 승리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임마누엘 예언은 예수님 오시기 약 700년 이상 이전에 미리 보여 주신 사건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세상 죄악도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이 예언뿐 아니라 그 예언의 완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 나시고 세상 모든 문제의 뿌리인 죄악과 사망의 권세를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분이 살아나심으로 어떤 문제도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기에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고 날마다 날마다 우리 삶 가운데 그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의 자녀된 우리들은 이 귀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살다 보면 별 일이 다 있지만 우리들이 뜻을 세우면서 특별히 공부를 하면서 사는 동안에 어떤 문제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길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해결책과 구원을 예비해 주신다고 하는 것을 굳게 믿으면 우리들이 세상에서 하나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사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그의 귀한 복된 자녀들의 삶을 우리 모두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 우리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특별한 비전을 보고 선택을 받아서 예언자로 세우심을 받는 아주 특별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오늘 7장에서는 이사야가 실전에 투입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아하스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가 BC 8세기입니다. BC 700년대. 역사 시간에 연대 외는 것처럼 성경이 암기 과목은 아니지만, BC 8세기는 특별하기 때문에 기억해 두시면 구약 성경 읽을 때 도움이 되겠습니다. BC 8세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732년이거든요.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원래는 한 나라였지만 분열이 되지요. 그래서 남왕국은 유다, 북왕국은 이스라엘, 그렇게 갈라져서 지내다가 결국 그 형제의 나라인 북왕국이 멸망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BC 8세기입니다. 그러니 참 위기 상황이고 백성들에게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어두운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평소에 평안할 때도 좋지만 특별히 삶의 위기가 닥치고 혼란스럽고 이제 어찌 하면 좋은가 하고 우리가 당황하는 그런 때에 하나님은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 BC 8세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지자들을 보내 주시는데요. 네 명이거든요. 이사야가 있고 호세아, 아모스, 미가입니다. 외워두시면 좋습니다. 이사야는 대선지서이고 그 다음에 호세아, 아모스, 미가, 이분들이 바로이 시대를 배경으로 예언을 하시게 되는데 호세아와 아모스는 북왕국입니다. 바로 멸망을 앞둔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분들인데 호세아가 그렇고 아모스는 남왕국 사람인데도 북왕국으로 가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사야와 미가는 남왕국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전하는 분들입니다.
이사야가 오늘 본문에서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텐데 아하스라는 사람은 구약 성경에서 별로 평가가 좋지 않습니다. 이 분이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지요. 하나님을 굳게 믿고 마음이 담대하여서 백성들을 잘 이끌어야 하는 리더인 왕인데 그렇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마음이 왔다 갔다 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좀 강한 편에 붙어 볼까 그런 궁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받은 왕이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구약 성경에서 읽으면 왕이 흔들리면 백성들도 같이 흔들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아하스 왕은 특별히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전혀 리더로서의 자리를 보여주지 못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유다 남왕국에 큰 일이 벌어진 것이죠.
1절의 말씀에 보시면 유다의 아하스 왕 때 아람의 르신 왕 그리고 이스라엘의 배가 왕이 연합을 해서 쳐내려오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아람. 그래서 이 전쟁을 Syro-Ephraim war 그렇게 부릅니다. 아람-이스라엘의 연합군이 쳐내려온 전쟁이다. 사실 두 나라 다 친척 관계인 가까운 나라이거든요. 이스라엘은 형제의 나라고도 할 수 있고 아람도 친척 민족입니다. 옛날에 이삭과 야곱의 부인들이 그쪽에서 왔거든요. 그러니까 굉장히 가까운 친척 민족인데 그 북쪽의 이스라엘과 아람이 웬일로 연합을 해서 같이 쳐내려 오는 거예요. 거리상으로만 따지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와 아람의 수도인 다마스커스를 거리상으로만 생각하면 DC에서 볼 때 저기 필라델피아와 뉴욕시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쪽에서 연합해서 내려오는 형상을 상상하시면 조금 실감이 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 아람과 이스라엘이 왜 연합해서 유다에 쳐들어오게 되었는가? 사실은 더 북쪽에 더 골치 아픈 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아시리아 제국의 팽창입니다. 앗수르 제국은 당시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재패하게 되는 일련의 제국들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앗수르는 고대에도 악명 높은 잔인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하는 기계처럼 가는 곳마다 격파하고 나아가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그런 나라였어요. 그러니 작고 약한 나라들은 얼마나 두려움에 떠는지 모릅니다. 자비와 용서가 없이 다 격파하고 다 파괴하고 죽이고 그런 무서운 민족이 큰 힘을 가지고 지금 밀고 내려오는 형상이거든요. 그러니까 바로 거기에 접해 있는 아람과 이스라엘은 동맹을 맺고, 유다 아하스 왕에게도 우리 편에 붙어라 하는 이런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아하스 왕은 고만고만한 나라이 우리랑 같은 편 하자 그러니까 난 싫어 그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유다 왕의 입장에서는 작은 나라들의 편 드는게 아니라 나는 차라리 저 큰 나라 앗수르 편에 붙을 거야 이러는 상황입니다. 차라리 저 큰 형님한테 한편이 되어서 같이 있는게 낫지 괜히 거기에 저항한다고 작은 나라 편에 붙었다가 같이 깨지기 싫어. 그런 느낌인 거지요. 그런 사정이 있어서 유다는 그 두 왕국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죠. 그러자 아람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그래? 우리 말 안 들어? 그럼 쳐들어와서 아하스 왕을 몰아내고 다른 왕을 세워서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게 저항해 보려고 하는 형국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아람 이스라엘이 내려오고 있는데 2절의 말씀을 보시면 그 이야기를 듣고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았습니다. 큰 바람이 불면 숲에 나무들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랬다는 것입니다. 왕의 마음이 두 왕국 아람과 이스라엘이 연합해서 쳐내려 온다고 하니까 바람 앞에 나무처럼 흔들흔들하는 것이고 또 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으니까 백성들은 더 하겠지요. 다 함께 말도 못 할 딱한 처지가 되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위기가 있을 수 있지요. 아무리 평소에 대비를 하고 또 성실하게 살아서 웬만한 어려움들은 우리들이 극복하면 살지만 인생이라는게 참 기가 막혀서 때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위기가 닥치기도 하고 뜻밖의 일이 벌어져서 당황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놀라거나 당황하고 바람이 흔들릴 수 있죠. 그러나 잠시 그렇게 흔들리는 마음도 우리들이 다 잡고 정신 차리고, 내가 이를 어떻게 해결할까? 문제 해결 능력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참 중요하고 그 사람이 참 어떤 사람인가? 마음이 굳은가 아니면 흔들흔들하는 사람인가는 이런 어려움이 닥칠 때 보이는 것이죠. 신앙, 믿음의 힘이 이때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아하스 왕과 백성들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위기가 닥쳤는데 어쩔 줄 몰라서 발버둥만 치고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 그때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부르시죠. 그래서 아하스 왕과 대면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면전에 두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을 하시지요. 그런데 특별한 일은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네 아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이때는 어린 소년이었고 이름이 스알 야숩입니다. 특별한 이름이지요. 영어 식으로 말하면 쉬어 제이셥 그렇게 읽습니다. 제섭이. 여러분 주위에 제섭이라는 이름이 있으면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라고 말해주면 되겠습니다. 이 스알 야숩 이름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온다, Remnants will return. 이름이 특별하죠. 그리고 예언적인 이름인 것이죠. 사실 당사자 아이의 입장에서는 자기 이름을 좋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유치원에 가면 선생님이 출석 부르잖아요. 사무엘, 한나,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그런 거예요. 아이들이 이 아이를 보고 이름 가지고 뭐라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고 예언적인 뜻을 갖고 있는 특별한 이름, 남은 자가 돌아오게 됩니다. Remnants will return 사실은 번역할 때 좀 까다로움이 있는데 return이라는 단어가 돌아간다도 되고 돌아온다도 되거든요. 두 가지 의미가 다 있어요. 그런데 우리말로는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한 가지로만 번역되니까 좀 애매합니다. 남은 자가 귀환하리라 그럴 수 있기는 한데 너무 재미가 없죠. 남은 자가 돌아간다, 돌아온다. 이 뜻은 첫 번째는 지금 유다를 향해서 쳐들어오는 두 왕국들,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국, 또 궁극적으로는 더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더 큰 문제,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인 앗수르가 내려오는 거니까 큰 문제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밀려오는 군대들을 다 멸하시고 구원해 주실 거예요. 그래서 침입해 오는 군대가 수는 비록 많고 강하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군대를 다 멸망시키시고 유다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거의 다 멸망하고 몇몇 사람만 남아서 돌아갈 거다. 남은 자가 돌아가리라. 그 뜻입니다. 그러니 그런 뜻으로 이 스알 야숩이라는 이름의 예언은 하나님의 심판이 되고 있어요. 심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군사력과 세상적인 권세와 힘만 믿고 이웃 나라를 괴롭히던 앗수르의 세력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정의로 온 세상에 주권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무시하지요. 자기의 힘이 세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양 그랬던 것이 이 당시의 역사고 오늘날까지도 그러합니다. 앗수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힘만 믿고 온 세상을 재패하고 돌아다닐 때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그 군대는 다 무너지고 겨우 살아남은 몇몇 사람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남은 자가 돌아간다,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깊은 뜻을 가진 이름이죠.
이 소년의 이름 스알 야숩의 두 번째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온다. 이 예언은 이때로부터 150년 뒤입니다. 결국 유다 나라는 멸망할 거거든요. 그 때는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멸망을 할 것인데 많이 죽고 파괴되고 또 포로로 끌려가서 첫 세대는 다 돌아가시고 그다음 세대까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할 텐데 그때도 남은 자들은 돌아온다. 이번에는 주님의 백성의 남은 자들, 끝까지 신앙을 지킬 믿음의 사람들, 남은 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남은 자가 돌아온다. 이 주제는 이사야서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반복해서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속 예언하실 때 비록 한때는 고난이 있을 것이나, 백성이 그런 고난이 있을지라도 낙담하지 말아라, 남은 자는 돌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반드시 베풀어 주신다는 메시지입니다. 아까 적들의 남은 자가 돌아간다, 이것은 심판의 예언이 될 것이고 또 주의 백성에 남은 자가 돌아온다, 이것은 구원의 예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과 구원,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그 중요한 두 줄기가 이 스알 야숩이라는 이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참 특별하고 신비롭습니다. 굉장히 의미가 깊고 다층적인 면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한 말씀도 그때에는 어떤 의미고 나중에는 상반되는 여러 의미가 복합적으로 되는 예언의 말씀이 많아요. 그러니 참 재미도 있고 깊죠. 그러니 하나님 말씀 읽으면서 우리가 주님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사야는 다름 아니라 자기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름 지어 줄 때에도 그냥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담은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이 아들 스알야숩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아들과 같이 가라.
그래서 예언자와 아들이 함께 나아가서 아하스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명백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흔들리지 말아라, 떨지 말아라. 지금 북쪽에서 내려오는 두 왕이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굉장히 위협적이죠. 그 왕들이 연합돼서 유다를 무너뜨리고 왕을 몰아내고 우리 마음대로 할 거야 큰 소리를 치고 있는데 두려워하지 말아라. 혹 눈에
보이는 저들의 그 군사력으로 그럼 흔들리지 말아라. 하나님이 그들을 타다남은 장작, 불이 꺼지고 나면 연기만 폴폴 나는 나무 장작에 비교하십니다. 연기는 날 수 있죠. 그렇지만 아무 힘 없는 그런 장작에다가 그 왕들을 비유를 하십니다.
7절의 말씀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을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작정하셨어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과 하늘 군대와 천사를 다 뜻대로 부리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실 때에 작정을 하셨습니다. 아람이나 에브라임이나 그 왕들은 뭐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셨으면 반드시 그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것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도 계획하고 행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고 주님께서 막으시면 결코 됩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하지요.
9절에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의 주제 말씀, 너희가 믿지 않으면 서지 못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지금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에요. 믿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 컨트롤도 아니고 확신을 가져보자 이런 것도 아니고,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북쪽의 왕들이 아무리 뭐라 그래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막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잖아요.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요? 그 말씀을 믿어야 하잖아요.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죠. 말씀이 없으면, 아예 성경 말씀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면 삶의 위기가 닥칠 때 놀라고 당황하고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삶 가운데 어떤 괴로움이 닥칠 때에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약속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야 하죠.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도 그런 개인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원 공부를 하러 왔는데 수학 공부보다는 성경 공부를 더 많이 하게 됐습니다. 계획하진 않은데 그렇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원래 계획에서 다른 길로 가게 된 거죠. 당연히 하나님이 인도하심이고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학생으로서는 원래 계획에서 틀어진 것이죠. 그런데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혼란은 있었지요. 그렇지만 오래 가지 않았죠. 원래는 제가 생각했던 바운더리 안에서만 돌았는데,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까 바운더리가 없어요. 나의 바운더리가 훨씬 확장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길을 가는데 믿음이 없을 때 봤다면 어떻게 계획도 할 수 없는 그런 길을 가나 했겠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평을 넓혀 주시면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길로 가면서 고난이 고난으로 안 느껴집니다. 믿음이 없으면 굉장히 괴로움일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모르니까. 그러나 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니 두렵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게 그겁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풍성히 주셨습니다. 오늘 이사야 7장도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주시는 말씀이 정말 많지요. 믿음의 말씀, 우리들에게 신뢰와 평강과 승리를 약속하시는 말씀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두려워 말라, 하나님 아버지를 믿어라. 하나님께서 선하게 모든 것을 주시고 인도하신다, 예수님의 선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우리들은 그걸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으면 하나님 앞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아무리 큰 환난이나 괴로움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면 주님을 신뢰하면 우리들은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그런데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뜻이 확장되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선다, 스탠드가 언더스탠드, 이해한다는 뜻으로 확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한다. 참 귀한 진리가 거기에 있거든요. 하나님을 우리가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제 소원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서 책도 읽고 연구도 하고 여러 사색도 하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그 놀라우심, 그분의 신성과 영광과 능력과 지혜와, 특별히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분의 놀라우신 사랑과 구원과, 또 그분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과 놀라운 영광과 하늘의 찬양과 천사들의 모임과, 우리보다 먼저 가신 믿음의 선조들 그분들과의 기쁨의 만남, 이 모든 것이 너무너무 궁금합니다. 결국은 다 알게 되겠지요. 주님께서 다 보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이해하고 싶고 무엇보다 제 삶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를 저는 알고 싶습니다. 다 모르겠어요. 마지막까지. 그러나 몰라도 그저 한 발짝 한 발짝 가는 것이고 또 주님께서는 다 안 보여 주시고 주님 따라 가면 더 보여 주시는 그런게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을 더 이해하고 싶고 내 삶 가운데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믿으면,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때부터 make sense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진다든가, 나는 이렇게 뜻을 정하고 노력했지만 뭔가가 다르게 이루어진다든가, 수많은 일들, 기막힌 일들이 많이 있지요. 그때 우리들이 잠깐 당황할지라도 주님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분께서 나에게 그분의 뜻 안에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 나에게만 주시는 그 특별한 인격적인 사랑을 우리들이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지요.
오늘 아하스에게 주신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그 교훈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믿으면 은혜로 설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또한 은혜로 설 뿐 아니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가? 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그분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새롭게 되고, 주님을 믿음 가운데 굳게 서고 주님의 사랑을 더 이해해 가는 우리 모든 주의 자녀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사야 6장의 말씀은 이사야의 소명장이라고 불립니다. 소명은 부르심이지요. 그 부르심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으로부터 할 일을 받았습니다. 이사야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1절에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웃시야왕 이때에는 유다 나라가 굉장히 잘 살 때입니다. 왕 자신이 농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농사는 그 당시에 주요 산업이잖아요. 그러니까 왕이 그 나라가 잘 살고 또 기술과 국력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나라가 대체로 잘 살았습니다. 이사야 2장 7절의 말씀, 그 땅에는 땅에는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려고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한하며. 나라가 잘 돌아가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8절, 우상도 가득합니다. 그들이 자기 손을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합니다. 나라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국방력이 당해도, 그 모든 것이 우상을 섬기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거짓 신이지요. 사람이 만들어낸 신. 그래서 사람이 자기의 손으로 여러 가지 신의 형상을 만듭니다. 자기 손으로 짓고 손가락으로 만들고 그것을 경배하는 거예요. 그런 신들을 굳이 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번영 또 풍요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참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의 말씀 그리고 사랑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해야 되는데 그것이 그것이 아니라 나의 필요와 나의 욕망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기 위해서 그런 신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 거짓 신과 참 하나님 우리 성경의 하나님과의 주된 차이가 무엇인가? 예레미야 10장 11절의 말씀. 천지를 짓지 아니한 상들은 땅 위에서이 하늘 앞에서 망하리라. 이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천지를 짓지 않은 신들은 망하리라. 참된 신이라면 그 신은 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십니다. 온 천지와 인간과 자연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참 우리의 주님과 신이 되십니다. 그렇지 않은 다른 모든 신들은 망할 것입니다. 왕으로부터 백성들이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그리고 내가 잘되는 것을 위해서 그 신에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기도이고 헛된 일입니다. 그것은 신을 내 마음대로 부리겠다는 뜻이거든요. 마치 자기 종처럼 부리겠다는 그런 마음이고 그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우상숭배를 성경에서 지극히 금지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래서는 결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순종하고 따르겠다는 참된 신앙은 있어야 합니다. 웃시야왕 때에는 나라가 굉장히 잘 살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이 죽었습니다. 그 해에 이사야가 참 하나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1절에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이죠. 하늘은 나의 보좌요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 하늘 위 보좌에 앉으셨고,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사야가 기도하고 있는데 그 성전에까지 하나님의 옷자락이 온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굉장히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얼굴이나 자세한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의 영광과 능력은 우리 피조물이 감당할 수 없기에 그분의 보좌와 옷자락과 그런 것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이사야가 본 이 비전도 굉장히 자세한 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몇 명 없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자세한 비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그분을 직접 뵐 수 없고 그분의 영광에 압도될 뿐입니다.
2절의 말씀 보시겠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스랍은 천사의 일종이고 특별히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천사들입니다. 여섯 날개가 있어서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왜 그랬는가?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자신을 가린다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저 하늘에 있는 태양도 똑바로 못 보는데 저 태양과 은하계와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야말로 무한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볼 수 없고 그 능력에 노출되면 금방 재가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가리시지요. 스랍들도 하나님의 엄청난 영광과 능력 앞에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또 하나는 나의 부족함, 나의 연약함, 나의 비천함을 하나님 앞에 드러낼 수 없어서 얼굴을 가리기도 하겠지요.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사는 것은 필요하겠습니다. 좋은 의미로 높은 자의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몰라주어도 우리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며 당당하게 그분을 믿고 의지하면서 긍정적으로 밝게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은 한없이 겸손해져요. 주님만이 높아지시기를 바라고 나는 주님 앞에 한없이 약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한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나의 부족함을 가린다는 뜻으로 얼굴을 날개로 가리었습니다. 또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립니다. 천사들이 발로 세상을 다닐 일은 별로 없을 것 같고 날아다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을 가렸습니다. 성경에서 발이 나오는 중요한 대목은 모세가 하나님 뵐 때 하나님께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내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십니다. 우리는 발로 내 맘대로 다닙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있으므로 발을 벗고 하나님 앞에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맘대로 다니지 않고 주님 앞에 주님만을 바라보며 있겠다는 뜻이 되겠지요. 또 우리들의 발을 예수님께서 씻어 주시죠. 부끄럽고 간지럽고 세상에 먼지가 묻은 그런 발입니다. 웬만하면 안 내놓고 싶은 발. 그러나 이 발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만 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발을 가리었다는 말은 주님 내 마음대로 세상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주님 앞에만 있고 주님의 뜻대로만 행하겠습니다 하는 뜻이 있겠습니다. 그래서 날개로 발을 가렸습니다. 또 두 날개로는 날고 있습니다.
3절에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렇게 주 하나님을 지극히 영화롭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찬양을 영광스럽게 장엄하게 화려하게 부르고 있는데 서로 불러 이르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한 목소리로 하는 유니슨이 아니라 한쪽 천사들이 거룩하면 다른 쪽에서 거룩 이렇게 서로서로 화답하면서 협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랍들이 부르는 찬양 가운데 거룩 거룩 거룩 그 다음에 만군의 여호와라고 합니다. 만군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늘에 수많은 별들, 그 많은 별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늘의 별들은 하늘의 군대가 되겠습니다. 하늘 군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주님께서 하늘 군대를 온 세상에 보내셔서 다스리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굉장히 놀랍습니다. 왜냐면 지금이 온 땅은 사실 죄가 가득하거든요. 이사야 1장의 말씀을 보면 이 때에 영적인 모습이 어땠는가가 나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고 은금이 넘치고 그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얼마나 죄가 많은지 그 백성들의 상태를 얻어맞은 환자로 말씀하시거든요.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고 멍들었다고 하는 영적인 모습이고 당장 외과 수술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온 세상이 우상이 가득하여서 죄악으로 가득해서 주님 앞에 엄청나게 상처와 또 고난 가운데 있는 그런 백성들이 사는 땅입니다. 그 온 땅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합니다. 우리가 볼 때이 세상은 굉장히 잘못되어 있고 하나님을 떠나 있고 주님을 거스르는 불의와 죄악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세상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세상을 멀리하고 멸망하라고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이 온 땅 모든 곳을 주님께서는 돌보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곳, 세상의 모든 곳, 심지어 온갖 죄악과 고난이 가득한 곳에도 하나님의 영광은 가득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어찌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그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도 온 세상을 가득 채우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저와 여러분을 주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4절에 이와 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합니다. 성전에서 천사들의 목소리가 단순히 커서 그랬겠습니까? 찬양의 능력이죠. 그 말씀, 거룩하신 하나님, 온 땅의 충만한 영광을 노래하는 찬양의 능력이 어찌나 큰지 심지어 성전이 지금 흔들흔들하고 온 성전의 연기가 충만합니다. 찬양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목소리는 작을지 몰라도, 노래를 못 할지 몰라도 찬양의 말씀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찬양할 때 주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임재하시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찬양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올리고 받는 은혜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찬양의 능력을 우리들이 꼭 체험해야 하고 날마다 이 능력 가운데 거해야 하겠습니다. 천사들의 찬양 가운데 온 성전이 영광과 능력으로 흔들릴만큼 놀라운 능력의 찬양을 듣고 있습니다.
5절의 말씀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굉장히 고상한 말투로 되어 있지만 실감나게 말해 보면 어 큰일 났어 나 죽었어 이 말이 되겠습니다. 망하게 되었도다. 나 죽었네. 이 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자기가 있다는 것을 알 때에 나 죽었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평생을 예배를 드렸을 거거든요. 이사야는 늘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래서 이런 자리가 굉장히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하나님을 겪고 나니까 아 나 죽었어 큰일 났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과 능력에 압도되는 것이지요. 우리도 이럴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 얼굴을 뵈면 오래 알던 사람 만난 것처럼 그럴까요? 굉장히 오래된 친구 만나듯이 그렇게 하이파이브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분의 영광과 사랑의 모습과 얼굴을 보면서 우리가 깜짝 놀라지 않겠어요? 그래서 예수님 정말 내가 늘 생각하고 기도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말했지만 정말 예수님 뵈니까 너무나 놀랍고 기쁘고 좋습니다 하면서 감격할 거예요. 그날을 우리들이 날마다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이죠. 그리고 그 놀라운 예수님 만나는 그 날을 이 땅에 앞당겨서 사는 것이죠.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 뵙는 그 날에는 우리도 이렇게 깜짝 놀라서 너무 놀라서 좋아서 죽을 것처럼 예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직접 뵈었을 때 나 정말 죽었구나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입술이 부정하다 그랬어요. 사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많고 죄를 우리들의 눈으로도 또 손발로도 짓겠지만은 특별히 입술을 말합니다. 죄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는 것이거든요. 주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우리들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그래서 나에게 좋은 대로 나의 눈과 손길과 발걸음이 행하고 그런 마음으로 말을 한다는 거죠. 입술의 부정함은 우리가 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즉각적으로 튀어나는 것이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그래서 입술이 부정하고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신 왕을 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입술의 부정함과 부끄러움으로 인해서 온전히 감격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구원의 손길이 임하지요.
6절입니다. 그때 그 스랍 중에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숯을 하나 집어 가지고 날아옵니다.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그래서 7절에 보시면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뜨겁지는 않았겠죠. 그렇지만 뜨겁게 단 숯불을 하나 젓가락으로 들고 와 가지고 이사야의 입술에 대어주고 보라 이것이 내 입에 닿았으니 내 악이 제하여졌고 내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단순히 입술만 그런 것이 아니겠죠. 그것은 그 온 몸을 대표하는 그런 일이고 사실 온 몸이 정결해지는 것이죠. 눈과 귀와 가슴과 손과 발이 모든 것이 이제 정결해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에게는 이 재단의 숯보다 더 능력 있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는,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을 완전히 정결하게 하시기에 충분하고 넘쳐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거하면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이 정결케 되는 은혜가 임합니다. 숯보다도 더욱 능력 있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나의 입이 정해져서 더 이상은 내 맘대로 말하거나 불평하거나 시기하거나 이런 말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 주위 사람들에게 도와주고 세워주고 사랑을 전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정결한 입술이 됩니다. 나의 눈길이 가는 것, 나의 귀로 듣는 것, 나의 몸의 모든 기관이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시고, 나의 몸이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하시는 성전이 되어서 주님께서 내 몸을 통해서 세상에 임하시고 일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들의 헌신과 정성과 삶을 주님께 드리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서 그런 놀라운 은혜도 주십니다. 그리 할 때 우리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8절의 말씀을 보시면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까? 주님께서 온 세상을 살피시면서 보내실 사람을 찾으십니다. 지금 이때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사야라는 청년을 택하신 것이지요. 이때 그의 나이가 젊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인생의 여러 지점에서 불러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살고 주님과 함께 하는 인생입니다. 참 복되지요. 어떤 사람은 늦게 여러 체험 후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인생 경험을 통해서 주님의 역사를 증거하는 간증이 그분들에게는 특별히 있지요. 저는 청년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예민하고 활성화되어 있을 때 주님을 만난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 주님께서 젊은 날을 사용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곳에 있는 사명이 특별히 우리 메릴랜드 대학교 학생들 청년들을 섬기는 것이고 그분들께 하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청년 때 하나님을 만난다면 인생이 완전히 변화가 되고 새로운 목표로 달라지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고 우리 하나님이 이와 같은 분이시라는 것, 너무나 놀랍도록 영광스럽고 능력이 많으시고 모든 세상을 그분의 영광에 채우고 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있고 그러나 이 세상을 주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보내어 주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학생들과 이 지역에 전하는 것이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그리 할 때에 어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이사야도 젊은 날에 하나님을 만나뵙고 죄가 사하여졌으므로 이제는 자신을 헌신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하실 때에 이와 같이 대답을 하게 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주님께서 자신을 받아 주실 것을 확신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모든 비전을 보여 주신 것이 이사야를 사용하시겠다는 뜻일 거잖아요. 이사야도 그것을 완전히 알고 있고, 비록 준비가 안 되었을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주님 앞에 온전한 훈련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주님께서 불러 주셨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은 충분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자원하게 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불러 쓰셔서 놀라운 주님의 말씀의 사역을 삶을 통해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 귀한 고백이 우리들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이사야 6장의 말씀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은 불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할 일을 맡겨 주십니다. 우리들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 나는 안 돼요 그것이 아니라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빚어 주실 것이니 주님 도와주시니 나는 할 수 있습니다 하는 믿음이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부족함과 나의 죄스러운 모습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다 용서해 주시고 죄를 사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며 충분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들의 헌신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학 가운데에서 최고의 작품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입니다. 일리아드는 유명한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리스군이 트로이를 침공하고 10년 동안 전쟁을 합니다. 그 10년 전쟁의 막바지에 있었던 일들이 일리아드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리스 진영의 최고의 전사는 아킬레스입니다. 얼마나 빠른지 별명이 발빠른 아킬레스라고 합니다. 트로이 진영의 최고의 전사는 트로이의 왕자인 헥터입니다. 그런데 양 진영의 최고의 전사들이 대결을 하게 됩니다. 헥터도 훌륭한 전사이지만 아킬레스에게는 당할 수가 없었고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핵터의 시신이 그리스 진영으로 끌려가요. 트로이의 왕 프리암은 굉장히 존경받고 품위 있는 훌륭한 왕이었는데 아들을 그렇게 잃게 되었습니다. 프리암 왕이 밤에 그리스 진영으로 홀로 찾아갑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죠. 적진에 아무 무장도 군사도 없이 들어가서 아킬레스를 만납니다. 자기 아들을 죽이는 원수인 아킬레스에게 무릎을 꿇고 손에 입맞춤을 하면서 내 아들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왕의 용감함과 고결함에 아킬레스도 감동이 되어서 극진히 대접하고 두 사람이 그냥 앉아서 같이 웁니다. 아킬레스, 최고의 전사 그리고 프리암, 세상의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왕, 두 사람이 어린아이 같이 우는 그 장면이 일라이드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의 하나인데 프리암 왕은 죽은 자기 아들을 생각하면서 울고 아킬레스는 그 왕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아버지를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아킬레스는 자기가 곧 죽을 거라는 걸 알아요. 신탁이 있거든요. 두 사람 다 인생의 허무함, 인생의 덧없음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최고로 성공한 사람들, 최고의 전사와 왕인데도 모든 인간에게 닥치는 숙명,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존재를 슬퍼하면서 같이 울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이 인간의 이런 덧없는 존재를 묘사하는 단어가 바로 멸망할 존재라는 단어입니다. 18절의 말씀 보시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멸망한다는 단어는 다른 곳에 보면 허무하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허무함. 그 단어는 또 전도서 첫 부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 허무하다 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비관주의나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참된 목적이 뭐냐? 의미가 뭐냐? 없다는 거예요. 목적이 없고 방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의 단기적인 목표는 있습니다. 누구나 성공을 원하고 성공을 위해서 많이 노력을 하지요. 그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공을 단기적으로 이루어도 그런 성공을 끝까지 다 가져본 사람들, 아킬레스도 프리암 왕도 솔로몬도 다 해 봤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보고 내린 결론이 허무하다, 헛되다, 그리고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숙명이죠. 하나님께서 인생을 원래 그렇게 지으셨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본리 본래 선하게 우리 사람들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가깝게 교제하고 사랑하면서 살도록 지으셨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리는 영화롭고 복된 존재로 창조해 주셨는데 지금 뭔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서 내 뜻대로 살겠다고 한 이래로 인간 세상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멸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인생과 세상에 대해서 내리는 진단은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멸망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여기서 도는 로고스입니다. 십자가의 말씀, 십자가의 원리 그런 뜻인데 사도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에 있는 유명한 항구 도시입니다. 무역을 많이 해서 굉장히 부유하죠. 수많은 물자와 사람과 돈과 문화와 이런 것들이 늘 오고 가는 북적북적하는 아주 잘되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적인 문화가 가득한 그 곳의 중심에 딱 들어가서 예수님을 전하는 바울이 말하는 첫 단어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십자가를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과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됨을 늘 강조합니다. 나는 예수님과 하나된다. 어디에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는데 내가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내가 어떻게 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존귀하신 분과 내가 도저히 비교도 할 수 없는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되기 위해서 이 낮은 땅에 오시고 결국 우리와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과 함께 나는 죽는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하나됨. 그러면 나는 예수님과 함께 또 살 것이라 그러거든요. 바울은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바울은 십자가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인 것이었죠. 십자가의 도. 그런데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에게 이 십자가라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된다는 것이 미련한 것이요. 사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이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십자가는 죽음과 형벌을 상징하고 거기에 달린 사람은 다 저주받은 끔찍한 고통과 수치 가운데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일생의 절정인 30대 꽃다운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죽은 분입니다. 그분이 나의 주님이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에게는 말도 안 될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조롱거리가 될 일입니까? 그러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서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멸망할 존재가 되고 그런 사람들이 다 모여서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멸망당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 이 관계는 온 우주가 없어져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부모 자식 관계도 끊어지지 않는데, 그런데 간혹 그런 일도 있죠.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으시면 그 관계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죠. 이 땅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되니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능력. 세상 사람들은 강한 것, 대단한 것을 찾고 그런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끔찍하다고 멀리하고 어떻게 저분이 나의 주님이 되겠는가 하지만,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절은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29장에서, 하나님이 지혜 있는 자들과 총명한 자들, 성경을 잘 알고 세상적인 지식도 많아서 뭔가 인생의 선생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지혜와 총명을 폐하십니다. 왜냐면 사람이 아무리 궁리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대다수가 지옥으로 멸망할 이런 인간의 조건을 도저히 치유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생각을 짜낼 수 없고 설사 이렇게 하면 인생이 좀 나아진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따르지도 않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위에서 건져 주시지 않으면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받는다는 이 말이 다른 곳에는 레스큐, 문자 그대로 구출한다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준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멸망할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인간의 지혜와 총명으로는 되지 않고 하나님은 그것을 멸하시고 십자가를 주십니다.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 지식인, 학자들, 똑똑해서 변론과 말을 잘하는 사람들, 이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은 미련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똑똑하고 유식하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낮추시고 도리어 세상에서 미련하다, 선하다, 멸시 받는다 하는 버림받는 사람들을 도리어 돌보아 주십니다.
21절.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헬라인들이 이것에 굉장히 능했습니다. 철학이라는 단어가 필로소피, 문자 그대로 지혜 사랑이죠. 그리스들이 얼마나 지혜를 사랑하고 자랑했는지 모른 거예요. 서양문명의 과학이나 철학이나 음악, 예술, 이런 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만큼 지혜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지혜를 짜내도 하나님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는 걸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죄가 있다는 것 생각할 수는 있죠. 어떤 사람이 양심이나 도덕에 예민해서 나는 죄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나의 죄가 너무나 중해서 이 죄의 해결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또 십자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라고 했습니다. 전도라는 말은 케리그마라는 단어인데 선포입니다. 선포한다는 말은 그냥 설득하거나 또는 근거를 들어서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십자가의 복음은 뭔가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제자들이 나아가서 예수님 살아나셨습니다. 이게 선포거든요. 내가 봤어요. 이거예요. 아닐 걸? 헛된 거 본 거 아니야? 분명히 봤어요. 그런데 한두 명이 아니라 500명이 예수님이 살아나셨어요. 그분을 내가 눈으로 봤고 손으로 만졌고 같이 식사도 했다니까요. 나는 이걸 위해서 목숨도 걸 거예요. 이것이 예수 십자가의 복음이거든요. 그러니까 선포라는 것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체험한 예수님의 사랑을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선포를 들은 사람은 선택을 해야죠. 그것을 믿거나 안 믿거나. 이것이 일반적인 과학 이론이라면 듣고 아 이해되는구나. 동의 안 동의. 그렇게 되겠지만 전도, 선포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그리고 그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이 기독교의 메시지를 듣고 믿거나 안 믿거나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으면 삶이 변화하는 것이죠.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은 표적을 원합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기적으로 많이 나타나고, 옛날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 표적을 많이 주셨습니다. 대표적으로 홍해를 가르시고, 그건 확실한 기적이고 표적이잖아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표적. 유대인은 이 표적을 구합니다. 엘리야 때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고, 사람들도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주세요.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뭐 보여 주세요. 그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표적을 보여 주신다고 해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시면 뭐 좀 보여 주시면, 뭔가 기적이 하늘에서 나타난다든가 그러면 믿을게요. 그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의 말씀을 보면 저 옛날에 하나님이 그렇게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모세 때도 엘리야 때도 수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했느냐? 금방은 와 하죠. 그러나 하룻밤 지나고 나면 똑같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고 와 한다는 그것 자체로는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지가 않습니다. 그냥 대단한 경험 한번 하는 것이지. 그리고 1년 10년 지나고 나면 뭐겠습니까? 아 내가 옛날에 대단한 거 봤어. 그게 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단지 표적을 보는 것만으로.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에 지혜를 원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과 연결이 될 겁니다. 그러니 헬라인들이 지혜를 찾는 입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고 되도록 멀리할수록 좋은 것이 되는 것이지요. 유대인의 표적을 구하는 것. 헬라인의 지혜를 찾는 것.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다. 스칸달론, 스캔들이라는 말 자체가 걸려 넘어진다는 것이고 표적을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래서 뭔가 하나님의 대단한 능력, 홍해가 갈라지고 하나님이 능력으로 자기들을 이 세상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잘 살게 해 주시는 그런 능력을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걸 믿어? 어떻게 저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야? 어떻게 하나님이 저런 걸 한다는 말입니까?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는 저주받은 죄수의 죽음을 당하시는 예수님. 그분은 절대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리끼는 것.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게 십자가입니다. 세상에 누가 아무리 사랑이 많고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싶어 한다 한들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다는 말입니까? 십자가의 고난을 자원할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설사 십자가를 진다 한들 그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이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의 불행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죠. 그러니 이방인 헬라인, 지혜를 찾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고, 이 세상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표적과 능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연약한 것이에요. 지혜를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가장 미련한 것입니다. 바보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우리는 전한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가장 이 세상과 반대되는 일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가장 약한 것이 세상보다 강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4절 보겠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부르심을 받은 저와 여러분. 하나님은 부르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십니다. 우리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에서는 가장 약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에 일어난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헬라 문법에서 여기에서 어 바로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이 동사가 있는데 그 뒤에 목적어가 계속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리끼는 것 이게 목적격이거든요.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 분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인데 전합니다.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인데 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니 우리는 이 분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취미 활동이나 고상한 종교 활동이 아닙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그런 것이었더라면 저는 안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사랑이 진짜라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저는 삶이 완전히 달라졌고 삶의 목표도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그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그분이 부활하신 이 놀라운 소식이 진짜라면 우리의 삶을 거기에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나의 삶에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첫째가 되셔야 하고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면서 어리석다 미련하다 할 것입니다. 그 약한 예수님 미련한 예수님을 왜 믿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해서 우리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오고 우리들을 기적적으로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분을 믿고 붙듭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아 주셔서 우리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켜 주십니다.
여러분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1997년에 나왔습니다. 저는 그때 뉴욕에 있었는데 학교 사람들이랑 같이 보러 갔다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일행이 흩어져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 보면 여자 주인공이 나오고 그녀의 약혼남이 나옵니다. 이 약혼남은 굉장히 돈도 많고 거만하고 다른 사람들 무시하는 아주 비호감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그 배가 침몰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분명 보트가 모자라요. 그래서 다 탈 수가 없는데 이 약혼남이 배의 승무원에게 많은 돈을 건네면서 나를 구명 보트에 좀 태워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이 승무원이 아주 경멸적인 눈으로 보는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생사가 걸린 위기 상황에서도 돈으로 해결하려는 그 모습이 얼마나 속물스러워 보였을까요. 결국 그 약혼남은 어떤 어린아이를 태운다는 핑계를 대고 겨우 보트에 비집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살아남아요. 그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가? 여자 주인공이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는데 1929년에 자살했다 그럽니다.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아요.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1929년은 미국의 대공황이 온 해입니다. 그러니 이 남자는 배가 침몰하는 그 상황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았던 생명력 강한 사람이었는데 자기의 경제가 무너지니까 그만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교훈이 있지요. 타이타닉 배가 침몰하는 것보다 경제 위기가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영적인 면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시지만 우리들의 실제 경제 문제, 먹고 사는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다룹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매일매일 먹고 살아야 하고 우리들이 삶의 경제 문제를 매니지하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실제로 먹고 사는 경제 문제에 대해서 많이 언급을 하셔요. 오늘 본문도 그중에 하나가 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놓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가이사,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죠. 함정입니다. 카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여기에 예스를 해도 노라고 해도 함정에 빠집니다. 예스라고 하면 안 됩니다. 왜냐면 유대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로마의 황제가 지배하고 황제를 왕으로 섬기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 그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카이사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그런 말을 한다면 당신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공격을 할 수 있겠지요. 반대로 No라고, 카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 그것은 바로 반역죄가 될 것입니다. 황제에게 반대했다고 해서 당장 고발하고 처벌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함정을 놓기 위해서 한 질문인데 예수님은 거기에 예스, 노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시고 동전을 하나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데나리온이라는 로마의 동전을 가져옵니다. 데나리온은 그 당시에 일꾼의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200불, 300불 그 정도 가치가 있겠지요. 그 동전은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늘 쓰는 동전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과 들판에 있을 때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먹이나 200 데나리온으로도 모자라겠다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그것처럼 평소에 빵 사먹고 일상 생활을 하는데 늘 쓰는 로마의 동전이 데나리온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이 데나리온 동전을 가져오니까 질문하십니다. 이 동전에 있는 이 형상과이 글씨가 누구의 것이냐? 카이사의 것입니다 대답합니다. 동전에는 황제 카이사의 얼굴과 카이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지요. 그것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저 세금내는 문제 가져왔는데 세금만이 아니라 지금 훨씬 큰 경제 문제가 여기에 다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괜히 세금 질문했다가 완전히 덤탱이로 예수님께 이런 과제를 떠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이미 로마의 황제의 형상이 있는 동전을 널리 쓰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유대가 이미 로마의 경제권에 다 편입이 되어 있고 그 로마 경제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 현실을 지적을 하시는 것입니다. 동전에 카이사의 형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거를 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자기 민족도 아니고 지배하는 로마 이방 민족의 황제의 형상이 있는 동선이니까 원래는 만지면 안 돼요. 그러나 지금 유대인들은 이것을 일상적으로 매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왜 이렇게 되었는가? 예수님 오시기 한 150년 전에는 달랐습니다. 그때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독립 왕조를 세운 적이 있습니다. 하스모니안이라고 하는 독립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때는 유대 동전을 유통했죠. 그래서 유대 왕의 그림이 있는 자신들의 화폐를 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고 로마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동전을 쓰면 안 됩니다. 그러면 세금을 걷을 수가 없잖아요. 유대 민족의 동전을 로마인들이 걷어서 뭐 하겠습니까? 세금 걷기 위해서라도 유대인들은 로마의 동전으로 바꿔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그러면 강제로 했느냐? 강제로 칼 들고 너희들 이제부터 유대 동전을 쓰면 안 돼. 로마의 데나리온을 써야 돼 하면서 칼 들고 감시하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둬도 경제라는 것은 자기가 알아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유대의 밀농사하는 농부가 있다면 그 밀을 팔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이 유대 동전을 가지고 사 먹겠죠. 그런데 로마인들은 어떻게 하냐면 이제 유다 동전을 가져오면 로마 동전으로 바꿔 줍니다. 환전을 해 줘요. 그런데 환전을 하면 매우 유리하게 그렇게 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유대 동전을 가지고 로마 돈으로 바꾸면 이제 이집트의 밀을 살 수 있습니다. 이집트는 다 로마 땅이니까, 그런데 훨씬 많이 사는 거예요. 가난한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유대 동전 가지고 유대 밀 사 먹는 거랑 이 돈을 로마 돈이랑 바꾸어서 이집트 밀 사 먹는 거랑 비교해 보면 이집트 밀 사 먹는게 훨씬 이득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이게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생활을 위해서 로마 돈으로 자꾸 바꾸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만히 내버려 둬도 유대인들은 로마의 동전을 쓰고 결국 로마 경제권에 종속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다 아무렇지도 않게 로마의 카이사의 형상이 있는 동전을 쓰게 된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느냐? 이거는 그래도 로마 동전인데 찝찝하다, 그러니 우리가 밥 먹을 때는 세수하자 이랬습니다. 물로 씻으면 마치 그 로마 동전 만졌던 부정함이 씻기는 것처럼. 율법에는 그런 조항이 없거든요. 자기들이 만든 법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들의 전통을 가지고 예수님을 흉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왜 식사할 때 세수하지 않느냐 그렇게 말합니다. 그거는 비위생적이다는 뜻이 아니고 로마 동전 가지고 여러 가지 했는데 밥 먹을 때는 세수해야지 그 뜻인데 너무 소용 없는 말입니다. 그저 자기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규칙인 것이죠. 예수님께서 너희들 외식하는 자라고 그러시지 않습니까? 로마 동전 쓸 때는 실컷 다 쓰고 그걸로 밥 사 먹고 치약 사고 다 하다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아 세수해야지 이러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성전에서 제사 드릴 때는 어떻게 하는가? 제사드릴 때 원래는 소나 양이나 동물들을 가져와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니까 그 먼거리를 제사 짐승을 끌고 오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돈으로 가져오면 성전 앞에서 바꿔줍니다. 그런데 일단 로마의 돈을 유대 돈으로 또 바꿔요. 성전에서 제사드리기 위해서 재물을 사는 그 동전도 거룩해야 된다고 유대 동전을 준비해 놨다가 로마 돈 갖고 오는 사람들에게 바꿔 주는데 이때 또 이득을 남깁니다. 그래서 유대 돈으로 바꿔서 그걸 가지고 소나 양을 사면 그걸로 또 이득 남기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이 이런 엉망된 성전을 한번 청소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빗자루로 쓰셨다는게 아니라 이렇게 완전히 장사 속이 되어 버린 성전을 완전히 뒤엎으신 사건이지요. 그래서 환전하는 테이블을 다 엎어 버리시고 동물들을 다 풀어 주시고 이랬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는 이게 얼마나 외식하는 일인지, 얼마나 하나님을 속이는 일인지 모릅니다. 나가서 평소 생활할 때는 로마 동전 잘 쓰다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제사드릴 때는 뭐 동전 바꾸고 이런 일을 하는데 율법에도 없는 일이고 그냥 자기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식하는 일을 하는 것이죠. 지금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은 생활을 이분법적으로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 교회 일 따로 있고 일상 생활 따로 있어서 일상 생활 때는 그냥 로마 동전 가지고 할 거 다 하다가 예배드릴 때 있으면 세수하고 돈 바꾸고 이렇게 자기들의 생활을 둘로 나누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일상 생활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동전, 로마 동전을 사용하는 일상 생활에서 유대인들은 최소한 하나님께 죄송합니다라는 생각을 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할 건 다 하고, 하나님 앞에 와서는 거룩한 모양만 보이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단순히 세금 내냐 안 내냐 그런 본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지 않습니까? 천국이 이 땅에 오는데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들, 로마 제국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런 세상 여러 나라들 중에 또 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오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이 세상 나라를 다 심판하십니다. 다니엘 환상에서 돌이 날아와서 신상을 깨뜨리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면 세상 나라와 충돌하고 세상 나라를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로 투쟁하시는 것이거든요. 지금 그 십자가 지실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저 너들 세금 잘 내라는 말씀하실 리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일상 생활 가운데 이미 얼마나 세속화되어 있느냐. 너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데나리온 로마 동전 가지고 빵 사 먹는 거 그게 하나님 앞에 어떠하냐.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가책이 없다는 이 현실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경제 문제는 지금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하죠. 경제라는 한자말이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경세제민의 존말이고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멋진 말이에요. 영어로는 economy, 집의 법, 집의 살림을 꾸린다는 단어입니다. 경제 문제. 실제로 우리들이 돈을 벌고 쓰고 먹고 사는 문제. 그러니까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합니다. 실제로 우리들은 삶에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생각을 경제 문제, 돈 쓰고 돈 벌고 하는데 소모합니다. 그것이 또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그런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또 직업을 가지고 학교 공부를 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시간과 나의 육체적인 또 노력과 또 나의 정신적인 이런 노력을 엄청나게 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이 일하고 돈 벌기 위해서 계획도 다 하고 생활도 거기에 맞추고 또 이것저것도 걱정거리도 있고 하다 보면은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삶의 에너지를 경제 문제에 썼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경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을 하시지요.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돈쓰고 돈 버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세상의 모든 것에 값을 매겨놓았습니다.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세상은 그렇지 않았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동물과 식물과 열매와 이런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좋고 좋지 않음의 판단자이십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특별히 사람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선악과를 먹었고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선악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도덕적으로 들리는데 원래 의미가 더 넓습니다. 좋다 안 좋다 호불호 그런 의미까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물건을 보고 좋아하면 사고 싶고 안 좋아 그러면 사기 싫고 그런 가치를 담고 있는데 이 선악을 사람이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신 세상인데 이제는 사람이 하나님은 쫓아내고 내가 선악의 판단자가 된 것이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거든요. 이제 사람이 선악 또는 호불호를 스스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숫자로 값을 매기니까 서로 비교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빵 한 조각 1불, 스마트폰 200불 이런 식으로 가치를 내게 됩니다. 빵과 전화기는 비교를 할 수가 없는 대상인데 값으로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위기 상황이 닥쳐서 식량이 없어지면 완전히 달라지겠죠. 빵이 훨씬 비싸질 것이고 폰은 아무 가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그렇게 가치를 부여하고 값을 매겼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세상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답고 멋진 자연 세계에 인간들은 가치라는 덮개를 덮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그 값으로 이 세상을 판단합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돈이라는 선글라스를 끼고 이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이거는 100불 저거는 200불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나라, 인간의 시스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온전히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하는 그때에는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모든 탐욕이 드러나고 심판받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7절 한번 보시겠습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이 이름이라. 이 본문은 굉장히 유명하고 666 나오는 본문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계시록 자세히 공부하면 좋은데 오늘은 666 그 얘기 하려는게 아니라 이 마지막 때에 환난이 닥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 짐승의 표를 갖지 않으면 매매를 못 하게 됩니다. 경제 문제로 마지막 날에 우리들의 신앙의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할 때 환난이 닥치면 핍박이 오면 우리들이 그것을 이겨야 하지요. 끝까지 예수님을 고백하고 그러다가 목숨까지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핍박이나 투옥이나 사형 선고보다 더 어려운 시험이 경제적으로 오는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는데 씨를 뿌리시면 금방 새가 와서 먹고 그런데 어떤 씨는 조금 살아다가 핍박이 옵니다. 마른 땅에 뿌리면 환난과 핍박이 와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그런 씨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씨가 그 환란 핍박 다 이겨내고 좀 자랐는데 그 다음에 오는 시험이 뭐냐? 이 세상의 유혹, 세상의 부, 세상에 부요, 재물, 욕심 이런 것이 가시덤불로 눌러서 더 자라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 무섭지 않습니까? 감옥에 집어넣고 고문하는 이런 환란 핍박보다 더 무서운게 경제적으로 보는 유혹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요한 거 다 보여 줘요. 부잣집 번쩍번쩍하는 것 그리고 좋은 생활 환경, 교육 환경 이런 것으로 유혹하면 넘어간다는 거죠. 마지막 날에는 이게 극단적으로 되겠죠. 그래서 짐승에게 절하지 않으면 매매를 못 하게 된 겁니다. 빵 사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유혹이 오면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우리가 더 깊이 깊이 생각하는 기회를 다음에 갖기를 바랍니다. 이 경제 문제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다음 본문들 잠깐만 보시면 요한계시록 18장에는 그렇게 이 세상은 뭘 추구하느냐? 수많은 부와 무역과 매매함을 통해서 부를 추구하는 이 세상의 실패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스겔 27장은 전체가 이 이슈입니다. 무역을 하는 두로라는 도시가 장사를 하면서 얼마나 부를 많이 축적했는지, 그런데 하나님과 다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 세상의 부요를, 인간들의 이런 엄청난 이런 성과를 다 심판하실까요? 뉴욕같이 부요한 도시들,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도시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들이 잊어서 안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그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고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변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세상에 우리들의 돈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성도에게도 매우 합당합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성실하게 일하고 가족들을 부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거기에 늘 따르는 유혹이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어찌나 위험한지 우리들이 늘 깨어 있고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은 조직적으로 돈을 더 벌라고 우리들을 유혹하고 자꾸 부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주식 투자하라 그럽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이 주식을 해야 기업들이 투자를 할 수 있고 경제가 돌아갑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들이 사는 사회가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당신이 주식 투자하는 이유가 정말로 나의 작은 돈이라도 보태서 기업이 잘되고 우리 사회를 더 잘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물어보면, 뭐 그런 것도 있겠죠,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나의 이득입니다. 내가 돈 더 벌기 위해서 주식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 세상을 주식이라는 눈으로 보게 되고 그래서 세상의 어떤 전쟁이나 재난 사고 같은 뉴스가 생기면 거기 있는 사람을 걱정하는 것보다 먼저 내 투자한 주식이 어떻게 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을 그렇게 유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 말씀하시는데 그만큼 재물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물이라는 맘몬이라는 단어는 돈의 신이거든요. 돈의 신이 하나님과 지금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돈의 힘이 얼마나 크면 그래도 하나님과 지금 비교가 되냐고요. 그래서 예수님은 둘 다 섬길 수 없다. 하나님만 섬기든지 돈만 섬기라고 예수님께서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돈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돈을 신으로 삼아서는 안 되지요. 돈은 그저 사람들이 편하게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사람이 만든 것이니 사람이 돈을 부려야 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될 때가 너무 많지요. 우리들의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마땅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특별히 내가 돈이 없어서 힘들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고 주님 뜻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지금 내가 욕심이 아니라 나의 필요, 나의 가족과 자녀들을 위한 필요로 인해서 하나님 내가 눈물 흘리면서 기도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은 나의 그런 물질적인 부족함도 채워 주십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교회가 함께 힘을 합쳐서 도와주는 것도 마땅한 일입니다. 초대 교회부터 바울과 베드로가 모두 동의했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할 일은 당연히 복음 전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직업을 위해서 우리들이 학교 공부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마땅한 일입니다.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일함으로 나에게 합당한만큼 그리고 분수에 맞게 돈을 벌어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기도함 가운데 주님 뜻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우리들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에서 그런 재정적인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주님은 이해하시고 그리고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세상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도록, 그래서 나의 가정을 부양할 수 있도록 주님은 힘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는 늘 위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유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서 자기를 찔렀다. 이 말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돈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돈을 사랑하면 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을 탐내면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에서 떠납니다. 많은 근심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근심하는 적도 있고요. 돈이 우리들에게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찍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성도들에게도 이런 유혹이 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이런 우리들의 부족함도 용서해 주시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들이 늘 주님 불쌍히 여겨소서, 부족합니다, 나를 도와주소서 하고 시험과 근심에 빠지지 않도록 늘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21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세상의 재물은 카이사의 것입니다. 세상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붙들고 있으려고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필요에 따라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대로 우리들이 사용하지만 만약에 세상이 그것을 어떻게든 가져간다면 아 이건 원래 내 것 아니지, 카이사의 것이지 하고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아깝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그런 상황이 있더라도 그렇게 마음을 비울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죠. 그러나 특별히 동전에 카이사의 형상이 있어서 가이사의 것인 것처럼 하나님의 것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저와 여러분이 특별히 하나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은 돈과 비교되어 있습니다. 돈에게 우리 자신을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라. 돈은 그저 우리들이 매니지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욕심 부리지 않고 분수에 맞게 소박하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쓰라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잠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을 그렇게 드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텐데 주님 나 자신 돌아보면서 주님 나의 모든 이런 재정적인 현실적인 필요도 다 아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 채워 주시는 줄 믿고 특별히 나의 모든 필요를 또 주님께서 또 필요한 것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돈에 휘둘리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목소리 내서 주님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로 변화된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멀리하여서 그저 이 세상에 속해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한하신 은혜로 우리들을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들을 불러서 그분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복되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과 영원히 영광을 누리는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의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늘 감사하고 감격하며 마음속에 늘 평강이 임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세상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나누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을 생각할 수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된 다음에는 평생 이 은혜를 자랑하고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기독교 2000년의 역사 가운데에도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평생 주님을 자랑하면서 산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특별히 어거스틴이라는 분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어거스틴은 주후 4세기 5세기 로마 제국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대단한 지성인이고 이 분이 남겨 주신 수많은 책들과 설교가 지금까지도 기독교 신앙에 큰 도움이 되는 위대한 분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젊었을 때에는 완전히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분의 전공이 수사학이라고 하는데 수사학은 말을 잘하는 학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말이 문법과 논리에 맞고 또 여러 가지 표현으로 사람들을 잘 설득해서 내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학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제일 가까운 직업이 변호사, 정치인 그런 겁니다. 그만큼 말로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기술에 능했고 자기의 젊은 시절을 그것을 연구하면서 바쳤습니다. 대단히 명석했기 때문에 성공한 수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늘 마음속에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는거예요. 그래서 20대 젊었을 때에는 마니교라는 종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종교에서 아무리 해도 만족이 없어서 거기를 나오게 되고 결국은 자기가 수사학 교수를 하고 있던 이태리의 밀라노 지역에 있던 암브로스라고 하는 교역자 그리고 설교자를 만나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거스틴의 삶을 봐도 한 사람과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젊은 어거스틴이 암브로스의 설교를 말을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고 들은 겁니다. 자기의 직업적인 것으로 말의 표현에 집중하면서 듣다가 자꾸만 설교를 듣다 보니 하나님 말씀을 접하게 되고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성경 말씀을 읽기 시작하다가 중간에 덮어 버립니다. 왜냐면 자기가 익숙한 수준 높은 품위 있는 라틴어 문헌들과 비교해 보면 성경의 말씀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내용도 좀 희한한 것도 많고 그리고 번역본이기 때문에 본래 아름다움이 살아나지 못한 것도 있고 그래서 성경을 처음에는 가까이 하기 힘들어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꾸 설교 말씀을 접하면서 마음이 열렸지요. 그래서 결국은 무엇을 알게 되었냐면 성경은 은혜로 읽어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적인 도움을 받아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세상의 다른 책들처럼 어떤 지식이나 인생 사는 방법 그런 것을 배우는 책이 아니고 오직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읽으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 분이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가 강력하게 임하는데 이분이 견딜 수 없이 통곡하면서 지난날에 젊은 날에 방탕했던 삶을 완전히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되어서 남은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위대한 목회자, 설교자, 주교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나중에 연세가 든 다음에 자기의 젊은 날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어떻게 죄 가운데 살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는가를 책으로 남긴 것이 있습니다. 유명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인데 지금까지도 기독교의 아주 훌륭한 고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어거스틴 고백록의 9권에 보면 그가 처음 하나님 믿었을 때 오늘 본문인 시편 4편의 말씀을 가지고 큰 은혜를 받았던 대목이 있거든요. 오늘은 그 대목을 중심으로 우리도 함께 은혜를 받아보면 좋겠습니다. 굉장히 옛날 사람이고 또 우리와 좀 다른 버전의 성경책을 읽은게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는 조금 다른 그런 성경 읽기를 보게 될 겁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1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시편 4편 1절에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거스틴이 은혜를 받고 성경을 읽으니까 그냥 단어 하나하나가 은혜입니다. 이분이 희한하게 단어 하나를 붙들고 너무 좋다, 은혜롭다 하면서 그렇게 읽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어거스틴을 사로잡은 단어는 부를 때입니다. 하나님을 부름. 다윗의 시편이고 다윗이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어거스틴은 다윗이 그랬다는 것 뿐 아니라 내가 부른다는 겁니다. 자기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부릅니다. 예전에 한번 말씀드린 것처럼 그 때에 성경을 읽는 것은 반드시 소리내어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부를 때 라는 대목에서 실제로 어거스틴도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성경 말씀에 그만큼 몰입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자신도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른다, 이 말씀에 딱 꽂혀서 어거스틴이 얼마나 감격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 응답하소서 이 대목이 어거스틴이 읽은 성경에는 응답하십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부르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이렇게 읽으면서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성경 한 단어 한 단어 읽으면서 이게 그저 옛날 누군가의 고백이 아니라 나의 고백이 되고 그리고 내가 이것을 읽을 때 하나님이 즉시로 응답하시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읽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성경 읽으면서 내가 생각하고 은혜받는 것이 좋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고 그 말씀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내가 내 마음을 열 때에 하나님이 나를 만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고백이 옛날 믿음의 선조들 뿐 아니라 나 자신의 고백이 되고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은혜로 성경을 읽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 응답하십니다. 오 좋으신 하나님 어거스틴이 그렇게 성경을 읽고 있지요.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여기서 너그럽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표현을 해 보면 나의 영혼을 크게 하심이라는 표현이 되겠습니다. 고전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의 영혼을 어떤 분명한 실체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들의 육신이나 이 세상의 물질은 도리어 그림자 같은 것이고 나의 영혼이 진짜 참된 실체다, 이렇게 보았거든요. 그리고 나의 영혼이 실제로 크기가 있다고 믿은 거예요. 그러면 나의 영혼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은 뭐냐? 곤란 중에, 우리가 괴로움이나 걱정거리가 있으면 우리가 쪼그라들잖아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얼마나 힘들어요. 그러면 우리의 영혼도 쪼그라들겠죠. 그러나 이렇게 곤란할 때 아무리 큰 곤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렇지 않아요. 담대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나의 영혼이 퍼지는 겁니다. 심호흡도 하고 가슴을 쫙 펴고 두 팔을 들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나의 영혼이 말 그대로 커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와 같은 담대함을 배우기 원합니다. 걱정거리가 있고 내일 당장 교수님 만나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럴 때 떨지 말고 마음을 담대히 하고 곤란 중에 나의 영혼을 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넉넉해지면 실제로 너그럽게 되겠지요. 사람들과도 더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좋은 의미로 나 자신에 대해 자신감,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내 중심대로 살라는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담대하다, 이런 올바른 의미로 어 나의 자의식을 가져야 되겠고 그렇게 할 때에 주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될 수 있겠습니다.
2절,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이 대목은 대개 다윗 자신의 고백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어거스틴은 여기서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을 볼 때 이렇게 안타까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영광이 있는데 불쌍한 인생들이 어리석어서 이 영광을 말도 안 되는 것과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그 가운데 거하지 않고 그 대신에 헛된 일, 거짓된 것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여기에서 어스틴은 자기의 지난 날을 돌아봅니다. 내가 옛날에 마니교라는 종교에 빠져서 헛된 일과 거짓에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말씀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적응하면 안 됩니다.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다른 누구를 생각하면 안 되고, 그렇게 책망하시는 말씀은 나 자신에게 적용해야 옳겠습니다. 어거스킨도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이랬지, 내가 한때 헛되고 거짓된 것을 찾았지 하고 고백을 합니다. 그가 한 때 믿었던 마니교라는 종교는 영지주의에 속하는데 이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선과 악의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한 세력이 있고 악한 세력이 있어서 동등한 겁니다. 그래서 맞서고 있고 늘 투쟁한다는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니 아무리 세상에 악하고 어두운 권세가 있어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것에 비춰 볼 때 마니교의 선악 2원론은 잘못된 것입니다. 특별히 마니교는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이 다 선하냐?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습니다. 그 영적인 현상이 있다고 다 믿으면 안 되고 분별해야 하죠. 악한 영은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속이고 또 사람들을 겁주고 위협하면서 사람들을 자기의 노예로 만니다. 그런 악한 영들이 지금도 이 세상에서 역사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분별해야 하지요. 그리고 그런 것은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승리해야 합니다. 육적인 것이 다 악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어 주신 우리의 육적인 물질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하는 육신적인 일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고 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우리들의 육신적인 모습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는 마니교의 교리는 헛되고 거짓된 것이었지요. 어거스틴이 그것에 빠져서 있다가 만족이 안 되어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자기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고백을 하고 있지요.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이 말씀은 어거스틴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경건한 자, 가장 귀하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품 속에서 영원히 계시고 때가 되매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분이지요.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 여러 중에서 선택하신게 아니죠. 오직 외아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택하셨느냐? 그분이 우리이 세상을 우리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실 것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은 순종하시고 때가 되매 사람의 몸으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고 십자가 고난받으시고 죽고 살아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영원 전부터 선택하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기도, 우리들을 위한 중보를 들으시지요. 여기서 어거스틴이 로마서 8장 34절을 인용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십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면 여호와께서 들으십니다. 가장 귀하시고 의롭고 경건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간구하고 계십니다.
또 너희가 알지어다 라고 했습니다.이 시편을 읽는 너희가 알지어다. 어거스틴이 지금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의 이런 성경 읽기를 통해서 내 주위 사람들도 좀 알지어다. 알면 너무 좋겠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뭐라 하냐면 내가 옛날 친구들, 방탕할 때 친구들이나 마니교에 있을 때 알던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내가 이렇게 성경 읽는 이 소리를 좀 들었으면 좋겠다 그럽니다. 그래서 그들도 알도록. 지금 나는 성경 읽는 괜찮은 사람이야, 자랑하는게 아니고 자기가 읽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나의 옛날에 알던 그 사람들도 듣고 알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된 주님이시고 예수님의 우리의 사랑을 그들도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언자가 하는 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예언자인데 지금 우리도 성경 말씀을 읽고 이것을 전하면 우리도 예언을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또 그것을 전하면서 사람들이 듣고 이와 같이 우리 주의 사람들도 알게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말 뿐 아니라 우리들의 행동으로도,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 주위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삽니다. 게으르지 않고 세월을 낭비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수고도 다 아시고 갚아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각 사람들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속이지 않아요. 그리고 성실하게 일하고 공부합니다. 그리고 꾀를 부리지 않아요. 어떻게 사람들 속에서 이래저래 해 볼까? 그런 일이 하나님이 다 보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올바르게 예수님 믿는 사람은 성실하게 올바르게 직업이나 학업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세상 사람들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알지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저런 삶을 볼 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너무 보기에 좋구나 하면서 우리들의 생활이, 우리들의 말과 생각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4절입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여기서 떨며 범죄한다는 대목이 어거스틴이 읽은 성경에는 노하여서 범죄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에베소서 4장 26절에도 인용이 되는데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화내지 마라 그런 뜻도 되겠지요. 그런데 어거스틴이 읽기로는 너희는 분을 내어라, 그리고 범죄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 분을 내라고 하느냐? 여기에서 화내는 대상이 누군가? 자기 자신입니다. 나 자신의 옛날에 죄된 모습, 그래서 헛된 것과 거짓된 것을 쫓았던 나의 죄된 모습을 보고 화를 좀 내어라 이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이 다 선한데 특별히 노하는 그런 모습이 나 자신과 나의 죄된 모습, 잘못된 모습을 보면서 좀 화를 내고 노하여서 범죄하지 말지어다. 이렇게 어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지난 날, 옛 사람의 모습, 죄된 모습이 있습니다. 이걸 보면서 그냥 무덤하게 늘 그래 왔는 걸 하지 말고 아 그러면 안 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의로운 분노,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경각심을 가지고 매일매일 살면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내가 날마다 죽노라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나의 지난 날 옛 사람, 심지어 어제 모습도 죄된 모습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들을 다시금 깨우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은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말지어다. 이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지난날 옛 사람의 모습 이것은 그럼 어떻게 되는가? 5절과 연결이 되는데 5절에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의의 제사를 드린다고 했는데 제사의 재물이 뭐냐? 나의 옛사람, 그러니까 나의 지난 날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물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고 날마다 주님 앞에 부족합니다, 내가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품어 주시기 때문에 매일매일 살게 되죠. 나의 그런 죄된 모습, 이것을 재물로 드리는 것이 의의 제사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의 지난날, 나의 옛사람 그대로 그냥 계속 계속 살면 크리스천이라고는 하지만 변화가 없는 그래서 보람도 기쁨도 없는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이런 모습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것을 제물 삼아서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들이 옛 사람 그대로 살면 마치 꿈속에서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꿈을 깨면 배고픈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참 생생한 비유 같습니다. 혹시 그런 꿈 꿔 보셨습니까? 꿈속에서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꿈 깨고 나면 배고프고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만약에 나의 죄된 모습을 주님께 의의 제사로 드리지 않으면 나의 모습 옛사람 그 모습 그대로 산다면 그렇게 허망한 꿈 속에서 살다가 깨는 것 같은 그런 삶이 됩니다. 그러지 말고 나의 지난 삶을 주님께 의의 제사로 드리는 결단을 하여라. 그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이렇게 어 말을 하고 있습니다.
6절,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냐 하오니. 6절은 문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질문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선을 보일까?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보여 줄 분이 누구입니까? 이것이 모든 인생의 질문 아니겠습니까? 각 사람의 형편은 달라도 결국 우리 모두에게 내가 좀 좋은 것을 보고 싶다, 과연 누가 어떤 분이 나에게 좋은 것을 선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인생의 질문이라면 대답은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그 응답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모든 질문에 답이 되십니다. 인생은 질문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인생은 완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있고 늘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가야 하므로 주님 앞에서 날마다 질문하는 것이 옳고 좋습니다. 주님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주님 앞에 더 선한 삶을 보여 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닮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선을 더 좋은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답은 늘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비추소서,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답이 되십니다. 날마다 주님을 찾는 우리가 되기 바랍니다.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여기서 빛이라는 단어가 어거스틴에게 특별합니다. 왜냐면 옛날 마니교에 있을 때는 빛을 그렇게 강조했거든요. 그러나 헛되었죠. 참된 빛은 우리 여호와의 주의 얼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들은 그 빛을 받아서 비추는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이 인용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들 스스로는 빛을 낼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는 그 빛을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가 그것을 받아서 비추는 빛의 자녀들이 됩니다.
7절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여기에서 어거스틴에게 꽃히는 단어는 기쁨입니다. 기쁨. 결국은 크리스천의 삶을 규정하는 단어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크게 드러나는 눈에 뜨는 기쁨일 수도 있고 또는 여러 가지 형편과 사정에 따라서 잔잔한, 사람들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서 샘물 같이 솟아나는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기쁨이 이깁니다. 우리 삶 가운데 걱정이나 어둠움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압도하고 승리하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실제로 기뻐하거든요. 그리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게 아니라 너무 기뻐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성경 읽으면 좀 요란합니다. 그래서 읽다가 할렐루야 하다가 오 주여 기쁨 이러고 그런 소리가 계속 나니까 아마도 어거스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알았을 것 같습니다. 소리 들으면서 아, 또 성경 읽는구나 알았을 것 같아요. 어거스틴이 이렇게 성경 말씀 읽으면서 그냥 자기의 그런 모든 감정과 열정과 자기의 삶을 다 들여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주님 주시는 은혜를 완전히 체험하고 또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 모습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혼자 성경 읽으면서 부흥회 하는 모습을 우리들이 상상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나옵니다. 실제로 우리들의 몸을 풍성하게 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는 그런 표현이 되는데 그런 것이 풍성할 때보다 더한 기쁨, 참되고 커다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은혜로 변화된 사람은 성경을 이렇게 은혜로 읽습니다. 오늘 1장 읽어야 되니까 읽는게 아니라 그냥 단어 하나하나만 가지고도 묵상하고 기뻐하고 아마 그렇게 읽다 보면 뭐 한 시간 지나도 한 줄도 못 넘어갈 겁니다. 그렇게 정말로 하나님 앞에 깊이 잠기는 성경 읽기를 하면 좋겠고, 그렇게 느리게도 읽고 또 한편으로는 또 그러면 몇 년 걸릴 거니까 성경 전체의 스토리도 알기 위해 빨리 읽고 그래서 어 성경을 느리게도 읽고 빨리도 읽는 두 가지를 병행하면 좋다는 생각을 생각이 들게 됩니다.
8절입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이는 오직 여호와심이라. 여기서 평안히 눕고 잔다는 같은 말이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어거스틴이 동일하신 분에 대해서 묵상을 합니다. 동일하신 변치 않는 분. 그분이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알아 주시는 그 사랑이 변치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살 수 있죠.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는 그것은 온 우주가 사라져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십니다. 이 시편 4편의 짧은 본문을 가지고도 풍성한 이런 은혜 충만한 그런 삶을 사는 우리 믿음의 선조인 어거스틴의 삶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한번 이렇게 해 봅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풍성히 잠기면서 삶이 진정 변화되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바로 전날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마지막으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왔으니 곧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시고 제자들 자신들도 중요한 자리에 앉고 이제 영광스러운 날이 곧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밤 예수님의 말씀은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의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또 특별한 일을 하시는데 제자들의 발을 시켜 주셨지요. 높은 보좌에 앉으셔야 할 왕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아지신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랐지요. 그리고 자기들의 부끄러운 그 발을 내밀고 예수님께서 씻어 주시는 그 손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내가 이같이 하였던 것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하여라. 너희도 서로 섬기고 서로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곧 왕이 되실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의 말씀과 행동이 굉장히 다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떠나야 한다. 내가 너희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요. 하나님, 아버지, 주님, 영원히 계시는 분. 여러 표현들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특별히 지금 하나님을 부르시는 그 이름은 나를 보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특별히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믿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분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주시고 특별히 병든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마음의 고통이 있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쫓겨나고 멸시받고서 받고 있는 그래서 눈물 흘리는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찾아가셔서 다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셨지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많은 정말 보배와도 같은 귀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 그 하나님에 대한 그 귀한 복음은 아주 간단히 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굉장히 쉬운 내용입니다.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도 얼마든지 나와서 다 내 말을 들어라 하고 초대하셨지요. 너희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어려워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아주 쉽고 그러나 너무나 귀한 말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이 사실만 우리에게 잘 마음속에 새겨진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려움 당하고 또 괴로움 당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지요. 병에 걸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곤란도 있고 그 사람들과의 그런 어려움이 있지만은 그 모든 괴로움과 문제를 다 이길 수 있는 그리고 해결할 수 있는 그 사실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지금이 시간에도 우리들을 선하게 살펴보시고 우리들의 모든 기도를 우리들의 눈물을 다 들으시고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지금도 언제라도 우리 곁에 계시지요. 이 사실만 믿을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좋은 곳이 되겠습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해 주신 소식이 그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내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너희가 다 받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예수님이 여러 표현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결국은 우리들이 또 하나님의 그 백성들이 결국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그 자녀의 합당한 삶 그런 삶을 살기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저 막연하게 알거나 굉장히 멀리 계신 분으로 어렵게 여기거나 아니면 아예 모르거나 그렇게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요 너희의 아버지시니 그분을 믿고 염려하지 말고 참으로 복되고 평화로운 그런 삶을 살고 그 사랑을 이웃 사람들과 나누면서 살아라. 그 말씀 전해 주기 위해서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이 나를 그 목적을 위해서 보내 주신 그분께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금방 자기들 곁에서 왕이 되실 줄 알았는데 주님은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야 한다고 하시니까 제자들 마음에 근심이 있지요. 그렇지만 주님은 이것이 꼭 일어나야 할 일이다.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혜사라는 말씀이 나오죠. 말 그대로 돕는 분이시고 성령님을 가르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가서 하나님께로 가면 내가 보회사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시지요. 성령님 하나님의 영 그리고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십니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우리 마음속에 우리들의 삶 속에 성령님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함께 하시고 우리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주시고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을 주시고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 믿고 매일매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님 그분이 지금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이 성령님에 대해서 특별한 말씀을 하시는데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시면, 여기 세상이라는 단어는 코스모스입니다. 코스모스, 우주라는 뜻도 되고 세상이라는 뜻도 될 텐데 성경에서는 이 세상이라는 단어가 좀 특별한 의미가 있지요. 대부분은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과 반대되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하면 성경에서는 대개는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 그런 뜻이 되겠지요. 그래서 성령님께서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책망하실거라 말씀을 하셔요. 여기서 책망이라는이 단어는 다른 말로 하면 유죄 판결이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이 세상이 주님 앞에서 어떤 잘못된 그리고 고쳐져야 할 그런 현실 안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신다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굉장히 엄중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이 성령님은이 세상에 오시면 세 가지로 책망을 하실 것인데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죄에 대해서 이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은 바로 그들이 나를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오늘 주보에 마틴 루터가 이 본문에 대해서 설교한 내용을 소개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이 세상이 죄로 책망받을 일입니다. 이 말은 사실 아직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될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 믿지 않는게 그렇게 큰 죄냐? 너무 기독교는 배타적이지 않냐? 예수님 안 믿는 것을 죄라고 말하면 너무하지 않느냐. 그렇게 거부감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본래 뜻이 뭐냐, 그 무슨 의미냐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봐야 하죠. 죄라는 것은 루터도 그런 말씀을 하지만, 사람들은 죄라 그러면 거부감을 느끼고 싫어하지요. 왜냐면 내 행실을 자꾸 지적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인데 죄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어떤 범법을 한다는 그런 의미도 있겠지요.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이런 정말로 큰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야 될 그런 것도 죄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라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 하나님과 반대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고 있다. 그 현실이 죄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 말은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내 생각이 어떻고 하는 그런 차원, 그런 개인적이고 사적인 차원뿐만 아닙니다. 그런 것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못된 것은 고쳐야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사는 이 세상 가운데 인간이라는 현실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이 세상이 하나님과 지금 잘못되어 있다는 이 현실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원래 창조하셨을 때 그 에덴 동산, 하나님의 본래 창조는 이렇지가 않았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세상,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세상,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서 지음받은 사람은 그 가운데서 특별하게 하나님과 매일매일 교재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과 사람이 늘 대화하고 함께하는 그런 세상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보시면 하나님이 서늘할 때쯤 늘 동산을 거니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마 매일 저녁 그 시간이 되면 하나님이 산책하시듯이 에덴 동산에 오시고, 원래 인간은 아담,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가 인간이라는 뜻이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오시면 하나님과 함께 산책하고 이런저런 얘기하고 그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원래 관계가 그렇습니다. 어린아이가 하나 부모님 앞에 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 모습이 제일 합당한 비유가 되겠습니다. 순진한 아이들, 아직 아무 염려가 없는 아이들이 부모님 앞에 자랑스럽게,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나와서 부모님 손잡고 동행하는 그 모습이 가장 좋은 모습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원래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렇지가 않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일단 많이 모르고 오랜 세월 동안이 세상 가운데 또 문화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예 잊어버린 사람도 많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그냥 막연한 개념으로만 알고 좀 멀리 계신 어떤 분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을 굉장히 두려운 두려워할 분으로 그래서 나를 늘 간섭하고 힘들게 하는 그런 분으로 아는 경우도 많아서 하나님과 인간 세상의 관계가 지금 매우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인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인간의 책임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뭐냐? 그것을 멀리서 찾을 것 없습니다. 옛날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는데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사실 나 자신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지금 어떤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을 정말 아버지로 매일매일 그렇게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무나 강조하시고 부탁하신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거든요. 두려워하지 말라. 그 말씀 얼마나 많이 하시는지, 풍랑 가운데 걸어오실 때 제자들이 무서워하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 말씀이 얼마나 강조되는지 모르는데 실제로 그렇잖아요. 어린아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모님으로 모시고 있는데 걱정하겠습니까? 아 내가 내일 뭐 먹고 살지? 그런 걱정 안 하잖아요. 그것이 원래 인간의 모습인데 그걸 우리가 잃어버렸죠. 우리들도 사실은 마음속에 그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1년 뒤 10년 뒤 나는 어떻게 하지? 내 가정, 내 자녀들, 내 직장, 학교, 나의 미래는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다 걱정거리가 한두 개가 아닌데 이 모든 이런 것으로 인해서 내가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감사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그런 나의 모습입니다. 그걸로 인해서 나 자신도 힘들고 옆에 사람도 힘들고 세상도 힘들고 그런 우리의 모습이 그걸 보여주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지금 뭔가 잘못되어 있다. 이것이 죄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바로 그런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고 바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시고 그것이 참된 인간의 모습이라고 가르쳐 주시고 그리고 그 길을 끝까지 가셔서 십자가까지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믿는 것이 사실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마음에 구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대로 따르기로 사는 따르기로 결심하는 삶, 그것이 사실 정말 마땅한 삶이 될 터인데 세상은 아직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래서 이 세상이 성령님께 책망받을 것입니다.
의에 대해서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의에 대해서 책망하신다고 되어 있는데 의라는 말은 정의, 공의, 올바른 것, 공평한 것 그런 의미가 있지요. 그런데 가장 본질적으로는 성경에서 의라는 것은 뭐 다름 아니라 옳은 것, 맞는 것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올바른 것.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 올바른 자리, 올바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의롭기를 원하시고 또 의를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십니다. 칭의라고 하는 말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 말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 다시금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우리가 그분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마음에 늘 평강이 있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 이것이 의로운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지요.
이것이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시는 의인데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의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의롭게 하신다는 말씀이 로마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의로우신 분, 완전하신 분이고 그분이 의의 기준이신데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하시나?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맞춰 주신다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셨는가? 바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롭게 회복되고 그렇게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는 그것이 하나님 자신을 의롭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필요 없죠. 하나님은 그렇게 굳이 안 하셔도 원래 당연히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잘한 사람 상 주시고 못한 사람 벌 주시고 그렇게만 하셔도 얼마든지 그분은 정의로우신 분인데, 그걸 훨씬 넘어서서 굳이 안 하셔도 되는 일, 우리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불러 주셔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삼아 주시는 그걸 굳이 하신 것이고 그만큼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신 일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에는 그 올바른 일, 의로운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그분의 모든 사역을 끝내시고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끝은 그리고 정점은 십자가의 희생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죽기 위해 오셨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지만 그래서 우리들은 죽을 운명에 있는 존재인데 예수님이 그런 우리 인간으로 오셨지요. 그런데 그분이 죽으실뿐 아니라 죽기 위해 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태어나실 때부터 죽을 것을 작정하고 오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이런 죄와 죽음의 이런 괴로움을 다 가져가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 표현하셨을 때 동방 박사들이 드린 선물 중에 아예 몰약이 있는 것이지요. 장례 때 하는 그런 몰약을 어린아이에게 드리는 선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아예 죽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이 세상에서 모든 일과 가르침을 이제 다 끝내시고 그 마지막으로 끝까지 완성하기 위해서 이제 십자가에 바로 이 밤이 지나면 못박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의로운 일, 마지막 가장 옳은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고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더 이상 보지 못하 섭섭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예수님 죽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더 이상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만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요. 그 대신 지금 우리에게는 그분의 영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가장 의로운 길 하나님께서 정하신 올바른 일이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심판에 대해 대하여라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 영어에는 프린스라고 그렇게 되어 있고 이 세상의 주권자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는 로마의 황제나 세상의 왕들이나 그런 권력자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자들이 심판을 받을뿐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는 그 모든 배후에 있는 더 영적이고 본질적인 그런 존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죠. 사탄이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사탄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많고 이상한 것도 많고 그런데, 성경에는 사탄에 대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만 되는 데까지만 나와 있습니다. 자세히 나와 있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탄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가 없고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우리들이 성경 말씀 믿고 신앙생활할 때 사탄을 너무 의식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거 할 때 아 실수했네, 또 사탄이 속였네 너무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우리들은 하나님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은 늘 감사와 기쁨, 사랑 이게 중요한 것이지 사탄이 나를 넘어뜨린다고 너무 의식하시면 사탄이 좋아합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성경에는 사탄에 대해서 최소한의 내용만 나와 있는데 일단 사탄은 자기 혼자 나타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셨죠. 모든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사탄도 예외가 아니고 일단 영적인 존재고 그래서 육신인 우리보다 훨씬 많은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런데 타락을 한 거죠. 그래서 성경에는 아주 살짝 힌트만 되어 있는데 교만해서 자기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천사니까 훨씬 책임도 있고 중요한 그런 일들이 있을 텐데 교만해서 자기 처소를 떠났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타락한 거죠. 그래서 그것이 사탄이 되었고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의 근원은 교만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 교만한 것,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그래서 처소를 떠나는 것, 이것이 죄의 근원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들은 더 자세히 알려고 연구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임금이 심판받았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 사람들을 다 두려움으로 몰고 갑니다.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내가 지금 여기까지 이루었지만 앞으로 10년 뒤에는 또 불안하지 않을까? 언젠가 나에게 죽음이 닥치면 내 자녀들도 걱정되는데 그러면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을 계속 불안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죠. 그것이 사탄의 제일 주된 무기입니다. 그런 것을 싹 예수님께서 다 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임금이 정죄받고 심판받은 것입니다. 쫓겨난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들은 사탄의 그런 유혹에 또는 위협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물론 우리들에게는 매일매일 이런 시험이나 유혹, 그런 마음이 간혹 들기도 하지만 그냥 스쳐 보내면 됩니다. 머리 위에 새가 날아오는 것을 막을 순 없지만 머리에 동지를 트는 것은 우리들이 털어 버리면 되죠. 그런 비유가 있는 것처럼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 되고 그것도 너무 힘줄 필요도 없어요. 무시하는 것이 차라리 더 좋습니다. 그런 생각은 흘려 보내고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니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기도처럼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이잖아요. 매일매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선하신 그 사랑을 믿는데 왜 두려워하겠습니까?
사실 이것이 우리들의 영적인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은 다른게 아니고 투구 쓰고 갑옷, 칼과 방패와 그런 비유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싸우는 그게 본질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말 영적 전쟁의 가장 최전선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무슨 소리 하더라도, 세상에 뉴스나 그런 것들이 틈만 나면 아니야 아직 모자라 더 있어야 돼 걱정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수많은 세상의 유혹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아니야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때문에 전혀 요동하지 않아, 나는 늘 평강과 감사와 기쁨을 누릴 거야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 성도들은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요. 하나님을 모르니까 아예 그런 생각도 안 하고 그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이런 것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살고 있지만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 있는 우리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알아서 그런 두려움이나 염려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만을 믿고 온전히 평화롭게 사는 것 그것이 영적 전쟁에 가장 중요한 모습이 되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 오신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부탁입니다. 유언이라고 할 수 있죠. 예수님 죽기 직전에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우리가 들어야 되잖아요. 예수님 말씀 듣고요. 우리가 예수님 당부하시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두려워하지 않고 영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 주시고 도와주시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다고 하는 것을 굳게 믿는 성도의 삶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을 진리의 성령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이 모든 것을 다 일히 가르쳐 주시고 우리들에게 인도해 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받은 우리들에게 진리의 성령님이 늘 인도해 주시고 말씀해 주셔서 주님이 도와주시는 풍성한 믿음의 삶,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 안에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