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두 행악자들도 함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쪽 옆에서 못박혔습니다. 갈보리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섰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똑같이 생긴 세 십자가들입니다. 그러나 거기 달린 사람들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가운데 달리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사야 53:12의 말씀처럼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명패에 쓰인 대로 그는 유대인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 속으로, 내 마음에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면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과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말할 때에는,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진짜 나라를 의미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결국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루살렘이야말로 수도요, 로마 총독과 유대 관원들과 제사장들이 불의하게 다스리고 있는, 되찾아야 할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신들도 그 좌우편에 앉기를 기대했고, 누가 더 큰지 다투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제자들은 그만큼 예수님이 정말 왕이 되실 것이라고 정말로 믿은 것입니다.
그들의 기대의 절정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장면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종려주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가신 것은 정말 정답고, 유쾌하고, 즐거운 장면이지만, 그것의 의미를 사람들은 모두 압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시온의 왕이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탄다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바로 자신이 구약성경이 예언하는 메시야, 왕이시라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본제자들과 사람들은, 이제 로마와 종교가들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왕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크게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세상의 권세와 군대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0:25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의 나라는 섬기는 나라, 그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심으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양편 옆에 두 사람이 또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 행악자들을 다른 본문에서는 강도라고 부릅니다. 본문을 보면 아마도 서로 잘 아는 사이, 동지와 같은 사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폭력으로 해치고 약탈하는 악한 강도나 산적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라바라는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 대신 풀려난 자입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강도라고 불리는데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성중에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붙들린 자입니다. 민란이라는 것은 아마도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저항운동 같은 것일 테니, 두 행악자도 어쩌면 그렇게 로마에 항거하여 싸웠던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로마인들이 정치범이나 반역자들, 특별히 죄질이 나쁜 사람들을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처형하던 형틀입니다. 그러니 이 행악자들도 매우 나쁜 강도들이거나, 로마에 반역하여 난리를 일으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면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말만 본다면 괜찮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한국말에는 존대말과 반말이 있어서 성경 번역에도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늘 반말을 하시고 제자들은 존댓말을 합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 큰 어른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은 헬라어에는 영어처럼 존대말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친구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강도의 말도 한국말로 반말로 번역했는데 만약에 존대말로 한다면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당신과 우리를 구원하소서”가 됩니다. 본문은 그가 비방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 말투와 태도에서 예수님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본문 앞부분에서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말, 네가 그리스도면 자신을 구원하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자신을 구원하라는 말과 일관적입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고, 사람들의 조롱도 들었기에, 십자가에 달린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의 비방에 참여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면 숨도 쉬기 어렵습니다. 그 힘든 상황에서 굳이 예수님을 비방했을까요? 어쩌면, 이 말에는 그의 진심이 조금이라도 담겨 있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왜 자신을 구원하지 않습니까? 자신도, 우리도 좀 구원해 주소서 라고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의 강도는 그를 꾸짖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그는 목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두려울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앞에 왕이나 황제가 와도 그 앞에 겁먹을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죽을 텐데요.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육신 뿐 아니라 우리 영혼도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실 수 있습니다. 육신의 죽음으로 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계수할 날이 올 것이며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 사람과 동일한 정죄를 받기 때문에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보기에 그와 동료는 마땅히 죽을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라는 분은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의로우신 분인데, 이 분과 자신들이 동일한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왜 그럴까요? 이 강도는 지금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고는 불가능합니다. 또 이 강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도리어 그의 말은 아마도,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이나 느낌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저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 하나님 앞에 솔직히 선 영혼, 그리고 그가 이해하고 있던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기반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고 형벌을 당해야 하는지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지극히 존귀하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의로운 선생님이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신 분입니다. 그 분과 자신이 똑같은 처지에 놓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에 보면 거지가 왕자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왕자인줄 알고 시중을 드니까 거지가 폼잡는 것이 아니라 너무 불안해 합니다. 자기에게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 발각되면 큰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처럼 이 강도도, 예수님과 같은 처분을 받는다니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이러한 형벌을 당하시니, 그 분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악한 자신과 동료는 얼마나 더한 심판과 정죄를 받아야 할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같은 정죄를 받고 있으니, 아직도 더 당해야 할 심판과 형벌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혹시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어떻게 예수님과 같은 형벌을 받는단 말이냐 너는 더 큰 벌을 받아라 하며 지옥불에 던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죄악 가운데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의로우신 분을 이렇게 비참하게 처형시킬 수 있는 인간세상, 유대인과 로마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죄악과 불의 가운데 타락해 버린 끔찍한 세상의 현실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본 것입니다. 자신들이 벌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더라도, 이 의로우신 분을 이렇게 죽일 수는 없다. 이 세상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 아래 있고 하나님이 반드시 곧 이 세상에 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것을 그는 십자가에 달린 고통 가운데서도 직관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그저 죽었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자신의 동료를 꾸짖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것과는 매우 다른 이유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그가 누군지 알았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의 사랑과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고, 그가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존경하며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료에게, 이 분은 옳지 않은 것을 하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너무 멀리 계십니다. 늘 사람들이 둘러싸서 다가갈 수도 없고, 설사 곁에 계셔도 자신같은 죄인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서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이 바로 곁에 계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자기를 버려도, 심지어 부모형제도 멀리 있어도, 예수님이 바로 곁의 십자가에서 그의 곁에 계십니다. 심지어 같은 십자가, 같은 고통, 같은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 강도는 바로 곁에서 숨을 몰아쉬는 예수님에게서, 바로 곁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가 죽으면 모든 원수는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하나님은 피할 수 없습니다.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무덤까지 찾아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면, 그 바로 옆에까지 오셔서 같이 매달리셔서 숨을 몰아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떠나서 도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두려운 사랑입니다. 아가 8:6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이 그 강도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전에는 그 분과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큰 죄인이었는데, 이제 그 분이 내 곁에 오셔서 나와 같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그 분이 어디를 가시더라도, 내가 그 분을 따라갈 수도 있겠다는 소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이것은 매우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가 죽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으셔도 그의 나라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 강도는 예수님이 전하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었으니, 그도 듣고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는 것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킹덤,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이 왕으로 등극하시고 다스리시는 나라가 곧 올 것이며 그 때가 찼다는 메시지를 그도 듣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이 대목에서는 예수님은 실패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실 것을 열렬히 기대했지만, 그 분도 결국 로마군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죽임당하시니, 그 분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도 결국 실패라고 하며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리라 말합니다. 이 나라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나라임은 그에게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우리의 육신이 죽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어서 영혼이 가는 천국이 아니라, 살든 죽든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의 왕국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의 실패나 패배가 아닙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는 영광받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 인정받으실 것입니다. 이 강도는 놀랍게도 이 사실을 알아서 예수님이 그의 나라에 들어가실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주 겸손히 또 담대히 부탁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여기서 나를 기억해 달라는 말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도 그 중에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대답하십니다. 낙원이라는 단어는 파라다이스인데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이 낙원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고 할 때 나옵니다. 낙원은 일차적인 의미는 나무와 물이 있는 정원과 같은 곳입니다.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할 때 생명나무와 생명수 강물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나무는 죽었습니다. 그 위에 달린 사람에게도 죽음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과일을 먹는 이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생시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숨을 몰아쉬기에 금방 목이 마릅니다. 그래서 신 포도주로 갈증을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생명수의 강물은 누구나 값없이 마실 수 있으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그 날 이 낙원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강도가 가장 운좋게 구원받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어서, 아무 선행이나 공로가 없지만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강도가 운좋게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 강도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영원한 하늘 영광과 신성을 가지신 분이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당할 죄와 사망의 저주를 대신 지시고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그 강도처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질 십자가는 예수님이 오롯이 지셨습니다. 이 사실 앞에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강도가 예수님과 같은 형벌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 형벌을 완전히 예수님께 넘긴 우리는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강도가 십자가에 나란히 못박히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우리를 끝까지 쫓아오시는 불길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더 감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강도들과 같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불의한지 보여줍니다. 십자가 양쪽의 강도들은 우리 인간 전체를 대표합니다. 죄악 속에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을 비방하고 자신의 안위만 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 강도처럼, 예수님이 내가 받아 마땅한 형벌을 받으시고 그만큼 내 곁에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신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죄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며 우리에게 낙원을,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가까이 동행하는 고난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